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지원군 42군을 지휘한 우루이린(吳瑞林)은, 1915년 쓰촨(四川)성 바중(巴中)현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부터 벽돌·기와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은 매달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공장 관리자들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직공들을 몰아세웠다. 1925년 무렵 이미 당시 공장에는 몇 명의 공산당 지하당원이 있었다. 이들은 노조를 결성했고 파업을 벌였다. 우루이린은 파업투쟁에 용감하게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우루이린은 13살때인 1928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1932년 10월, 우루이린은 중국 공농홍군(工农红军 / 공인가 농민출신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무장병력 )에 입대해, 통신병을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군 생활에 접어든다. 통신병이라해서 오늘 날같은 무전기가 매우 귀해 취급하는 인원도 극 소수였다. 당시 통신병들은, 과거 전장의 편지를 나르던 연락 비둘기처럼, 부대의 중요 서류나 연락사항을 적은 편지들을 직접 지니고 목적지에 가서 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산길을 걸을 때도 많았다. 통신병의 임무수행방법은 단순했지만, 부대간의 비밀과 명령을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었기에, 공산당의…
항미원조전쟁 제 15회 , 운명의 영원전투가 시작되다. 1950년 11월 23일 새벽, 인민지원군 제 42군 군장 우루이린(吳瑞林)은, 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한센추(韓先楚)의 전화를 받는다. 38군 군장 량싱추( 梁兴初 )가 38군 단독으로 덕천을 공격하겠다고 하니, 당초에 세웠던 38군 42군의 합동 작전을 변경해, 42군은 단독으로 덕천의 서쪽 영원을 치라는 지시였다. 우루이인은 즉시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목표는 42군 정면에 있던 한국군 8사단이었다. 정면공격은 예하 125사단이 맡아 밀어부치고, 동시에 126사단은 한국군 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124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해 영원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사단장들에게 새 작전을 하달한 후, 우루이린은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영원 북쪽의 한 산봉우리에 올랐다. 힘들게 정상에 오른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부대가 공격할 영원 시내를 세밀히 관찰했다.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마을에는 하얀 눈만 쌓여 있었다. 영원의 한국군 부대상황를 완전히 파악한 그는, 돌격대를 편성해 8사단의 주력인 제10연대 지휘소를 먼저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다. 11월 25일 저녁 무렵, 제 2차 전역의…
인민지원군의 제 2차 전역의 개전 초에, 평안북도 덕천 인근의 대동강 상류의 교량폭파 기습전은, 이후 전세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제공했다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바로 전회에서 기술했던 그 당시 이 기습전을 이끌었던 38군의 정찰과장 장퀘이인 (張魁印) 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샨시성 출신인 장퀘이인 (張魁印)은 1922년생으로, 1951년 1월 항미원조전쟁에 투입돼 이 기습전을 지휘할 때 29살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1급 공훈훈장을 수여받고, 38군 114사단의 부사단장을 거쳐, 헤리롱지앙성 군구 ( 黑龙江省军区 )의 부참모장을 역임하고, 1982년 60세에 퇴직군인으로 전환돼, 이후 부군장급 (副军职)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부군장급 대우는, 부성장급으로 알려진다. 지난 2019년 12월 16일에 한 웨이보 ( 晨晖纪实 / 천훼이지시 / 아침햇살 기록) 가 41년 동안 감춰졌던 비밀이란 제목으로 장꿰이인을 인터뷰한 기록이 등장했다. 이 웨이보는 장퀘이인이 헤이롱지앙 성도인 하얼삔에서 아들식구와 함께 살며 노년을 지내는 가정을 방문해 인터뷰하고 당시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항미원조전쟁 초기에 있었던 무릉교
