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여성의 삶이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 얼마나 서글픈지, 얼마나 부조리한지 보여준다. 흔히 삼종지의(三從之義)라 했다. 어려서는 부친을 따르고, 결혼해선 남편을 따르면, 늙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말이다. 모파상의 소설도 삼종지의에 대한 서양적 진실이다. 동양은 일찍이 모계사회였다고 하는데, 갑골자로 본 여성은 너무도 일찍이 순종의 덕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계집 녀(女)는 누가 봐도 한 여성이 무릎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여성이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게 어미 모(母)다. 계집 녀(女)에서 젖가슴이 강조됐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숭고한 모습이다. 재미있는 게 어미 모(母) 자형의 발전이다. 계집 녀(女)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서에서 어미 모(母)는 어미일 뿐이다. 계집 녀(女)의 모습이 글자 속으로 사라진다. 계집 녀(女) 발전사에 가장 서글픈 모습이 노비 노(奴)다. 여성의 팔을 비틀어 뒤로 잡아채는 모습이다. 여성을 뒤로 낚아채 마음대로 하는 게 노예다. 낯선 사내에 이끌려 낯선 곳에서 온갖 잡일을 다하며 아이도 낳아야 했던 게 노예다. 손에 이끌린 여성이다. 그 마음
불타는 초가 바로 주다.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는 초다. 바로 주(主)의 도리다. 그래 본래의 주는 소유하지 않으며 강제하지 않는다. 그저 주변을 밝혀 어둠을 밝혀 양과 음을 구(區)하며 명과 암을 나눈다. 성경과 사서삼경이 책 한 권을 밝히는 도리를 한자 주(主)는 한 글자에 담고 있다. 한자 주(主)의 도리다. 갑골자 주는 대형 초다. 불타는 초다. 나뭇가지 위로 춤추는 화염(火焰)과 화심(火心)히 보인다. 화염은 광(光)의 시작이다. 빛은 주의 발현이다. 한자 주(主)는 스스로 주인 됨을 주장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태워 밝힐 뿐이다. 소유하지 않고 밝혀 있음과 없음을 구분해 낼 뿐이다. 사실 소유(所有)가 본래 그렇다. 그저 거기 있음을 밝히는 게 바로 소유다. 여기서 소유하지 않는다고 함은, 본래의 소유를 할 뿐, 요즘의 의미처럼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는 그래서 큰 학문의 시작이다. 대학의 도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 ‘대학지도 재명명덕’ (大學之道 在明明德) 모든 게 스스로를 태워 주는 주(主)의 덕이다. 내가 없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내가 있다 바로 노자의 도(道)다. 진정한 주인(主人)의 도다.
나무가 나무인 이유는 풀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풀이 풀인 이유는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동물인 이유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요, 꽃이 꽃인 이유는 풀이 있어 꽃과 풀이 다른 탓이다. 자연의 법칙이다. 서로 달라 조화롭고 서로 달라 화음을 낸다. 자연의 법칙, 그대로가 적용되는 게 한자의 세계다. 한자의 세계는 평등하다. 상호의존적이다. 한자 하나하나가 자신의 뜻을 갖고 문장 속에서 그 뜻을 발현한다. 한자의 뜻은 한자와 한자의 관계 속에서 더 분명해진다. 문장 속에 또 다른 한자와 호응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차이는 필요할 때만 드러난다. 예컨대 ‘간(干), 우(于), 천(千)’ 모두 비슷하다. 차이가 적다. 그저 기울기가 다르고 꼬리 모양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간은 ‘줄기’, ‘’행하다‘는 뜻이고 우는 ‘~에’, ‘~보다’는 조사다. 천은 '10의 100배'요, '100의 10배'다. 생김새만 놓고 문장에서 한 글자만 쓴다면, 간을 우 같은들 우가 천 같은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자는 이렇게 평소에 구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 문장에 동시에 간이나 우, 우나 천 등 두 글자 이상 쓰이는 경우, 간은 다시 간이요
