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丢”了男朋友 “Diū ”le nánpéngyou 남자친구를 잃어버렸어요. 马丽丽好像今天不高兴。 Mǎ Lìli hǎoxiàng jīntiān bù gāoxìng. 오늘 마릴린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是啊,她怎么了? Shìa ,tā zěnmele ? 그러게요, 무슨 일이래요? 我知道! Wǒ zhīdào ! 내가 알아요! 听说她丢了她的男朋友! Tīngshuō tā diū le tā de nánpéngyou ! 남자친구를 잃어버렸대요! *영어의 ‘lost’은 ‘잃어버리다’라는 뜻도 있고 그를 ‘차버렸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이다. ‘차버렸다’는 중국어로 “踹、甩”이다. 맞는 문구: 听说她甩了她的男朋友! Tīngshuō tā shuǎi le tāde nánpéngyou!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을 고르는 일이고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 고른 땅을 다지는 일이다. 세상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이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초요, 기본이다. 삶과 인생의 공리다. “모든 일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있고서야 비로소 끝이 있다. 모든 일이 본이 있고, 본이 있고서야 비로소 말이 있다.” 대학의 도리다. 자연의 순리다. 땅이 고르고 단단해야 그 위에 무엇이든 지을 수 있다. 심지어 어느 나무도 터를 잡지 않고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더욱 그렇다. 삶의 터를 잡아야 삶이 편해지는 것이다. 삶의 터는 어떻게 내리는가? 한자 기(基)가 그림으로 그 방식을 전한다. 땅 위를 돌을 쌓아 만든 틀로 내려치는 것이다. 때리고 때려, 다지고 다져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기초도 마찬가지다. 기본 틀을 되풀이 해 익히고 익히는 것이다. 다지고 다져 능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면 익혀야 한다. 그 배움이 다져지고, 익숙해져 기초가 될 때 비로서 삶이 편해진다. 바로 알면 실행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경지다.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
舍南舍北皆春水, 但见群鸥日日来。 shě nán shě běi jiē chūn shuǐ, dàn jiàn qún ōu rì rì lái 。 花径不曾缘客扫, 蓬门今始为君开。 huā jìng bú céng yuán kè sǎo, péng mén jīn shǐ wéi jun1 kāi 。 盘飧市远无兼味, 樽酒家贫只旧醅。 pán sūn shì yuǎn wú jiān wèi, zūn jiǔ jiā pín zhī jiù pēi 。 肯与邻翁相对饮, 隔篱呼取尽余杯。 kěn yǔ lín wēng xiàng duì yǐn , gé lí hū qǔ jìn yú bēi 。 초당 주변으로 온통 봄기운 가득하고, 갈매기들은 날마다 날아오네 꽃잎 떨어진 길 그대로 두고, 싸리문 활짝 열어 오는 그대를 기다리네 장터가 멀어 가지 못해 초라한 안주,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술은 오래 묵은 탁주뿐 그대만 좋다면 이웃의 말솜씨 좋은 영감 불러내 남은 술 함께 마시세 말년 행복이라는 게 뭘까?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집을 짓고 조용한 서재에서 책을 읽고 산책하는 게 일상인 생활은 어떨까? 가끔, 산해진미는 아니어도, 탁주에 푸성귀가 전부라 해도 이웃, 친구와 왁자지껄 즐거운 술상을 함께 할 수 있다
