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좋은가?” 참 묘한 질문이다. 단순한 질문인데, 대부분 즉답(卽答)없이 머뭇거린다. 묘한 질문이 또 있다. “내게 어울려?” 자신이 입을 옷인데 친구에게, 가족에게 묻는다. 가장 가까운 이에게 묻는다. “‘품위’(品位) 있다.” 흔히 성품(性品)이 고아(古雅)한 사람을 이른다. 한 사람만 “그렇다”하면 동의하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렇다”하면 동의하는 사람이 는다. 세 사람이 “그렇다”하면 대부분이 동의를 한다. 거짓말도 마찬가지다.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고사가 있다. 한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믿는 이가 적지만 두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믿는 이가 늘고 세 명이 “호랑이가 나타났다”하면 대부분이 믿는다는 말이다. 한비자와 전국책에 나온다. 증삼살인(曾參殺人)의 고사도 있다. 공자의 제자 증삼은 인품이 고결(高潔)하기로 유명했다. 모두가 “품위 있다”고 인정을 했다. 그의 모친은 그런 아들을 믿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 와 “증삼이 살인을 했다”고 했다. 모친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한 채 베틀을 짰다. 또 한 사람이 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했다. 모친은 애써 무시를 하고
참 묘한 게 정(情)이다. 미움이라 알았는데, 마음 깊이 남은 게 사랑이라 알았는데, 열정 끝에 남은 게 바로 정(情)이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처럼 마음의 바닥에 농축되고 응집돼 내 마음의 끝에 남은 게 떠나지 않고 머무는 게 바로 정(情)이다. 정(情)이란 게 그렇다. 그래서 “사랑해” 보다 깊고, “미워해” 보다 애틋하다. 그래서 “사랑해”를 “미워해”와 같은 뜻으로 만들기도 한다. 정이란 게 그렇다. 사랑과 미움이 오랜 교차로 농축된 감성이다. 푸른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다. 마음, 심(心)이 푸른(靑) 게 바로 정(情)이다. 마음, 심이 맑은 게 바로 정이다. 푸른 마음, 맑은 마음이 바로 정이다. 복잡한 개념이라 갑골문엔 없고 금문도 금문 대전에서 나온다. 푸른 나무를 비추는 우물 옆의 마음이다. 마음이 나무와 같이 맑은 우물에 비취는 게 정이다. 정은 사랑과 미움, 그 극한 두 감정의 정화요, 그 극한 두 감정을 세월로 농축한 진액이다. 그래서 사랑보다 애틋한 게 다정(多情)이요, 미움보다 무서운 게 무정(無情)이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정이고 미움의 반대가 사랑이 아니라 다정이다. 이별이 그리 슬픈 건 사랑해서 미워해서
푸름은 맑음이다. 푸름을 비춰 더 푸르게 하는 맑음이다. 그게 푸를 청(靑)이다. 글자의 뜻이 그렇다. 우물이 비춘 푸른 나무가 바로 푸를 청이다. 푸름, 푸르름에 대한 인간의 첫 연의(演義)다. 푸르다는 것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철학적인 답이다. 푸를 청은 그래서 인문학적, 인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담고 있다. 왜 푸른 나무로 푸름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맑은 물에서 푸름을 봤을까? 왜 물은 푸름을 비춰 더 푸르게 하는 것일까? 사실 푸른 색을 검은 글자로 표시하는 유일한 길이 연역이다. 부연해 설명하는 것이다. 맑은 물에 비친 푸른 나무. 수많은 질문과 그 답을 담은 글자가 바로 푸를 청이다. 청(靑)은 그래서 시작이다. 맑음과 푸름 그 관계의 시작이다. 푸름에 대한 첫 비춤이요, 인식이다. 일본의 한 학자는 그래서 푸를 청을 농경의 의식으로 봤다. 농사를 시작하는 계절, 봄에 농기구를 피로 씻어내고 다시 그 피를 맑은 물로 씻어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 농사의 시작을 푸를 청이라 본 것이다. 어쨌든 청은 그래서 관계로 이뤄진 삶의 시작이다. 그래서 청춘은 푸르다. 비춤의 첫 봄이다. 청년은 푸른 나이다. 주변의 푸름을 비춰 더욱
땅에서 작은 씨앗이 자라듯 모두의 마음에는 매일 ‘무엇인가’가 자란다. 하나의 뿌리가 물을 원하고 하나의 줄기가 치솟길 원하고 하나의 잎이 햇볕을 원하듯 그 ‘무엇인가’는 뿌리처럼 목마르며 줄기처럼 양양(揚揚)이고 잎처럼 향하여 간다. ‘무엇인가’가 생기고 ‘갈망’하고 ‘바라’게 되며 ‘또 다른 무엇인가’를 ‘하고자’하게 된다. 바로 욕(欲)이다. 하려고 하는 것 살려고 하는 것 갖고자 하는 것 생의 의지의 각성이다. 한자의 세계에서 욕은 아주 오랜 개념이다. 곡(谷)을 흠(欠)하는 게 바로 욕(欲)이다. 본래 갑골시대 없다가 춘추전국시대 금문에서 등장한다. 다만 곡(谷)과 흠(欠)은 갑골시대 이미 보편적으로 쓰인다. 곡(谷)은 깊은 계곡 흐르는 시냇물이며 흠(欠)은 입을 벌린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다. 상상하면, 깊은 계곡을 가던 목마른 사람의 무리가 시냇물을 만나 줄지어 물을 마시려 하는 모습이다. 금문의 욕(欲)은 한편의 스냅사진이다. 계곡의 물을 마시려는 사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만족을 앞둔 모습이 바로 욕(欲)이다. 만족하려는 게 바로 욕이다. 욕은 완성의 직전이다. 무엇을 이루기 직전 주역에서 치는 최고의 순간이다.