我的生意 wǒde shēngyi 내 사업 家荣,你听说了吗?... Jiā Róng,nǐ tīngshuō le ma? 찌아롱, 소식 들었어요? 凯文通过了HSK的高级考试! Kǎi Wén tōngguò le HSK de gāojí kǎoshì! 케빈이 HSK 고급 시험에 합격했대요! 和我有什么关系? 不是我的生意! Not my business! Héwǒ yǒu shénme guānxi? Búshì wǒde shēngyi! Not my business! 저랑 무슨 상관이 있죠? 제 사업이 아니에요! Not my business! *영미권에서 ‘business’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많이 표현한다면, 중국에서는 ‘关系(guānxi)'로 표현한다. 그렇기 때문에, 찌아롱의 대답은 ‘和我有什么关系?’로 끝내는 편이 좋다. 중국에서 ‘business(生意)’는 사업적인 얘기를 할 때만 쓰인다.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같은 것을 비교해 다른 것을 알아내는 게 차별의 차(差)다. 같은 곡물을 비교해 둘의 다름을 보는 모양이다. 갑골, 금문 등에 등장하는 구(區)는 오늘날의 글자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은 물건들을 하나의 경계로 묶어낸 모습이다. 일부 글자는 한 선을 꿴 모습도 있다. 즉, 구별의 구는 공통점을 갖는 여러 물건을 한 데 묶은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각각의 공통점이 다른 무리들이 만들어지는 데, 그 그룹과 또 다른 그룹의 다름이 구별(區別)이다. 바로 이점에서 차(差)와 구(區)는 완전히 다르다. 간단히 말해 출발이 다르다. 차는 같은 것에서 출발하고, 구는 다른 것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다른데 한 가지 공통점, 혹 대표적 특징으로 묶이는 한 무리를 만드는 게 바로 구다. 구별은 그렇게 공통점과 특징으로 묶인 그룹 간에 이뤄지는 것이다. 차는 같은 것에서 떼어내는 것이고, 구는 다른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은 우리 가운데 있고, 구별은 너희 가운데 있다. 차별은 조직을 해치고 구별은 조직을 단합시킨다. 중요한 것은 차별이나 구별이나 그게 필요할 때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만물은 어찌 구별하면 하나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만물은 우주 속 또
참새는 목이 짧아 참새요, 황새는 목이 길어 황새다. 참새가 목이 길면 참새가 아니고, 황새가 목이 짧으면 황새가 아니다. 황새가 목이 길다고 자르면 살지 못하고 참새가 목이 짧다고 늘이면 역시 살지 못한다. 생물이 그렇다. 서로 다르다. 본래 그렇다. 같은 새라도 참새와 황새가 다르고, 사람이라도 너와 내가 다르고, 너의 그가 다르다. 세상 만물은 다르기에 서로 어울려 산다. 다르기에 조화가 생기고, 만물이 있어 생동이 있다. 다르다는 건 평소 눈에 띄지 않는다. 참새와 황새가 다르다는 걸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걸 너와 내가 다르다는 걸 평소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굳이 강조할 필요없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르기에 달리 살고 달리 살기에 조화롭되, 간여하지 않는다. 다른 게 강조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것만 빼고 같을 때다. 모든 게 같을 때 비로소 다름이 두드러진다. 모두가 같기에 굳이 차이(差異)를 찾는다. 차이(差異)의 차(差)라는 게 그렇다. 같은 것끼리 비교해 다른 것이다. 갑골자의 차(差)는 벼(禾) 가지 두 개를 든 손이다. 훗날 하나를 들고 기구로 재는 모습의 글자 형태도 나온다. 자로 벼의 크기를 재는 것이다. 같은 벼의 다름을
“热”女朋友 “rè ”nǚpéngyǒu 뜨거운 여자친구 哇!你的女朋友真漂亮! ... Wa!Nǐ de nǚpéngyǒu zhēn piàoliàng ! 와! 여자친구가 정말 예뻐요! 是啊,我很喜欢她,她很热! Shì ā,wǒ hěn xǐhuān tā,tā hěn rè! 네, 제가 많이 좋아해요, 그녀는 정말 뜨거워요! 很热? Hěn rè? 뜨겁다고요? 是的,She is hot ! Shì de,She is hot! 네, She is hot ! *영어의 ‘hot’은 ‘섹시’라는 뜻도 있고 ‘뜨겁다’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이다. 찌아롱이 말한 ‘she is so hot’은 ‘그녀는 참 섹시해요’라는 뜻인데, 직역으로 ‘她很热’라고 표현하면 ‘그녀는 정말 뜨거워요’가 된다. 정확한 표현은 ‘她很性感(xìnggǎn)’이다. >>맞는 문구: 是啊,我很喜欢她,她很性感!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단장의 고사는 아기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이야기다. 