달이 차고 기울 듯...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의 가까웠다 멀어진 행보
류샤오치는 그렇게 중국 공산당 정치무대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중국 공산당사에 가장 기이한 회의로 꼽히는 지난 1968년 10월 13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류샤오치의 사형 선고를 내리는 회의였다.
마오쩌둥의 주도에 단 한 명을 빼고는 그 누구도 반발을 하지 못한 회의였다.
하지만 본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둘을 가장 가까운 전우였다. 지난 1922년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안위안루 탄광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둘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 통치 시절 우파로 몰리는 고초를 함께 치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의 무력 투쟁 노선에 대대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쭌의회의에서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편을 들어 마오가 공산당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힘쓴 공이 있다. 좌경 교조주의에 맞서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은 생사를 함께한 동지였던 것이다.
류샤오치는 이 때 ‘공산당원 수양을 논하다’, ‘당내 투쟁을 논하다’ 등의 저작을 내놓으며 공산당의 좌경 교조주의를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류샤오치를 인정했다. 한 번은 보이보에게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에 대해 “류 동지야 말로, 우리 국민당내 비밀공작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칭찬했을 정도다.
류샤오치는 1943년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 역을 맡는다. 이 때 서기는 마오쩌둥, 류샤오치, 런비스 등 3명이었다. 소위 마오쩌둥 사상이란 것을 정립하고, 당의 핵심 사상으로 자리 잡도록 한 게 바로 이 시기의 류샤오치였다. 류샤오치의 마오쩌둥의 관계를 짐작하도록 하는 대목이다.
류샤오치는 이 공이 인정돼 1945년 중국 공산당 제 7차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로 임명된다. 사실상 마오쩌둥에 이은 당내 2인자의 직위였다. 마오쩌둥 부재시 당의 실무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이어 1959년 류샤오치는 드디어 중국 국가 주석으로 당선이 된다. 이 때부터 중국내 출판된 출판물에는 류 주석과 마오주석의 이름이 나란히 쓰였다. 류 주석에게는 ‘마오 주석의 가장 친밀한 전우’라는 칭호도 주어졌다.
마오쩌둥은 지난 1961년 영국의 몽고메리 육군 원수를 면담했을 때 “류샤오치가 내 후계자”라 공식 언급하기도 했다.
그런 둘이 갈라선 것은 1962년초 한 가지 사건 때문이었다. 마오쩌둥은 훗날 기록을 통해 “1962년 류샤오치에게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쓰고 있다. 또 문화대혁명을 촉발시킨 마오쩌둥의 격문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글에서도 ‘1962년 우경화’라 이 사건을 지칭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무슨 사건이 그토록 친밀했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사이를 서로 용납하지 못할 사이로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