2차 전역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인 11월 24일, 인민지원군 38군의 군장 량싱추( 梁兴初 )는, 군단 정찰과장 장퀘이인 (張魁印)과 113사단 정찰과장 저우원리(周文禮)를 불러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적진을 돌파해 26일 오전 8시 전까지 덕천을 지나는 대동강 상류의 교량을 폭파하라는 임무였다. 38군이 덕천을 공격할 때 후퇴할 수 없도록 퇴로를 막기 위해서였다. 332명으로 구성된 정찰대가 구성됐다. 대부분이 공병대원이었다. 정찰대에는 소수의 영어 및 한국어 통역병, 길 안내 역할을 할 평안도 내무서 서장 등도 함께 대오로 편성되었다. 달빛이 고요한 11월 24일 밤, 정찰대는 한국군 7사단이 지키고 있던 적진 구역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뢰밭과 철조망을 통과하면서 점점 깊숙히 적진으로 들어갔다. 한국군 병사를 가득 실은 트럭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찰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미군과도 조우했으나 미군은 그들을 한국군으로 착각했다. 7사단 점령구역을 벗어난 정찰대는 다음날 25일 하루 종일 산길을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25일 황혼 무렵이 되자 포성이 들렸다. 량싱추의 제38군이 예하의 3개 사단을 앞세워 남하하면서, 인민지원군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 2차 전역의 목표는 대동강을 남하하면서, 대동강 북쪽으로 북진했다 퇴각하는 한국군과 미군등 유엔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퇴로를 차단하려면 , 정상적인 길을 우회해 더 먼 길을 더 빨리 진격해야 하는 기습을 전개해야 한다. 제 2차 전역의 문을 연 이 기습작전들이 큰 성공을 거둔다. 항미원조전쟁 동안에 성공했던 인민지원군의 이 기습전등 성공스토리들은, 종전이후 항미원조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인민해방군의 사기를 높히기 위해 아주 많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1960년 중국인민들에게 상영돼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기습 ( 奇袭 )이, 바로 이 2차 전역 승리의 발판을 만들었던 기습전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2차전역은 인민지원군 제 38군이 청천강 이남의 북한 중부인 덕천( 德川 )의 점령과 함께 전개된 기습전으로 부터 시작된다. 38군 군장 량싱추(梁興初) 는 습기 찬 동굴 속에서 지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하도 봐서 지도상의 모든 북한 지명을 달달 욀 정도였다. 이 때 인민지원군 본부의 제 2 부사령관 한센추(韓先楚)가 동굴로 찾아와 상세 명령을 하달했다. 즉 38군과 42군이 협력해 덕천을 점령한 뒤, 이어 영원을 공격하라는…
11월 13일 펑더화이는 마오저동에게 10월 25일 첫 전투개시 이후의 상황에 관한 보고와 이후 작전을 상의한 이후, 처음으로 중국인민지원군 지휘관들을 상대로 당위원회 회의를 소집했다. 1차 전역을 평가하면서 앞으로 치를 2차 전역을 위해 구상한 전력배치를 명령하기 위해서였다.. 펑더화이는 1차 전역의 성과등을 설명한 후 갑자기 좌중을 둘러보며 물었다. " 38군 량싱추(梁興初)는 왔는가? " " 예 "라는 대답과 함께 38군 군장 량싱추가 벌떡 일어섰다. 펑더화이는 "내가 자네에게 희천 쪽으로 뚫고 들어가라고 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건가? 39군은 운산에서 잘 싸웠고 40군도 좋은 성과를 올렸는데, 자네의 38군은 왜 질질 끌다가 작전을 망쳐놓았나? 희천에는 적 1개 대대만 있었을 뿐이라고 하던데, 왜 그런 거였나? "라며 따져 물었다. "사실은… 그게…." 량싱추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평더화이는 주먹으로 책상을 꽝 내리쳤다. 펑더화이의 추궁은 계속됐다. "희천에 흑인(黑人)연대가 있었다고? 사람들이 너를 호랑이 장군(虎將)이라 부르던데, 무슨 놈의 호랑이 장군이냐, 너는 쥐새끼 장군(鼠將)이야 !." 이런 말도 내뱉었다. "나, 평더화이는 재주는…
