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있어 스스로를 낮춰 천해지려 할까. 누가 있어 스스로 더러워지며 남을 깨끗이 하려할까. 누가 있어 많고 적고의 높고 낮고의 차별 없이 공평할 수 있을까. 누구 있어 존재만으로 남에게 생명을 줄까. 물 수(水)의 덕(德)이다. 물 수(水)는 가장 오래된 한자 중 하나다. 강의 물이 흐르는 모습이다. 항상 중심을 잡는 중봉(重峯)의 수류(水流)와 항상 넘치며 물길을 넓히는 지류(支流), 변연(边沿)의 각 두 획으로 이뤄져 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반짝임을 표현한 듯도 싶다. 내 천(川)이 급속히 흐르는 물이라면 물 수(水)는 멈춘 물이라 할까. 큰 내 강(江)과 바다 해(海) 모든 물을 대표한 자가 바로 물 수(水)다. 항상 물은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며 항상 물은 스스로를 더럽혀 돌과 동물에 묻은 더러움을 닦아 준다. 항상 물은 크고 작은 모든 구덩이를 채워야 비로소 다시 흐른다. 항상 물은 바위를 만나 피해 흐르지만 결국 천년 바위의 모양을 바꾸고 결국 그 바위를 깨뜨린다. 물은 낮은 곳을 채워 강을 이루며 바다를 이룬다. 사해의 모든 물이 결국 바다를 만든다. 바다의 장엄함은 다른 게 아니다. 차별이 없어 한 없이 커진 규모에서 나온
예(禮)란 많은 한자처럼 단순하기만 한 것을 사람들이 괜히 복잡하게 만든 것이다. 예가 무엇이냐? 질문에 누구도 한 마디로 답을 하지 못하는 데 본래 단순했던 걸 원래 쉽기만 했던 걸 아는 척 하는 이들이 복잡하게 만든 탓이다. 예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순서다. 순서를 알고 지키는 것이다. 한자 예(禮)의 발전을 알면, 무슨 말인지 안다. 갑골자에서 예(禮)는 본래 풍(豊)이다. 그 풍(豊)에 제사를 의미하는 시(示)가 붙어서 예(禮)가 됐다. 오늘까지도 풍(豊)에는 예의 발음이 남아 있다. 풍(豊)은 그릇에 담긴 곡식과 과일이다. 예가 그릇에 담긴 곡식과 과일인 셈이다. 감사의 제(祭)를 지내는 마음으로 내놓은 음식 한 상이 바로 예(禮)인 것이다. 그 음식과 음식을 내놓으려 마련된 자리에 손님이 들어서는 순간부터 손님이 음식을 들고 자리를 나서는 순간까지의 모든 일의 순서가 바로 예(禮)다. 예란 결국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순서인 것이다. 대접, 접대의 어려움은 해본 사람만이 안다. 접대는 본래 받기보다 하기가 더 힘든 법이다. 과(寡)하면 상대방이 불쾌하고 과(過)하면 내가 손해다. 순서를 정하고 그에 맞춰 하면 가장 적당한 접대가 된다. 손님은 손
어린이의 싸움은 코피가 승부의 관건이다. 먼저 코피를 흘리게 하면 승패가 갈린다. 어린이의 주먹질이다. 어른의 싸움은 다르다. 오늘 날 직장에서 그 옛날 전쟁에서 승패는 코피로만 전장 위 장병들의 피로만 갈리지 않았다. 철저한 실리였다. 승패의 패(敗)가 그 의미를 잘 보여준다. 패는 간단히 돈을 잃는 것이다. 철저한 실리였던 것이다. 갑골문의 패(敗)는 조개를 도구로 때려 부수는 모양이다. 조개는 때론 정(鼎)의 모습을 띄기도 한다. 혹자는 조개 패(貝)를 태양의 흑점이 나타나는 때라 해석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조개 패(貝)가 상징하는 게 아주 귀중한 것이라는 점이다. 조개는 과거 돈이었다. 정(鼎)은 왕권을 상징하는 그릇이었다. 모두가 귀중한 것들이다. 그 귀중한 것이 깨지는 게 지는 것이다. 역으로 눈앞에 굴욕이 있어도 속으로 실리를 잃지 않으면 지지 않는 것이다. 지지 않는 것! 사실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전쟁의 경전인 ‘손자병법’은 승(勝)을 논하지 않는다. 패(敗)를 논하는 책이다. 정확히 패하지 않는 법을 논하는 책이다. 먼저 싸움을 피하라 조언한다. 무적(無敵), 적(敵)이 없는 것은 적을 무찔러 얻기도 하지만 적을 피해서 얻기
조개를 줍는 게 얻는 것인데, 그게 바로 지는 것의 시작이요, 부채(負債)의 시작이다. 묘한 게 한자다. 그럼 이기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버리는 것이다. 떠나는 것이다. 최소한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멀리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이길 승(勝)이 그렇다. 한자에서 이긴다는 건 떠나는 것이다. 배를 운전해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고기 육(肉) 옆에 돋아날 생(生)을 쓰기도 하는데 이길 승(勝)을 돼지 용종(茸腫), 혹이나 사마귀에 비견해 더 하찮게 보는 것이다. 무적(無敵)은 이겨서 되는 게 아니다. 이길수록 적은 더 생긴다. 눈에 보이는 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많아질 때 위험은 더욱 커진다. 싸우면 무찔러 이겨야 하지만 그것은 지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싸워 이길수록 내 기력도 쇠하고 언젠가 적 같지도 않았던 적에게 지고 만다. 그래 진정한 승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다. 적을 피해 적이 스스로 망하도록 하는 자다. 그게 이길 승(勝)의 도리다. 그 배를 여럿이 저어가는 게 동(同)이다. 구령에 맞춰 배를 저어가는 모습이다. 구령에 여러 손이 노를 저어간다. 그리고 언제든 그 배마저 떠날 수 있을 때