아기 원숭이가 잡히자, 어미가 따라 오며 울다 울다 결국 죽고 말았는 데, 죽은 어미 원숭이의 그 가슴을 열어보니 너무 깊은 슬픔에 오장육부가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짧지만 이처럼 혈육 간 이별을 표현한 글이 있을까. 그래서 나온 표현이 단장, 장이 끊어졌다는 말이다. 단장의 슬픔이 단장의 아픔이 바로 이별의 슬픔요 아픔인 것이다. 애달픈 것은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 아픈 이 슬픈 단장의 이별을 약속 받는다는 점이다. 그게 삶이다. 삶은 얻었다 잃는 것이다. 차면 기우는 달처럼 만났다 헤어지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이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노랫말 그대로다. 우리는 매일 너무 살갑고 익숙한 너무도 사랑하는 오늘의 너와 너희와 이별하고 있다. 갑골자 별(別)은 이런 이별의 아픔을 하나 틀림없이 그려낸다. 뼈에 붙었던 살점을 칼로 뜯어내는 모습이다. 뼈에서 살이 떨어지는 아픔, 그게 바로 이별의 별이다. 단장의 고사, 이별의 아픔, 별(別)이라는 한자는 그렇게 담고 있는 것이다.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것, 내게서 너를 떼어내는 것, 그래서 너무도 아픈 것 아파서 잊을 수 없는 것 바로
세상은 존재(存在)로 채워져 있다. 세상(世上)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란 없다. 존재하기에 인식(認識)되는 것이다. 또 인식되지 않는 걸 아는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걸 우리는 인식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는 감지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알 길이 없다. 표현할 길이 없다. 존재하기에 있다하고 있지 않음을 알기에 없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유와 무는 모두가 하나의 존재다. 유의 존재요, 무의 존재인 것이다. 갑골자에서 유(有)는 손안의 고기다. 본래 손 그 자체다. 있다는 것은 내 손으로 만져지는 것이며 내 손에 들려지는 것이었다. 내 손에 없는 게 내 손에 있다가 없어진 게 바로 없는 것이었다. 무가 있어 유가 나오고 유가 있어 무가 나온 것이다. 있다하는 것도 없다하는 것도 없음도 있음도 모두가 세상에 존재하기에 느끼고 인지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와 무는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존재로서 모두가 하나인 것이다. 없다는 존재(存在)요, 있다는 존재인 것이다. 공(空)과 색(色)처럼 양(陽)과 음(陰)처럼 실(實)과 허(虛)처럼 하나의 존재들인 것이다. 비워진 것이 공이 채워지려 하고 채워진 색이 비워지려 하듯 뜨거운 양이 차가워지
무는 없다는 것이다. 없다는 것은 어찌 알까? 한자를 그런 무(無)를 표시했다. 그것도 상형자다. 도대체 어떤 모습에서 없다는 것을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을 다 알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있는 것들, 그 외 것이 바로 무(無)인 것이다. 있는 것을 빌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사실 갑골자의 무(無)가 그렇다. 춤을 추는 모습이다. 춤을 추며 손에 든 것을 몸에 부착한 것을 모두 보여주는 게 바로 무(無)다. 춤이라는 의미의 무(舞)가 생기면서 없을 무(無)와 구분됐지만 없을 무(無)나 춤출 무(舞)나 본래 하나의 글자였다.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을 다 보여준 뒤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 곁에 무엇이 없는지를 …. 갑골자 무는 그렇게 실제론 가차자다. 춤 무(舞)를 빌어 없을 (無)로 썼다. 있음을 빌어 없음을 표기한 것이다. “遥知兄弟登高处, 遍插茱萸少一人。” (요지형제등고처, 편차수유소일인) “저 멀리 형제들 산에 올랐겠지. 그리고 돌아가며 수유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다 그 때 비로소 다시 알겠지. 내가 자리에 없음을 ….”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 한 구절이다. 중양절 산에 올라 수유나무 가지를 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