오늘 12월 20일은 포루투칼의 식민지였던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지 21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오전 마카오특별행정구의 진리엔화 광장 ( 金莲花广场)에서는 반환기념식이 거행됐다. 지난해 12월 20일에는 시진핑 주석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반환 2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진행해, 홍콩에 보란듯이, 마카오의 1국 2체제의 안정과 발전을 과시하기도 했다. 마카오는 2000년 밀레니엄 열흘전인 1999년 12월 20일 , 홍콩 ( 1997년 7월 1일 반환)보다 약 2년 늦게 중국에 정식으로 반환됐다. 현재 상주인구는 약 70만명으로 추산되고, 면적인 서울 강남구보다 조금 작은 32만 평방킬로미터이다. 홍콩의 식민역사를 1892년 아편전쟁이후로 본다면, 마카오의 식민역사는 훨씬 오래돼 1500년대 중반(1542년 경)부터 중국내륙 무역을 위한 상인집단과 상단보호를 명분으로 한 약간의 군대가 거주를 시작했다. 식민지의 형태도 홍콩과 많이 달라, 당시 명나라 시절 광동성 주둔 명군은 포루투칼 군의 조총과 화포만 없었을 뿐 전력이 월등했기에, 당시 포루투칼측에서는 명나라 조정에 세금을 내면서 임대형식으로 땅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편전쟁 난징조약으로 홍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⑩ 개전 10일간 1차전역 전승으로 청천강까지 남하. "적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10월 25일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에 참전한지 11일 째 되는 11월 5일, 미군 정찰기 조종사가 이렇게 보고했다. 미군 정찰기는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인민지원군을 정찰하기위해 평안북도 운산군을 비롯한 일대를 정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강쪽으로 남하하며 대공세를 펼쳤던 중국군이 갑자기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었다. 이날부터 평안북도 서부전선에 총소리가 뜸해지면서 대규모 전투가 막을 내린 듯 보였다. 1950년 10월 25일의 참전개시일로부터 11월 5일까지의 중국인민지원군 공세를, 중국은 ’1차 전역’(戰役·대공세)이라 부르며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1차전역의 전투는 열 하루동안 치러졌다. 인민 지원군은 박격포 외에는 별다른 중화기를 갖추지 못했지만 기만하고 노련하게 전투를 벌였다. 반면 미군은 낮에만 전투를 벌였고 야간전과 백병전에는 익숙치 못했다. 특히 보병들은 포위되어 퇴로가 끊기면, 싸울 의지를 잃고 허둥대며 투항했다. 인민지원군은 이 약점을 파고들었다. 야간에 많은 공격을 퍼부어 편하게 미군과 한국군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게 했고, 날이…
오늘 12월 13일은, 1937년 중국 난징대학살이 일어난 지 83주년이 되는 날이다. 1931년에 만주전쟁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워 동북3성을 실효지배하고 있었던 일본은,, 중국대륙에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내전의 혼란을 틈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인근에서 루거우치아오사건으로 트집을 잡아,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침하면서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넉달 만인 11월 초에 국민당 수도였던 쟝쑤성 난징시까지 진격해, 난징시민들을 무차별 살륙하는 난징 대학살사건을 일으키며 12월 13일 국민당의 심장을 점령한다. 중국자료에 의하면, 일본군은 이 약 40여일 동안 난징에서 약 30만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77년만인 2014년 2월 27일, 중국 전국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 7차 회의는 매년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희생자를 위한 국가 추모일 ( 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 로 공식 선포한다. 그리고 10달 뒤, 국가 추모일로 지정된 첫 해인 2014년 12월 13일엔, 시진핑국가주석이 직접 참석해, 과거 역사의 치욕을 잊지 않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길을 개척할 것이라는 비장한 연설을 했고, 이 광경은 약 2시간동안 14억 인
유엔군 가운데 가장 앞장서 청천강을 넘어 북진하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포위공격에 대대병력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던 미 제1기병사단은,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이 독립전쟁 시절 직접 창설한 기병대가 전신인, 유서 깊은 부대였다. 한국전쟁 참전한 미군가운데 가장 강력한 기계화사단으로, 사단 휘하에 탱크가 149대, 대포가 300여문에 달했다. 미군 한 개 사단의 화력이, 처음으로 전투에서 맞붙은 중국 인민해방군 제39군 전체 군의 화력을 능가했다. 