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한자 명상 - 생(生)과 사(死)

홀로 살고 죽어 누군가를 영원히 떠나는 것이다 - 관계학의 미학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또 무엇인가?

철학의 가장 기본적 질문이다.

두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의 철학과 신학이 시작됐다.

 

철학은 여전히

사람 속에 답을 찾고

신한은 그 답을

신에게 미뤘을 뿐이다.

 

생과 사는 그리도 어렵고

난해한 문제다.

 

한자의 생과 사는

답은 아니지만

그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을 보여준다.

 

사실 문제는 답이 아니다.

오직 문제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뭐냐에

답이 달린 것이다.

 

한자의 생은 싹이다. 땅에 솟은 새싹이다.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하는 상형자다.

 

 

죽음은 한편의 동영상이다.

생보다는 복잡한 그림이다.

단상 위 시체를 사람이 지켜보는 모습,

임종의 순간이다.

 

 

두터운 땅을 뚫고 솟아난 새싹,

그 여린 새싹이 어이 쉬울까?

땅 속에는 뿌리가 자리 잡고 있다.

 

싹은 뿌리가 내린 뒤

솟아나는 것이다.

삶이 그렇다. 어찌 뿌리 없는 생이 있으랴.

 

그래서 생은 외롭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뿌리를 내리고

두터운 지표를 뚫어야 한다.

 

새는 껍질을 깨는 노력을,

동물은 자생의 순간까지

수없는 몰생(沒生)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

삶은 결국 홀로 서는 과정이다.

외로운 일정(日程)이다.

 

식물의 싹이 생(生)을 대표하게 된 이유다.

삶은 외로운 일정이다.

 

반면 사(死), 죽음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다.

당사자가 몰생(沒生)하면

다 되는 게 아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죽음은 나만의 몰생(沒生)이 아니라,

나를 지켜보는 산 자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할 때

죽음이 진정 완료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는 건 외로워 힘들고

죽는 건 남는 자 탓에 힘든 것이다.

내가 내 죽음이

슬픈 게 아니다.

내가 죽어 남는 이가 있어,

그 이별이 슬픈 것이다.

죽음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학이다.

생별(生別)이 사별(死別)이 서로 다른 이유다.

 

 


사회

더보기
"급식체는 언어의 자연스런 변화" VS "사자성어도 말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 한 영상이 화제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영상은 소위 ‘급식체’를 쓰는 어린이들이 옛 사자성어로 풀어서 말하는 것이었다. 영상은 초등학생 주인공이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包的’라고 말하지 않지만, ‘志在必得’, ‘万无一失’, ‘稳操胜券’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老铁’라고 말하지 않지만, ‘莫逆之交’, ‘情同手足’, ‘肝胆相照’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绝绝子’라고 말하지 않지만, ‘无与伦比’, ‘叹为观止’라고 말할 수 있다…” ‘包的’는 승리의 비전을 갖다는 의미의 중국식 급식체이고 지재필득(志在必得)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의미의 성어다. 만무일실(万无一失)을 실패한 일이 없다는 뜻이고 온조승권(稳操胜券)은 승리를 확신한다는 의미다. 모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뜻하는 말이다. 초등학생이 급식체를 쓰지 말고, 고전의 사자성어를 다시 쓰자고 역설하는 내용인 것이다. 논란은 이 영상이 지나치게 교육적이라는 데 있다.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초등학생의 태도에 공감을 표시하고 옛 것을 되살리자는 취지에 공감했지만, 역시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억지로 만든 영상이라고 폄훼했다. 평파이 등 중국 매체들에

문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