안다는 게 무엇인가? 인간의 인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고 기억하는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가? 어렵고 복잡한 질문이다. 질문이 삶의 본질에서 사건의 지평선 경계까지 맞닿아 있는 탓이다. 삶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처럼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게 연구돼 마치 모두가 다 아는 양 여겨지는 그런 질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답을 하는 이는 드물다. 역시 그 질문이 삶의 본질에서 사건의 지평선 경계까지 맞닿아 있는 탓이다. 동양의 사고는 보다 본질적이다.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그 욕망을 본질로 보고 인간이 갖는 모든 질문에 답을 찾는다. 그 동양적 사고에 기초하면 사람의 본질은 동물이다. 동물은 생존과 번식이 본질적 목적이다. 간단히,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아 전하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 종족을 자신 속의 DNA를 자신의 삶의 흔적을, 기억을 그 흔적과 기억이 영원히 살아남도록 자자손손 전하는 것이다. 동양에서 안다는 것은 이 같은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 고리 속에 새로운 삶과 새로운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처음 안다는 뜻의 지(知)를 보고 스스로 물었다. 화살 시(矢)과 입(口)이 어찌 ‘안
믿음이다. 사람의 말(言)이다. 사람의 말이 믿음이다. 더 정확히는 사람의 말이어서 믿음이 필요하단 의미다. 사람의 말이 있고, 믿음의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사람의 말이라는 뜻의 신은 그래서 중의적이다. 사람의 말이어서 믿을 수 있고, 사람의 말이어서 믿을 수 없다는 의미다. 역사 속에 믿을 신(信)은 갑골문이 아니라 금문에서 등장한다. 사람(人)과 말(言)의 회의자다. 말은 신(信)보다 오래된 글자다. 갑골문에서도 나온다. 말은 혀를 바늘로 꿰뚫은 모양이다. 일본 학자들은 원시시대 제사를 지내고 주문(呪文)을 담은 그릇의 신성(神聖)을 보존하기 위해 봉인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굳이 원시시대 제사의 모습은 아니어도 혀를 바늘로 꿰뚫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한 모습으로 보인다. 말이라는 게 한번 하면 바꾸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인다. 사실 말이라는 게 사람만 하는 것이다. 당초 이 말씀 언(言)의 뜻이 사람의 말이요, 기도요, 소식이요, 믿음이란 의미였을 듯싶다. 하지만 사람의 말이 있어 의혹이 생기고 불신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사람이 더해져 강조된다. 믿음이 사라지며 나온 글자가 믿음인 것이다. 역사가 증명을 한다. 믿을 신(信)이란 글자는 금문의 시대
동서양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숫자에 대한 생각이다. 삶에 대한 자세다. 고개가 갸웃거린다. 숫자와 삶이라니? 한자와 그리스 숫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자는 동양 사상의 대표이고, 그리스는 서양 사상의 대표다 一, 二, 三 동양의 숫자다. Ⅰ, Ⅱ, Ⅲ 그리스의 숫자다. 동양의 숫자는 쌓여가고, 그리스의 숫자는 나열된다. 쌓여가는 것과 나열되는 것 바로 동서양의 차이다. 삶과 숫자는 무슨 관계일까? 삶은 간단히 숫자를 세는 일이다. 시간을 세고, 하루를 세고 계절을 세고 한해를 센다. 동양의 숫자는 그런데 쌓여가고 서양의 숫자는 나열된다. 동양의 삶은 쌓여서 세고 서양의 삶은 나열돼 세는 것이다. 쌓여가는 것은 지난 수 없이 새로운 수가 없다. 쌓지 않고는, 일이 없으면, 이가 없는 것이다. 서양의 숫자는 이 점에서 차이가 난다. 앞 수와 이어지는 새 수의 관계가 느슨하다. 아래 없이 위가 없는, 쌓여가는 동양의 숫자와 차이가 있다. 지난 순간 없이 새로운 순간이 없는 게 동양 삶의 자세다. 그래서 동양은 깊이 높게 쌓인 것들에 맨 아래 수에, 조상에 각별하다. 그래서 동양의 시인은 묻는다. 청산이여, 그댄 몇 번이나 이 석양을 세었는가? 靑山, 幾渡夕