갖는다는 건 행복 불행 성공 실패 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가졌기에 행복하고 가졌기에, 아니 더 가져야 하기에 불행한 것이다. 가졌기에 써야하고 가졌기에 지켜야하며, 지켜야 하기에 마음이 쓰이고 마음을 쓰기에 항상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마치 행운(幸運)의 행(幸)이 나를 속박하는 수갑에서 유래해 행복한 순간 불행이 시작됨을 경고하듯 부담의 부(負)도 갖는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밝고 어두운 양면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탓인지 한자 부(負)는 금문에서 나온다. 금문은 춘추시대 청동기 시대의 문자다. 사람이 조개를 줍는 모습이다. 조개는 일찌감치 석기시대 인류가 발견한 금과 같은 자산, 기축통화였다. 그리고 뜻은 ‘생활력이 생기다’, ‘의존하다’는 뜻에서 ‘힘입다’, ‘떠맞다’는 뜻을 넘어 심지어 ‘저버리다’, ‘패하다’는 뜻까지 갖게 됐다. 사실 부는 자형만 보면 단순히 ‘갖는다’, ‘갖으려 한다’는 뜻이다. 위의 모든 뜻은 바로 ‘갖는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졌기에 책임(責任)이 생기고 부담(負擔)이 생긴다. 그래서 짐도 되고, 근심도 된다. 하지만 그래서 갖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인가? 두려워 말라. 그칠 줄 알면
무엇이든 극에 이르면 인간인 우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극에 이른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인지 능력 밖에 있다는 의미인 탓이다. 지극한 기쁨도 지극한 행복도 지극한 고통도 지극한 슬픔도 실은 우리의 인지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성체에서 발현된 수많은 객체들처럼 수억의 섬모처럼 서로가 서로에 반근착절(盤根錯節), 얽매여 있는지 모른다. 극도의 난마(亂麻)에 순간 우리는 놀라 소리치고 울고 싶어도 소리도 눈물도 잃고 만다. 바로 노자의 ‘치극허’(致極虛)의 경지다. 극한의 기쁨에 극한의 고통에 극한의 슬픔에 맞아 우리는 우리 자체를 잊는다. 노자는 이 경지를 ‘歿身不殆’(몰신불태: 몸을 잃어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정말 그럴지, 치극허에 가보지 않은 탓에 잃어 본 적이 없는 탓에 무엇이 어떻게 위험하지 않은지 알 길은 없다. 사실 인생을 살며 극한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 누구며, 극한 기쁨을 겪는 이 누군가? 과연 우리의 몇이나, 삶에서 감정의 극한에 이를까. 그저 감정들의 극한에 대한 숙념 속에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한자의 세계에서 기쁨의 경지는 고통과 닿았다. 지극(至極)의 끝은 또 다른 지극의 시작인 것이다.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동양 철학의 정수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어떻게 무엇을 마음먹느냐, 바로 그거다. 마음이 무엇이냐, 물리적으로 피가 뛰는 심장이다. 보통 사람의 주먹 크기다. 왼쪽 젖꼭지와 가슴 중앙선 사이의 뼈 아래 근육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피를 돌린다. 성인기준 8만㎞ 길이의 혈관에 피가 돌도록 한다. 굴심방결절의 심박조율기 세포는 심장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뛰도록 한다. 대략 1분에 72회 정도다. 운동은 심박 속도를 늘리고 휴식은 심박 속도를 줄인다. 감정은 이 심장 리듬의 변화다. 묘하게도 놀랍게도 고대 동양의 현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일체유심조 이 말 속에는 바로 이 같은 생물학적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 대표적인 글자가 쾌락(快樂)의 쾌(快)다. ‘몹시 즐겁다’는 뜻이 쾌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도 담겨져 있다. 쾌는 갑골자가 아닌 금문에 나온다. 소전의 쾌(快)는 심장을 날카로운 기구로 긁어내는 모양이다. 가려움을 긁어주는 모양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심장을 긁는 극한의 고통이기도 하다. 쾌락의 본질이요, 고통의 본질이기도 하다. 본래