기쁘고 슬프고 모두가 실은 하나다. 정(情)이다. 정 하나의 서로 다른 양 끝이다. 관계가 있고서야 정도 쌓이고 정이 쌓여야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이다. 만남의 시작은 본래 고기 한 점이다. 같이 나누는 고기 한 점, 같이 먹은 한 상 차림 바로 모든 관심의 시작이요, 관계의 시작이다. 정(情)의 시작이다. 정은 마음이 항상 푸른 것이다. 관심이 생기고서야 상대방이 내 마음 속에서 항상 푸른 것이다. 갑골자, 아주 오랜 사람의 글자 속에 보이는 사귈 제(祭)의 의미다. 발이 있는 귀한 그릇 위로 고기 한 점을 얻는 손의 모습이다. 사귄다는 건 상대방의 숟갈에 얹는 고기 한 점이었던 것이다. 이를 죽은 이에게 하면 제사(祭祀)가 되고, 산 이끼리 하면 축제(祝祭)가 된다. 너와 나의 사귐은 하나의 경계를 넘는 교제(交際)가 된다. 여기 제(際)에는 경계를 의미하는 부호가 담겼다. 사귐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서로 나눈 고기 한 점, 귀한 식사 한 번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본다. 쉽게 아우라의 빛에 취한다. 진품이 내는 게 아우라지만, 사람들은 진품의 진위를 가리지 못한다. 그저 아우라만 볼뿐이다. 그게 사람이다. 사실 보이지 않고, 보여주지도 않고, 보라는 게 어불성설일 수 있다. 다만 현명한 사람, 현인은 그렇지 않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한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더욱 더 노력해서 본다. 감추는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초나라 재상 소해휼(昭奚恤)에 대한 이야기다. 어찌나 능력이 뛰어난지 다른 나라의 모두가 이 소해휼을 두려워했다. 초나라 왕이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때 한 사람이 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그 유명한 호가호위(狐假虎威)의 고사다. “옛날 백수의 왕인 호랑이가 숲에서 여우를 만났습니다. 그 여우가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내가 백수의 왕이야. 하느님이 그리 정했지. 힘만 세고 무식한 네가 알 일이 없지.’ 말을 들은 호랑이가 어이가 없어 말했습니다. ‘거짓말이면 잡아먹겠다.’ 여우 역시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앞장서 걸어갈 터이니, 네가 따라오면서 잘 봐둬. 다른 동물들이 나
목숨으로 하는 게 그 옛날 성벽을 쌓는 일이다. 진시황이래 만리장성 벽돌을 쌓으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려야 했던가. 한 왕국의 기틀과 완성은 그 왕국을 둘러싼 성벽이 얼마나 튼튼한지, 장엄한지가 좌우했다. 담을 쌓는 것 바로 나와 너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것이며 내가 홀로 섰음을 만천하에 고하는 것이다. 세속의 왕조가 그렇듯 한 개인의 삶도 그렇다. 내가 어떤 담을, 어떤 성벽을 쌓고 지켜가느냐에 내 삶이, 인생이 좌우된다. 바로 업(業)이다. 업에 대한 설명은 좀 복잡하다. 금문에 나타나는 모습이 쉽게 그 의미를 짐작하기 힘든 탓이다. 요즘 갈수록 복잡해지는 세상은 업(業)이란 말의 숙명 같기도 하다. 금문에 등장하는 업의 자형도 그 형태가 다양하다. 글자를 겹쳐 쓰기도 했다. 업을 악기의 받침대로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 고대에 업(業)이라는 악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많은 이들이 업(業)을 담을 쌓는 일로 공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 벽돌을 만들어 성벽을 쌓듯 그렇게 하나하나 쌓아가 이루는 게 아닌가 싶다. 가장 모든 일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게 바로 업(業)의 본의가 아닐까.