무엇이 세계를 만들었을까?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한자는 만물을 담은 글자다. 또 만물에 인간의 생각을 투영한 글자다. 상형자를 기본으로 발달한 한자야말로, 플라톤이 만든 이데아(본질)와 티마이오소(이데아의 모조) 관계 설정에 딱 어울린다. 한자는 이데아요, 티마이오소다. 둘 사이의 관계인 미메시스(모방)다. 한자는 사물의 모방에서 시작해 거꾸로 인간의 생각을 사물에 투영해내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일까? 원천이요, 근원이다. 본래 점이지만, 한자는 좀 입체적이다. 점들의 모임, 연결된 하나, 바로 선이다. 수렴선이요, 기준이다. 한자의 일(一)이다. 일은 통계의 수렴선이다. 기준은 사물을 대표하는 것이며, 수렴되는 변화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다.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一)이다.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 그것은 위치도, 변화의 모양도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의 선일뿐이다. 5000년 전의 갑골문에서 오늘날까지 일(一)자는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기준, 아니 수렴선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일이 수렴선이요, 기준인 것은 인간의 한계 탓이다. 수렴선은 산포된 점들이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요, 그
지(志), 마음에 놓인 선비라는 뜻이다. 마음에 선비를 품는다. 다른 게 아니라 뜻이다. 의(意)요, 지(志)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요, 내 마음 속 선비다. 본래 선비란 무엇인가? 조선에서 ‘선비’라 했지, 본래는 그냥 ‘사’(士)다. 사실 선비의 사는 상형자다. 도끼의 모습이다. 본래 임금 왕(王)과 같이 쓰이기도 했다. 임금의 도끼가 더 크고 사의 도끼는 적다. 임금을 뜻하는 도끼 위에 한 획을 더하면서 글자의 차이가 생긴다. 사는 고대 가장 지위가 낮은 귀족이었다. 고대 형을 집행하는 관료를 의미했다. 문과 무를 관장해 전쟁을 치르는 계급이기도 했다. 춘추시대까지는 이 사 계급만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사 계급 아래 병졸이 생기는 전면전 시대가 됐다. 유럽으로 치면 기사 계급이었던 셈이다. 그냥 마음이 아니라, 형벌을 행하는 마음. 바로 지(志)인 것이다. 반드시 지키고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를 벌하겠다는 각오인 셈이다. 설문해자 해석은 좀 다르다. 갑골문자는 청나라 말기 발견됐다. 갑골문자에 대한 연구로 한자의 고대 의미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많은 문헌의 의미도 새롭게 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설문해자는 당대 한자에
'우리'는 나와 너의 조화다. 나만 있어도, 너만 있어도 '우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조합은 '너희'다. 결국 우리가 너희이며, 너희가 바로 우리다. 동양 고전에 큰 줄기를 형성하는 사물의 이치다. 철학적으로는 주역의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는 이치이며, 불가의 '색즉시공'(色卽是空) 사상에서도 보인다. 생활 속의 모두가 동포요, 친구라는 '사해주의'(四海主意)다. 서양에서는 19세기말 겨우 인간의 무의식에 관심을 갖으며 등장한다. 칼 융의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적 무의식)와 아니마(남성의 여성적 무의식)과 비슷하다. ‘우리가 바로 너희다.’ 바로 역(易)의 사상이다. 갑골문에서 역은 내 술잔의 술을 네게 나눠주는 모양의 글자다. 예수의 포도주다. 내가 네게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예수는 포도주와 빵을 영과 육에 비유하기도 했다. 역의 자형에 대해서 주물하는 모양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고, 위 태양과 아래 태음이 서로 뒤바뀌는 모습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다. 갑골문에서 발달하는 글자들은 역(易)이 처음 같은 두 그릇 가운데 한 곳에 담긴 액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이었다가 조금씩 한 그릇에서 옮겨지는 모습만 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