당시 사단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던 조지 패튼장군의 참모장 출신인 54세의 호버트 게이 소장이 맡고 있었다. 1950년 10월 말의 평안북도 운산전투는, 인민지원군 참전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인민지원군과 치룬 대규모 전투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기세등등하게 북진하던 유엔군의 계획은 급변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국면(戰局)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군은, 중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부인했다. 이러한 대응은, 나중에 38도선 이북 지역에서의 철수라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반면 미군 최정예 기계화사단인 제 1기병사단의 북진을…
궤멸된 미 제1기병사단 제3대대 . 북한 중부전선의 초산군을 넘어 압록강변까지 진출해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았던 한국군 6사단이 위기에 봉착한 그 순간, 북한 서부전선을 따라 그 왼쪽에서 신의주 방면으로 북진하던 한국군 1사단도 맹공격을 받고 전진을 멈춰야만 했다. 한국군 제 1사단은 신의주 진격을 목표로 안주에서 청천강을 도하해, 10월 25일 오전 운산군에 도착한다. 제1사단은 12연대와 15연대를 선봉부대로 해서 북진을 계속했다. 이날 오전 11시경 운산 북방 고지에서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서 진격이 정지됐다. 한국군 제 1사단은 운산 북부전투에서 포로 1명을 잡았는데, 북한군이 아닌 중국인민지원군이었다. 1사단은 이를 유엔군 사령부에 보고했으나 미군 수뇌부는 이런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틀 뒤 10월 27일, 1사단은 운산군 용포동 북쪽 능선을 타고 남면천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더 많은 인민지원군의 격렬한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1사단이 운산 북방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사이 미 8군 사령부는 상황을 오판했다. 한국군 1사단의 전진이 운산북방에서 인민지원군에 막혀 저지되자, 뒤따르던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은 중국…
북진하던 한국군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압록강변까지 북상했던 6사단 7연대는, 1950년 10월 29일 남하를 시작한 그날 하룻만에 중국인민지원군의 매복과 습격을 당해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약 7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 700명의 포로가운데는 7연대의 미군 군사고문 플레밍 소령도 끼어 있었다. 전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플레밍 고문은 15군데 총상을 입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3년 후인 1953년 가을, 포로 교환때 까지 생존해 있다가 플려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한국군 6사단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첫번째 공격대상이 된 사단이었다. 6사단은 공격을 당한지 3일만에 7연대는 물론이고 2연대와 19연대까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한국군 6사단의 뜻하지 않은 급작스런 와해는, 평안도 지역 전역, 즉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미8군의 오른쪽 전선이 심각하게 약화돼 붕괴되는 전조였다. 이후 6사단은 재정비되어 전선에 다시 투입돼, 휴전때 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한편 북진의 선봉인 한국군 6사단에 큰 타격을 줬던 인민지원군 353연대를 이끈 사람은 황더마오(黃德懋·1919~2013) 연대장이었다. 그는 산둥(山東)성 셔우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제 6편. 북진 한국군의 압록강 첫 도착부대인 제 6사단 7연대 초산부대의 비극. 인민지원군 353연대의 야습, 붕괴된 비운의 ’초산부대’ 미군등 유엔군의 참전이후 인천상륙작전등의 반격이후, 맹렬하게 북진을 시작한 한국군 가운데 특히 6사단은 북진 선봉의 상징이었다. 그 한국군 6사단가운데 7연대는 또 6사단 병력가운데서 정예부대로 북쪽으로 빠른 속도로 진격해 10월 26일 국경도시인 초산(楚山)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병력중 7연대 제 1대대는 쉬지않고 북쪽으로 2시간을 계속 달려 오후 2시 15분경, 마침내 압록강변에 발을 내딛었다. 