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컬럼]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8)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것은 항상 일하지 않는 자다.”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것은 항상 일하지 않는 자다.”

 

이병철이 남긴 말이다. 지나면 지날수록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최소한 한국사회에는 그렇다. 뿌리 깊은 병폐다. 그의 아들 이건희는 삼성의 혁신을 강조하며 “차라지 가만히 있으라!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지마라!”라고 했다.

 

일제 말기 정미와 술제조로 큰 돈을 벌 때만해도 조선의 그저 돈이 있는 여러 집안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적인 명성은 있었지만, 그 부가 전국 1, 2위를 아니었다. 그가 한국전쟁 직전 서울에 진출 ‘삼성물산’을 세울 때만 해도 삼성물산보다 큰 회사가 5,6곳이 있었다.

 

그런 삼성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위에 올랐고,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만들자 이병철의 부가 전국 1,2위를 다투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제일모직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삼성그룹의 탄생에 있어 제일모직의 위치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제일제당만해 국내 시장 장악이 목표였다. 단순히 설탕을 대체해 직접 제조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목표가 단순하니 이병철의 주변에서도 모두가 쉽게 돈이 된다고 봤다. 그러나 제일모직은 달랐다. 목표가 한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이었다. 한국의 회사들이 경쟁 상대가 아니라, 이미 세계 유수의, 특히 영국의 모직회사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병철은 강행을 했고 성공을 한다. 이 때 이병철의 부는 이미 대한민국 제일이 됐다.

 

삼성그룹은 ‘제일’(第一)이라는 일반어를 마치 고유명사처럼 쓰는 버릇이 있는데,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이승만 박사의 제1 공화국 정부가 경제 운영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여러 국책 은행들이 부실하게 돼 이병철에게 자금지원을 요청하면서 이병철은 대한민국 정부보다 돈이 많은 인물이 됐다. 소위 ‘돈병철’(錢秉喆)이라는 별칭도 이 때 얻는다.

 

개인적으로 삼성의 탄생을 연구하면서 이병철이라는 인물은 보면 볼수록 남다른 면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돈을 보고 돈만 벌려 일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생각이 다르다. 그는 일을 봤고, 일을 성공해 돈을 번 것이다.

 

처음 정미소를 했을 때도 그렇다. 당시 이병철은 일반 조선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거금을 쥐고 있었고, 돈을 벌기 위한 수많은 선택이 있었지만 정미소를 택했다. 시장을 몰라 처음 실패했지만, 즉시 오류를 바로 잡았고 성공을 한다. 돈을 버는 데 성공을 한 게 아니라 정미 산업의 틀을 잡아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군자와 소인은 같지만 다르다. 소인은 판을 못보고 자기 몫만 보지만, 군자는 판을 보고 자기 몫을 안다. 적다고 욕하지 않고, 많다고 득의양양하지 않는다. 그저 판을 일구고 완성하는 게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소인배들이 어찌 군자의 안목을 알까? 세상의 모든 것이 차면 기울고, 고이면 썩는 법이다. 이병철의 안목은 그저 소인배들에게는 운이 좋고, 정치변동에 그 때 그 때 잘 야합해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삼성그룹의 성장에 한국에서 있었던 두 번의 혁명은 그저 고난이었을 뿐이다. 이병철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4.19(1960년 이승만 정권을 퇴진시킨 학생 혁명)와 5.16(1961년 박정희가 군사세력을 동원해 2회 공화국을 퇴진시킨 군사쿠데타) 두 혁명을 겪는 동안 나와 삼성이 입은 타격이 얼마나 컸던가를 새삼 통감했다. 추징금 명목의 막대한 정부 환수 때문에 삼성그룹의 자금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이목은 갈수록 이병철의 삼성을 곱게 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삼성처럼 실제 돈버는 사업을 만들지 못하고, 눈앞에 돈만 쫓던 소인배들의 질시가 컸다. 그런 질시가 만들어낸 사건이 바로 삼분파동이다.

