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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건국공신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16편, 인민지원군의 절름발이 지휘관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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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지원군 42군을 지휘한 우루이린(吳瑞林)은, 1915년 쓰촨(四川)성 바중(巴中)현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부터 벽돌·기와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은 매달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공장 관리자들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직공들을 몰아세웠다.

 

1925년 무렵 이미 당시 공장에는 몇 명의 공산당 지하당원이 있었다. 이들은 노조를 결성했고 파업을 벌였다.

 

우루이린은 파업투쟁에 용감하게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우루이린은 13살때인 1928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1932년 10월, 우루이린은 중국 공농홍군(工农红军 / 공인가 농민출신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무장병력 )에 입대해, 통신병을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군 생활에 접어든다.

 

통신병이라해서 오늘 날같은 무전기가 매우 귀해 취급하는 인원도 극 소수였다.

 

당시 통신병들은, 과거 전장의 편지를 나르던 연락 비둘기처럼, 부대의 중요 서류나 연락사항을 적은 편지들을 직접 지니고 목적지에 가서 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산길을 걸을 때도 많았다.

 

통신병의 임무수행방법은 단순했지만, 부대간의 비밀과 명령을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었기에, 공산당의 홍군을 궤멸시키려는 국민당군의 특수부대의 주 목표대상이었고, 잡히지 않으려면 많은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수많은 죽을 기회를 넘어 용케 살아남은 그는 1934년부터 시작된 대장정 ( 大长征 )을 처음부터 함께 하며 국민당군의 추격전투에서 살아남은 초기의 홍군으로서, 1936년 12월 12일 시안사변 이후 전개된 국공합작군의 일원으로서, 전면적 항일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러던 1939년 가을,  24살때 그의 인생에 큰 일이 일어났다.

 

당시 우루이린은 행동대 대장으로 산동(山東)성 타이산(泰山)지구의 한 마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다가 포위를 당했다.

 

휘하의 중대장이 배신해 그의 위치를 일본군에게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그는 부하 10여명과 함께 결사항전했다. 그는 팔과 복부,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구원 병력이 도착하면서 포위를 뚫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으로 고향에 내려가 반년 정도 요양생활을 해야했다.

 

팔과 복부 총상은 치유됐으나 허벅지는 대동맥이 파열되어 완치가 안됐다. 결국 한 쪽 다리를 절게 됐다.

 

몸이 나아지자 우루이린은 복귀해 연대장을 맡게됐다. 하지만 주변의 시선이 문제였다.

 

’절름발이 지휘관’이 제대로 전투를 지휘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컸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전공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였다. 목숨을 버릴 것처럼 용감하게 싸웠다. 싸우고 또 절뚝거리고, 절뚝거린 후에 또 싸웠다.

 

그의 명성은 높아갔다. 부하들로부터 진정한 존경을 받게됐다.

 

그에게 ’절름발이 우장군’이란 별칭이 생겼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물러나자 국공내전이 터졌고,  그는 지금의 동북3성지역인 만주에서 국민당군과 싸워, 마오쩌동의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건국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는 동안 우루이린 절름발이 장군은, 인민해방군 동북야전군 제5종대 부사령관을 거쳐 제4야전군 42군 군장으로 진급했다.

 

1950년 10월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을 선언할 때 42군을 이끌고 중국인민지원군으로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했다.

 

1952년 10월 귀국했고, 1955년 10월 인민해방군에 계급제도가 도입되면서 중장 ( 투스타) 계급을 수여받았다. 

 

당 중앙군사위는 중장이 된 그를 1955년에 제 4대 하이난(海南)군구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957년 고등군사대학 기본학과에 입학해 2년 동안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군사이론을 배우는 한편 인민해방군의 역대 전쟁 경험을 연구했다.

 

졸업을 하자 당 중앙군사위는 그에게 난하이(南海)함대 사령관 직을 맡겼다.

 

군 생활에 있어 육군에서 해군으로의 일대 전환이었다. 해군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그였지만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해군 상무부사령관까지 올라간 그는 해군의 기틀을 잡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리고 80이 되던 1995년 4월 21일, ’절름발이 장군’ 우루이린은 먼저 간 전우들의 뒤를 따라 마지막 숨을 거뒀다.

 

 

사망한 지 20년이자 탄생 100주년인 2015년 11월 6일 쓰촨성 바중시 난감산 꼭대기에 ’개국 중장’ 우루이린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이날 유족들은 우루이린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골을 중국 각지에 흩뿌렸다.

 

산둥성 르짜오(日照) 앞바다에, 하이난다오의 베이부만(北部灣)에, 베이징의 진산(金山) 묘지에, 그리고 동상 밑에 유골이 각각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