장병들은 감격에 겨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압록강 물은 수통에 담겨져 서울 경무대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그래서 이 부대는 ’초산부대’로 불렸다. 하지만 짧은 기쁨이었다. 26일 압록강까지 진출한 기쁨도 잠시, 한국군 6사단 7연대는 사단본부로부터 급보를 받았다. 즉시 철수하라는 김종오 6사단장의 명령이었다. 온정리 쪽에서 6사단 2연대가 중공군 매복으로 타격을 입고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항미원조전쟁 4회에서 기술한 대로, 앞서 북진해 압록강변에 도착한 7연대의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제 5편. 첫 전투승리주역 덩웨, 12살에 입대한 소년홍군 출신 최초의 교전을 승리로 이끈 118사단장 덩웨는 홍소귀(紅小鬼) 출신이다. 후베이(湖北省)성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12세때 홍군에 참가했다. 사병으로 출발해 16세때 중대장이 됐다. 1918년생인 덩웨는 1930년 12살의 나이때 부터, 1931년에 마오쩌동이 지앙시성 뤠진에 수립한 중화소비에트 임시공화국의 설립 전후의 각종 전투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한 차례 전투의 패배로 문책당해 군법에 회부되어 총살 직전까지 갔었다. 마침 형장을 지나던 홍군 고위간부 잔차이팡(詹才芳)의 눈에 띄어 살아났다. 잔차이팡이 그의 상황을 파악한 후 문제가 있다고 판단, 그를 구출해준 것이었다. 이후 그는 잔차이팡의 경호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그는, 홍군이 장제스의 국민당군의 총공세를 피해 서북쪽으로 피신을 시작했던 했던 1934년 16살의 나이에 경호대를 이끄는 중대장이 되었다. 대장정 도중에는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의 병세가 심해지자 부대는 은화 열 닢을 마련해 근처 농가에서 요양하도록 결정했다. 고집이 센 그는 거부했다. 이를 악물고 행군을 계속하다가…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제 4화. 1950년 10월 25일 인민지원군 40군 118사단 평북 온정리 첫 전투에서 승리 10월 25일 원위청 (溫玉成)이 이끄는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의 공격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 시작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40군 예하 118사단이 그 서막을 열었고, 지휘관 덩웨가 승리로 이끌었다. 당시 32세의 덩웨(鄧岳)는 118사단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평안북도 희천(熙川) 북쪽 지역인 대유동(大楡洞)에 도착했다. 행군을 하면서 그의 부대는 참혹한 광경들을 목격했다. 한국군에 총살되어 들판이나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조선 노동당원, 민청맹원, 여맹원그리고 일반 촌민들의 사체들을 보았다. 미군 폭격으로 집이란 집은 모두 부셔져 있었고, 폐허가 된 곳곳에서 고아가 된 어린아이들이 울고 있었다. 대유동은 후에 지원군 총사령부 소재지가 된다. 그 곳에서 덩웨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를 만났다. 펑더화이는 덩웨에게 평북 운산군 온정(溫井)으로 이동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후 포위망을 형성하라고 명령했다. 펑더화이는 명령을 하달하면서 "이것은 인민지원군의 첫번째 전투"라며, 필승을 요구했다. 덩웨의 118사단은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③ 1진 제 40군지휘관 별명 호랑이장군(虎将) 이날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서막을 연 제40군은 원위청(溫玉成)이 지휘했다. 1915년 장시(江西)성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살 때인 1929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다음해인 1930년 홍군에 입대했다. 국민당군이 장시성 루이진(瑞金)에 수도를 둔 중화소비에트 임시정부에 대한 1~5차 소탕작전을 펼치며 공격해 들어올 때도 이에 대항해 싸웠고, 2만 5000리 대장정에도 참여했다. 이후 장제스가 서안사변으로 감금당한 이후 다시 전개된 제 2차 국공합작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합작으로 일본침략군을 먼저 물리치자는 합의) 때의 항일전쟁때도 항상 선봉에 섰다고 한다. 