 

우선 삼분파동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삼분파동에서 삼분은 당대 가장 중요한 생필품 3가지를 말한다. 설탕과 밀가루 시멘트다. 설탕과 밀가루는 음식을 만들고, 요리를 하는 가장 중요한 분말이었다. 시멘트는 6.25동란으로 전국 곳곳이 무너진 뒤 10년이 지나 다시 재건이 한창이던 시절 가장 중요한 건축자재였다.

 

삼분파동은 1963년 6월 이 세가지 생필품 가격이 하루 저녁 4,5배씩 폭등을 하던 것을 말한다. 당장 먹거리에 문제가 생기자, 전국 곳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누군가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시점, 묘하게 민중의 분노는 이병철을 향했다. 여론도 가세를 했다. 한 신문은 “풀떼죽으로 민중이 연명을 할 때 정치권과 재벌은 배를 불렸다”고 분노한 민중을 부추겼다.


사회

더보기
"급식체는 언어의 자연스런 변화" VS "사자성어도 말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 한 영상이 화제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영상은 소위 ‘급식체’를 쓰는 어린이들이 옛 사자성어로 풀어서 말하는 것이었다. 영상은 초등학생 주인공이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包的’라고 말하지 않지만, ‘志在必得’, ‘万无一失’, ‘稳操胜券’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老铁’라고 말하지 않지만, ‘莫逆之交’, ‘情同手足’, ‘肝胆相照’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绝绝子’라고 말하지 않지만, ‘无与伦比’, ‘叹为观止’라고 말할 수 있다…” ‘包的’는 승리의 비전을 갖다는 의미의 중국식 급식체이고 지재필득(志在必得)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의미의 성어다. 만무일실(万无一失)을 실패한 일이 없다는 뜻이고 온조승권(稳操胜券)은 승리를 확신한다는 의미다. 모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뜻하는 말이다. 초등학생이 급식체를 쓰지 말고, 고전의 사자성어를 다시 쓰자고 역설하는 내용인 것이다. 논란은 이 영상이 지나치게 교육적이라는 데 있다.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초등학생의 태도에 공감을 표시하고 옛 것을 되살리자는 취지에 공감했지만, 역시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억지로 만든 영상이라고 폄훼했다. 평파이 등 중국 매체들에

문화

더보기
[영 베이징] '관광+ 문화' 융합 속에 베이징 곳곳이 반로환동 변신 1.
‘문화유적 속에 열리는 여름 팝음악 콘서트, 젊음이 넘치는 거리마다 즐비한 먹거리와 쇼핑 코너들’ 바로 베이징 시청취와 둥청취의 모습이다. 유적과 새로운 문화활동이 어울리면서 이 두 지역에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바로 관광과 문화 융합의 결과라는 게 베이징시 당국의 판단이다. 중국 매체들 역시 시의 놀라운 변화를 새롭게 조망하고 나섰다. 베이징완바오 등 중국 매체들은 앞다퉈 두 지역을 찾아 르뽀를 쓰고 있다. “평일에도 베이징 시청구 중해 다지항과 동성구의 룽푸스(隆福寺) 상권은 많은 방문객을 불러모았다. 다지항의 문화재 보호와 재생, 룽푸스의 노포 브랜드 혁신이 시민과 관광객에게 새로운 소비 경험을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올여름 열풍을 일으킨 콘서트가 여러 지역의 문화·상업·관광 소비를 크게 끌어올렸다.” 베이징완바오 기사의 한 대목이다. 실제 중국 각 지역이 문화 관광 융합을 통해 ‘환골탈퇴’의 변신을 하고 있다. 베이징시 문화관광국 자원개발처장 장징은 올해 상반기 베이징에서 ‘공연+관광’의 파급 효과가 뚜렷했다고 밝혔다. 시에 따르면 대형 공연은 102회 열렸고, 매출은 15억 위안(약 2,934억 6,000만 원)에 달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