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 보는가? 불행의 시작이다. 위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아래만 보는가? 착각의 시작이다. 아래 역시 끝이 없는 탓이다. 위만 보고, 아래만 보는 것. 바로 삶이 속이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저 위만 보고 그저 아래만 보라한다. 그래서 위만 보고 달려 지쳐, 스스로 못났다 자괴하고 아래만 보고 머물러 혼자만 잘 났다 오만하게 한다. 진정한 삶은 위를 이해하고 아래를 아는 그 곳에서 출발을 한다. 바로 기준이다. 하나의 선이다. ‘공자(孔子)의 일(一)’이다. 위를 알고 싶은가? 그럼 기준을 보라. 아래를 알고 싶은가? 그럼 기준을 보라. 상(上)과 하(下)는 이런 진리를 일러준다. 복잡한 탓에 상 자는 갑골문이 아니라, 금문에서 등장을 한다. 대표적인 지사(指事)자다. 생각을 글자로 만든 게 지사다. 하 역시 마찬가지다. 금문에서 나온다. 기준 위의 점이 위 상(上)이요. 기준 아래 점이 아래 하(下)다. 위를 알고 싶으면 위의 맨 아래를 보라하고, 아래를 알고 싶으면 아래의 맨 위를 보라한다. 기준을 알면 손쉽게 위로 아래로 간다. 기준에 살면서 조금만 힘쓰면 위가 되고 조금만 쉬면 아래가 된다. 그래서 상하 기준을 제대로 알면 삶이 여유로워 진다.
오르고 또 오르고 싶은 게 사람이다. 위로, 위로 오르고만 싶다. 능력이 모자란 게 한(恨)일뿐이다. 그런데 묘한 게 오르고 올랐는데, 또 그 위에 뭔가가 있다. 이제 정상이다 싶었는데, 그 옆에 더 높은 봉우리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 멀었어!”하듯. 그럴 때 정말 힘이 빠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야 인생의 정상일까?’ 맞다. 역시 답은 문제에 있다. 왜 모든 산의 정상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 인생에는 정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내 주변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보다 보면, 가소로운 게 바로 내 아래 것들이다. 내가 정말 죽을 둥 살 둥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와서 보니 다시 더 높은 저 많은 봉우리들이 보이는데, 아직도 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한 것들이 수없이 많다. 여기까지 올라온 내가 주변의 수많은 더 높은 봉우리들을 보면서 ‘쉬면 안 되겠다. 다시 더 올라가자!’ 다짐을 하는 데 아래 수많은 것들은 그저 틈만 나면 쉬려고만 한다. 아쉽고 아쉬운 게 아래 것들이다. ‘뭐 그래서 아래 것들이지 …’ 하지만 얼마나 황당하고 철이 없는 생각인가. 자연을 관조하고 그에 비친 자신을 돌이켜 보면 자연히 반성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