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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30)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3

 

 

5.16군사혁명 발발

일본에서 이병철은 대부분 시간을 골프장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냈다. 그렇다고 시간을 소비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병철은 일본에 이미 수많은 인맥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렇게 일본의 우수한 인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세상 동향을 읽었다. 그래서 이병철은 작은 한국에서 한국만 보지 않고 세계의 동향을 읽으며 경영구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1961년 5월 16일이었다. 이날 아침 7시쯤 이병철은 여느 날처럼 친지와 골프장으로 향하기 위해 호텔을 나와 승용차에 오른다. 이 때 일본인 운전사가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지금 한국에서 군사혁명이 났다고 합니다.”

 

 

5.16군사 혁명, 이 것은 당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이 정치권을 뒤엎고 일으킨 정변이다. 4.19 혁명이후 정부가 나라를 제대로 안정시키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군부가 들고 일어선 것이다.

 

 

한국 역사는 이에 대한 평이 입장마다 극과 극으로 나뉜다. 혹자는 이 군사혁명으로 한국의 민주화가 늦춰졌다고 하고, 혹자는 이 군사 혁명으로 한국이 빈국에서 탈출해 부국의 반열에 들었다고 한다.

 

 

역사는 보는 입장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다면상인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역사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명확하다.

 

 

오늘날 한국은 이 같은 역사를 거쳐 만들어졌다.

 

 

이 놀라운 소식에 차에 동승했던 지인이 “골프를 미루자”고 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냉정했다. 한국에 미군이 주둔하는 한 공산화는 되지 않는다. 사유재산을 완전 부정하는 공산주의만 아니면 일단 안심이다. 특히 4.19혁명이후 한국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뭘해도 그보다는 나은 상황이었다.

 

 

이병철의 고백을 들어보자. “동승했던 친지가 골프를 중지하자고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차를 몰게했다. 사회의 변혁이 있더라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느 한 적화(赤化)의 우려는 없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남을로써 도리어 정국이 안정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병철의 마음이 어찌 편안할 수 있을까? 이병철은 한편으로 착착한 심정을 가누길이 없었다. “그지 없는 생각에 잠기면서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치적 격변을 되풀이 해야 하는 조국의 운명이 서글퍼졌다.”

 

 

한국의 상황은 급진전되고 있었다. 군사 혁명 정부는 2~3일 사이 정국을 안정시키고, 전국의 치안도 안정시켰다.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조사도 대대적으로 벌였다. 그해 5월 29일 경제인 11명이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혁명 정부의 손길은 점차 이병철을 향하기 시작했다. 일본에 있는 재일거류민 단장이 이병철을 찾아 왔다. 혁명정부가 이병철의 귀국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어 2명의 혁명정부 관계자가 찾아와 “귀국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자 이번엔 일본 형사들이 찾아왔다. 이병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실 그 당시 일본 입장에서 이병철은 한일 관계에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한국 정부 전체와 맞먹는 재산을 이병철이 가지고 있었다.

 

 

한참을 숙고한 이병철은 편지 한통을 혁명정부에 보낸다. 그 내용이 공개되면서 모두가 경악을 한다. 호텔 앞이 기자들로 가득했다.

 

 

이병철이 남긴 편지다.

“부정축재자를 처벌한다는 혁명정부 방침 그 자체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악덕 기업인들과 변칙적이고 불합리한 세제하에서도 국가 경제 재건에 기여하면서 국민에게 일자리를 주어 생활을 안정시키고 세금을 납부하여 국가운영을 뒷받침해온 기업인들과는 엄격히 구별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염려하는 바는 오직 오늘의 호날의 근인은 국민의 빈곤에 있는 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제거하느냐 하는 의문에 대해 달리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경제의 안정 없이 빈곤을 추방할 수 없다. 경제인을 처벌하여 경제활동이 위축된다면, 빈곤추방이라는 소기의 목적에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이 것은 나를 비롯한 많은 기업인들의 처벌을 모면하기 위한 궤변이 결코 아니다. 나는 전 재산을 헌납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것이 국민의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바다.”

 

 

‘전재산 헌납’ 6월 11일 순식간에 이 소식이 한국 언론에 퍼졌다. 일본 언론들도 이병철을 찾아 관련 사실을 확인하고 나섰다. 이병철은 “강요 받은 사실이 아니다”고 밝혔고 그 사실은 다시 일본 언론을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이병철은 6월 26일 귀국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5.16 혁명이후 한달간 그렇게 정국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이병철이 한국 서울의 김포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늦은 시간이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가득했고 여름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비행기가 정지하자 한 청년이 트랩을 뛰어 올라왔다. 이병철의 이름을 부르더니 먼저 내리게 했다. 아래는 짚차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차에 올라 어디론가 끌려가야 하는 것이다. “어디로 가는가?” 이병철이 물었다. 다른 형무소가 헌병대이겠거니하고 물었던 것인데, 차는 엉뚱하게 명동을 향하고 있었다.

 

 

일본의 인재들과 어울리며 세계의 동향을 읽던 이병철. 타국에서 한국의 5.16 군사 정변 소식을 듣는다. 이병철은 흔들리지 않고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지만, 군사 정부의 손길은 그를 향한다. 결국 그는 군사 정부에게 편지 한통을 보내며 ‘전재산 헌납’ 카드를 꺼낸다. 쿠데타 약 한달 후, 이병철은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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