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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건국공신

피의 광시곡 문화대혁명의 여론조작을 막아라 2-2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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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먼저 적을 놀라게 하라’는 것은, 중국 공산당의 여론 정책에서 보여주는 전술이다. 즉 여론을 떠보는 작전이 실패하면 또 언제든 꼬리 자르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정치 중심 베이징이 아닌 상하이에서 시작했다.

 

야오원위안의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 海瑞罷官)'을 평한다>이란 글에 대해 지식인들의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그 반대의 극좌적 여론도 급성장 했다.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11차 전체회의(이하 11중전회)를 연다.

 

이 회의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의 창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 회의였다.

 

문화대혁명은 소위 무산계급의 독재를 완벽하게 실행하기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운동이라는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마오쩌둥이 발동을 건 문화대혁명의 창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저우언라이 (周恩来)도 점차 문화대혁명 시대에 '방패'의 역할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바로 중국 공산당 당사가 규정한 소위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다.

 

1966년 8월 1일로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11중전회 회의는 처음부터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마오쩌둥은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중앙이 대학 혁명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작조 90%의 이상이 나쁜 짓만 한다. 군중을 억제하고, 제어하려고만 한다." 고 했다.

 

이어 마오쩌둥은 회의 첫날 바로 칭화(清华)대학 부속 중학 홍위병에게 편지를 쓴다.

 

이 어린 학생들은 당 중앙이 파견한 공작조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마오는 편지에서 "어린 학생들의 혁명 정신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밝혔다.

 

마오가 어린 홍위병들의 편을 직접 들었으니, 전국 각지에서 그나마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했던 유관부서의 공작조 파견 노력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마오쩌둥은 8월 3, 4일 회의서 당의 공작조 파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좋게 말해서 방향성의 오류라 하지, 실제 상황을 말하면, 지금 공작조들이 하는 일들은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무산계급 혁명을 억제한 것이다.", "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이들 가운데도 (무산계급 혁명에 반대하는) 괴물 종자들이 있다." 엄청나게 살벌한 비판이었다.

 

마오쩌둥의 주장에 따라 11중전회의는 연장됐다. 그리고 8월 5일 운명이 날이 왔다.

 

마오쩌둥은 이날 문화대혁명 총동원령인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라는 글을 발표한다.

 

글에서 마오쩌둥은 현 류샤오치(刘少奇)를 핵심으로 한 지도부를 '류샤오치를 수뇌로 한 자산계급 사령부'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목 그대로 폭파시키라고 명한다. 글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현 류샤오치 등 지도부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덩샤오핑邓小平 등은, 그제서야 마오쩌둥이 지난 '5.16 통지'에서 지칭한 우파 수정주의, 자산계급의 대표 인물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마오쩌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장칭 등 소위 문화대혁명의 사인방들은 매일 치밀하게 모든 공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주석이여, 명령만 내리소서"하는 상황에 마오쩌둥이 마침내 "사령부를 폭파하라" 명을 내린 것이다. 사인방의 대공세가 시작된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나이는 이미 68세. 중국 공산당의 산증인 저우언라이였지만 평생 보지 못한 풍파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본인의 안위도 위험했지만, 수십 년 건국까지 함께 한 오랜 동지들을 보호하는 일을 저우언라이가 맡게 됐다.

 

저우언라이의 구출작전의 대상 제 1호는, 손문( 중산.中山)의 부인 쑹칭링(宋庆龄)이었다.

 

1966년 11월 12일은 중산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중산의 아내인 쑹칭링으로 하여금,  이를 기념해 런민르바오(人民日报)에서 '쑨중산'선집을 발간하게 한다.

 

장칭江青은 쑹칭링이 주도한 중산선집특집을 트집 잡고 싶어했지만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바로 저우언라이가 이 중산선집 책의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다음 저우언라이가, 홍위병들의 당 간부들에 대한 비판에 대항해 한 일은,  8월 30일에 '당이 보호해야 할 당 간부 명단'을 밝힌 일이다.

 

이 명단의 가장 첫 번째에 바로 쑹칭링이 올라와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많은 자료들은,  저우언라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당 간부와 사적을 보호하려 노력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천이(陈毅), 허룽(贺龙) 등의 당 간부들도, 저우언라이가 최선을 다해 보호했다고 한다.

 

당시만해도 런민르바오((人民日报)) 가 따랐던 당 중앙은. 마오쩌둥이 아닌 류샤오치를 핵심으로 한 당 중앙이었기 때문에, 저우언라이의 반대 여론전이 인민일보를 통해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중국당사출판사가 중국의 학생들을 위해 출판한 ‘중난하이춘추( 中南海春秋)’라는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재 구성한 스토리다.

 

이상의 이야기에서, 문화대혁명 초기 베이징의 런민르바오(人民日报)가 사인방의 '피의 광시곡'으로부터 당 간부들을 구출하는 여론전에서 차지했던 역할, 그리고 사인방의 수족이 됐던 상하이의 원후이바오(文汇报)가 차지했던 역할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즉 관영매체의가 중국의 여론형성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