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年1月23日,发生了一件让现代集团的郑周永会长、让所有韩国人民都难以忘怀的大事件。该事件发生在朝鲜平壤。
在雪花飞舞的平壤顺安国际机场,从北京出发的朝鲜民航旗下伊留申航空集团的63M机降落在跑道上。没过多久,飞机的安全门打开,乘客开始下机,但那么大的飞机,下来的乘客只有20多人。其中,有一群引人注目的人,他们的衣着打扮及语气与朝鲜人完全不同。他们正是现代集团的郑周永会长一行人。
南北分裂之后,作为韩国企业家第一次收到朝鲜的正式邀请、踏上平壤之地的郑周永,回到金浦机场。
郑周永会长作为韩国企业家首次踏上了平壤土地。像现在一样,当时的朝鲜也是封闭的,是一片未知的土地。这次郑周永会长一行人能够访问朝鲜,也是受到朝鲜“祖国和平统一委员会”委员长许锬的特别邀请,才有了这样的机会。
1985年,韩国与朝鲜进行有关南北首脑会谈的谈判时,金日成主席派特使秘访韩国,许锬正是当时的特使,将金日成的想法转达给全斗焕总统,积极参与了韩朝之间的协商。当时,许锬是朝鲜劳动党内权力排名第4的人物。
郑周永会长访问朝鲜的前几周,韩国第13届总统卢泰愚上台了。韩国政府成功举办88奥运会之后,开始积极地致力于对朝外交,韩国与朝鲜之间进行了活跃的贸易活动,三星物产、双龙汽车以及晓星物产,从朝鲜各进口了2万吨无烟煤。
1989年1月,郑周永与叔母、侄子在故居。
“我们一起讨论一下南北经济人交流与金刚山开发的问题。”这是许锬邀请郑会长时的提议。笔者曾多次提到过,郑周永会长的故乡本在朝鲜地区,战争爆发之前,他为了逃生来到了南边,之后再也没有机会回去了。时隔40多年,郑周永会长再次踏上了故土,心里感慨无比,回忆起了当年的无数。
坐上机场轨道车来到候机楼,楼顶上有“平壤”两个字的红色招牌映入郑周永的眼帘。“啊,真的来到朝鲜了。”楼顶的正中央挂着金日成主席的肖像,其右侧有“PYONGYANG”的英语招牌。大概是晚上7点左右,雪意渐浓,但大家都不觉得冷,可能是太紧张的缘故。走到机场内,“祖国和平统一委员会”副委员长全今哲前来迎接,郑周永的亲戚们也在一起。郑周永看到经过岁月和世事的蹉跎,变得苍老的亲戚们,眼角泛了泪。40多年前,他为了活命仓皇而逃,如今,他作为企业家取得了大成功,以国宾的身份荣归故里。看到成功的郑周永,亲戚们的眼角也挂上了泪珠。
郑周永会长诞生102周年,在现代重工业蔚山市本社总公司的大厅里设置的半身像。
第二天,劳动新闻与平壤新闻大书特书了郑周永一行人访朝的消息,介绍郑周永为“南韩的企业家”,表示了特别的关注。其他共产主义国家的报社也大量报道了相关消息。当时,俄通社-塔斯社预测:“继郑周永会长的访问,其他韩国企业家也将会陆续访问朝鲜。”经过访朝事件之后,郑周永会长决心致力于开发朝鲜,并将想好的事情付诸实践。虽然时下的韩国与朝鲜关系恶化,郑周永没法实践所有他想做的朝鲜开发项目,但开城工业区、金刚山观光等项目都是这个时期定下来的。郑周永在朝鲜与韩国之间的关系上,起到了非常重要的作用。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20)
금의환향
남한 기업가로선 처음으로 평양 땅 밟아…
1989년 1월 23일.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에도 잊지 못하는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사건의 장소는 북한 평양이다.
하얀 눈발이 날리는 평양 순안국제공항에는 베이징에서 이륙한 조선민항 소속 일류신 63M기가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 이어 트랙차량이 이동하고 비행기 문이 열리며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승객이라고 해야 기껏 20명 남짓. 그런데 이중에는 눈에 띄는 일행이 있었다. 차림새와 말투가 북한 사람과 전혀 다른 이들이 있었다.
바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일행이었다. 남한 기업인이 처음으로 평양 땅을 밟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북한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역시 폐쇄 사회였고, 미지의 땅이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许锬)의 초청으로 이뤄진 방북 길이었다.
허담은 이미 1985년 남북정상회담이 물 밑에서 논의되는 과정에서 김일성 주석의 특사로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던 협상의 베테랑이다.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김일성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북한 노동당 서열 4위의 인물이었다.
당시 한국은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한국 정부는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자신감을 바탕으로 북방외교에 적극 나서고 있었던 시점이다. 북한과도 국회회담 예비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다. 남북간 교역도 진행돼 삼성물산, 쌍용, 효성물산 등이 북한 무연탄을 각 2만톤씩 수입했다. 정주영 회장 방북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남북 경제인들의 교류와 금강산 개발 문제를 논의하자.” 허담 위원장이 정 회장을 초청하면서 한 제의였다. 이미 첫 머리에 이야기했지만, 정주영 회장은 이북이 고향인 실향민이었다. 정주영 회장이 고향 땅을 찾았던 것은 40여 년만의 일이었다. 미뤘던 부친의 환갑 잔치를 하려 고향을 찾았다가 소련군의 모습에 놀라 허겁지겁 다시 남으로 내려왔었다. 정주영의 감회 역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트랙을 내려오자 정주영 회장 일행의 눈에 공항청사 옥상의 빨간색 간판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평양’이라는 글은 보는 이들에게 ‘아 정말 북에 왔구나’하고 새롭게 느끼게 만들었다. 옥상 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 초상화가 걸려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PYONGYANG’이라는 영어 글자판이 서 있었다. 시간은 대략 저녁 7시 무렵, 눈발은 날렸지만 춥지는 않았다. 모두 긴장을 한 때문일까?
공항에는 조평통위 부위원장인 전금철(全今哲)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정주영의 친척들과 함께였다.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늙고만 친척들의 모습에 정주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과거 작은 성공 뒤 부모님을 찾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금의환향이었다. 말 그대로 국빈대접을 받는 그런 정주영의 모습에 가족들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다음날 로동신문과 평양신문은 정주영 일행 방북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정주영은 ‘남한 기업가’라 소개하며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평양에 주재하는 공산국 신문들도 이날 정주영 일행 방북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러시아의 인타르타스 통신은 “정 명예회장의 방문에 이어 앞으로 다른 남한 기업인들의 평양 방문이 이어질 것”이라 전망했다. 정주영은 이때 여생을 북한 개발에 힘쓰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은 실천으로 옮겨진다. 오늘날 다시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중단되고 말았지만, 개성공단, 금강산관광은 이때 추진된 일이다. 남북한의 가장 중요한 협력사업을 정주영이 만들어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