心“破”了 Xīn “pò ”le 마음이 깨졌어요 家荣,你看起来很难过,怎么了? Jiāróng ,nǐ kàn qǐlái hěn nánguò ,zěnme le ? 찌아롱, 슬퍼보이네요, 무슨 일이에요? 是啊,我的女朋友跟我分手了。 Shì ā ,wǒ de nǚpéngyou gēn wǒ fēnshǒu le. 여자친구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别太难过了。 Bié tài nánguò le. 너무 슬퍼마세요. 哎,我的心破了! Āi ,wǒ de xīn pò le ! 아, 제 마음이 깨졌어요! *영어의 ‘break’가 ‘파손되다’라는 뜻도 있고 ‘찢어지다’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이다. ‘破’는 ‘파손되다, 망가지다’라는 뜻으로 옷이 찢어지거나 해질 때 많이 쓴다. ‘마음이 아프다’ 또는 ‘마음이 찢어지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서지다’라는 뜻의 ‘碎(suì)’ 를 써서 ‘心碎了’라고 말한다. 맞는 문구: 哎,我的心碎了! Āi ,wǒ de xīn suì le !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본래 교훈은 실패에 있다. 성공은 항상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조건이 맞춰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성공했다고 해서 내가 한다고 성공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실패는 다르다. 남의 실패는 항상 나의 실패가 된다. 남의 실패를 피하면 성공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실패의 요인이 되풀이 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한자로 그 것을 흔히 필망(必亡)이라고 한다. 현대 한자로 사정(死定)이라고 한다. 앞의 한자는 반드시 죽고, 뒤에 한자는 죽도록 결정돼 있다는 말이다. 필망은 시간이 지나도 필망이다. 100년 전의 실패 요인은 대부분의 경우 요즘도 실패의 요인이다. 그것이 인문적 요인인 경우 특히 더 그렇다. 기술적 발전이나 시대의 변화 속에 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책사 장의(張儀)은 이런 점에서 중국 역대 최고의 책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많은 책을 남기지 않았지만, 독특한 지혜와 행실로 유명하다. 장의와 친구 소진을 가르친 스승 귀곡선생은 두 책사 덕에 역사 속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도 지금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한국에는 장의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 왕조 탓이다. 책사는 자국의 이익을
이치(理致)란 바로 돌 속의 옥이다. 사물의 이치란 그 사물이 다듬어 이르는 것이다. 이치란 본래 의리정치(義理情致)의 줄임말이다. 주어인 의(義)와 정(情)을 빼고 줄여 이치(理致)라 했다. 말 그대로 “의(義)를 다듬어, 정(情)이 이른다.” 는 뜻이다. 요즘 줄여서 도리(道理), 순리(順理) 등의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도리는 무엇이고, 순리는 무엇인가? 도리는 그러한 것이고, 순리란 그러는 것이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그 거다. 그냥 그대로 바로 자연이다. 모두가 자연을 따르자는, 순기자연(顺其自然) 의 도리, 이치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항상 그런 것의 이치다. 정확히 그렇고 그런 것들을 하나로 꿰는 보물, 일이관지(一以貫之)다. 한자 리(理)에 담긴 뜻이다. 금문에서 등장하는 리(理)는 옥(玉)을 꿴 보물과 옆의 리(里)다. 설문해자는 옥이 뜻(意)이요, 리는 음(音)이라 했다. 리(里) 역시 금문에 나온다. 땅을 다듬어 밭을 만드는 모양이다. 리(理)의 구성 자형을 모두 뜻으로 읽으면 땅을 다듬어 밭을 만들어 옥, 보물을 얻어낸 것이다. 본래 옥은 돌 속에서 자라난다. 깎아 다듬지 않은 옥의 외형은 그저 돌, 강바닥에 널린 조각돌이다. 돌 속에
包子的“里边” Bāozi de “lǐbiān ” 찐빵의 안쪽 马丽丽,你下课的时候要下楼买东西吗? Mǎ Lìli ,nǐ xiàkè de shīhou yào xiàlóu mǎi dōngxi ma ? 마릴린, 방과 후에 뭐 사러 갈거에요? 是啊,老师,你要我帮你买什么吗? Shì ā ,lǎoshī ,nǐ yào wǒ bāng nǐ mǎi shénme ma ? 네, 선생님,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帮我买两个包子吧,我饿了。 Bāng wǒ mǎi liǎng gè bāozi ba ,wǒ è le. 찐빵 2개만 사다주세요, 배고파서요. 没问题,你要什么里边的包子? Méiwèntí ,nǐ yào shénme lǐbiān de bāozi ? 알겠서요, 어떤 안쪽의 찐빵이 좋으세요? *‘内容’은 컨텐츠의 내용을 뜻한다. 음식의 ‘속’은 ‘馅(xiàn)’이다. 자주 쓰는 표현으로는 ‘肉馅(ròuxiàn)’, ‘饺子馅’등이 있다. à 맞는 문구: 没问题,你要什么馅的包子? Méiwèntí, nǐ yào shénme xiàn de bāozi?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