다다른다. 이른다. 사실 성공과 가장 어울리는 동사다. 목표에 이르고 목적에 다다르면 우린 그걸 성공이라고 한다. 이루는 것을 이른다하고 이루고 난 것을 성공이라 한다. 성(成)은 다 이르고 난 뒤를 말한다. 달려오는 동안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경계 자세에 들어간 것이 성(成)이다. 성(成)까지의 과정이 이르름이다. 지(至)다. 사실 성(成)보다 중요한 게 바로 다다를 지(至)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를 수 있고 다다를 수 있을까. 한자 지(至)에는 그 답이 있다. 지 자형에는 여러 설명이 있다. 바닥의 자형이 땅을 의미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위의 모양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혹자는 태양의 광선이라 하고 혹자는 새라고도 한다. 혹자는 화살이라고도 한다. 가장 의미가 와닿는 게 화살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쏘아 올린 화살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모습이 바로 ‘이른다’는 것이다. 이른다는 것은 내 화살이 이르는 것이요, 화살에 실린 내 힘이 이르는 것이다. 내 능력이 다다르는 곳이다. 그 화살이 떨어진 곳이 바로 내 힘이 닿는 곳인 것이다. 이른다는 것을 알면 내 힘이 닿는 곳을 알면, 목적을 세울 수 있고 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게
신체 어느 한 곳이 중요하지 않으랴. 예부터 ‘身體髮膚受之父母’(신체발부수지부모: 몸과 머리 피부 모두는 부모가 주신 것이다)라 했다. 몸의 어느 하나도 내 것이 아닌 부모님의 것이니, 아끼고 아끼라는 의미다. 요즘엔 이 말을 듣고 내께 아니니까, 마음대로 하지 하는 젊은이도 있을 수 있겠다. 옛날엔 내 것은 함부로 막대해도 남의 것, 특히 부모, 친지, 친구 등 친족과 지인의 것은 함부로 하지 못하고 더욱 아껴 나온 말이다. 머리도 귀중하고 손도 귀중하고 가슴도 귀중하다. 그럼 그 중에서 우리가 꼭 중요하다 알아야 할 건 무엇일까. 머리? 손? 가슴? 옛 현인들이 꼽은 의외로 발(足)이다. 한자에서 발은 다양한 기호로 쓰인다. 지(止), 족(足), 치(夂) 등이 대표적이다. 머리도, 손도, 가슴도 아닌 발이라니? 현인들은 왜 발을 아는 걸 중시했을까? 발은 기본적으로 이동의 뜻이 있다. ‘걸어간다.’는 게 발의 기능이다. 누구나 알아 잊지 않는 부분이다. 반면 누구나 알아서 쉽게 잊는 부분도 있다. 마치 공기가 흔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듯, 너무 중요한 데 너무 당연해서 잊는 부분이다. 발의 ‘멈춘다’는 기능이다. 발은 걸어만 가는 게 아니다. 걸어가 목적지
아름답다는 단어처럼 복잡하고 추상적인 게 있을까? 미(美)는 굳이 칸트의 지적이 아니어도 그 자체로 이율배반적이다. 미(美)에 붙는 수많은 형용사가 증명한다. 화려한 미가 있고 단순한 미도 있으며 …. 현대적 미가 있는가 하면 고전적 미도 있다. 개인마다 선호하는 미(美)가 다르다. 또 일단 미라 불리는 것에 대해 인간 모두가 느끼는 인간이라 느끼는 그런 보편적인 미(美)도 있다. 그래서 서양의 철학자들은 미라는 감성을 보편과 주관, 취미로 나눴다. 미적 감각은 인간만의 특징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이어서 느끼고 추구하는 게 미(美)다. 아름다움은 다시 숭고함으로 의연함으로 말초적인 것으로 심오함으로 나뉘기도 한다. “글이 생겨 오해를 낳았다”는 노자의 말처럼, 미(美)는 마치 봄비 맞은 이끼처럼 이리저리 새롭게 뿌리를 내려 자랐다. 결국 누구도 쉽게 미(美)를 이해하고 이야기하기가 어렵게 됐다. 한자는 다르다. 한자의 세계에서 미(美)는 글자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美)일 뿐이다. 단지 많은 이들이 그 본연의 뜻을 잊고 살 뿐이다. 갑골문자 미(美)는 춤추는 무당이다. 깃털로 장식한 무당의 모습이다. 자형으로는 양(羊) 아래 큰 대(大)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