이후 1945년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후, 다시 장제스의 국민당군과 4년에 걸쳐 진행된 국공내전 때는 동북지역(만주)에서 사단장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원위청은 제 1진으로 선발된 중국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제일 먼저 참전한 이후, 3년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귀국하지 않고, 계속 전선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미원조 10대 호장(虎將)’으로 불린다. 휴전이 성립되어 중국으로 돌아간 그는 중국남부 광저우(廣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 70주년...다시 보는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비사. 2회=베일 벗은 중국인민지원군...운명의 10월 25일 10월 25일 이른 아침,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는 평북 대유동 폐광 골짜기에 설치한 사령부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공격개시 명령을 내렸다. 유령같았던 중공군이 마침내 그 베일을 벗은 것이었다. 펑더화이는 "전쟁에선 첫번째 전투가 가장 중요하다. 첫번째 전투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이날 오전 11시께 평북 운산군 쪽으로 북상하며 진격 중이던 한국군 1사단이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부대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아 전진을 저지당했다. 정체불명의 부대는 중국인민지원군 제40군 120사단 360연대 병력이었다. 때마침 운산 주변 10여 곳에서 동시다발로 산불이 발생했다. 피어오르는 연기로 미군의 항공정찰과 지원폭격이 어려워졌다. 사실, 이 산불은 인민지원군이 고의로 지른 것이었다. 자연의 힘을 빌린 대공(對空) 연막을 쳐 미 공군의 제공권을 무력화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적군 1명을 생포해 심문했는데 한국 말을 할 줄 몰랐다. 중국어가 가능한 한국군 대위가 중국어로 말을 건네자 포로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 70주년...다시 보는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비사. 1회=압록강 도하와 은밀한 매복 북·중 접경인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의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돕는다) 기념관’의 신관이 지난 9월 19일 재개관했다. 이 기념관은 지난 2014년 말 확장공사를 하면서 6년 남짓 문을 닫았었다. 재개관 첫날, 코로나19로 관람객 수를 제한했으나 관람하려는 중국인들로 길게 줄이 이어졌다고 한다. 항미원조 기념관은 기념탑, 전시관, 파노라마 화랑, 국방교육공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부지 면적은 18만㎡로, 이전보다 4배 정도 커졌다. 2만3800㎡ 규모의 전시관에는 ’항미원조’를 기본 테마로 한국전쟁 관련사진 1000여 점과 무기 등 물품 1600여 점, 그림, 조각 등이 전시돼 있다. 기념탑은 높이 53m로, 전면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쓴 탑명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중국군의 전공이 기록되어 있다. 기념탑 앞 계단은 폭이 10.25m로 10월 25일 참전일을 의미한다. 야외광장에 놓인 탱크와 전투기의 수도 이전보다 많이 늘어났다. 오는 10월 25일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일이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첫
한류의 세계적 전도사인 방탄소년단(BTS) 이, 한국전쟁 혹은 항미원조전쟁에 관해 소감을 얘기한 내용을 놓고 한중간 설전이 뜨거워지는 형국이다. 중국이 사용하는 항미원조전쟁 ( 抗美援朝战争)이란 이름은, '중국을 침략하려는 미국에 대항해 조선( 당시 북한)을 돕기위해 참전한 전쟁' 이라는 뜻이다. 중국이 '1950년 10월 25일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한 전쟁'으로, 한국전쟁을 자국의 입장에서 의미를 부여해 지은 이름이다. 올해 2020년은, 연초부터 미국의 현 대통령 트럼프가, 자신의 재선을 위해 대 중국 무역전쟁의 압박을 강화하던 중, 자국내 코로나19 방역실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이를 계기로 중국에 탓을 돌리며 중국음모론을 제기해 공격했고, 또 홍콩문제를 빌미로 중국의 글로벌기업들을 압박했던 한 해 였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중국대로, 올해 2020년은 건당 백주년의 소강사회 목표를 달성한 이후, 이 기세를 몰아 세계국가로의 도약을 위해 국내의 역량을 모아 일로매진을 시작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올해 중국은, 자신들을 재선을 위한 대선에 활용하려는 트럼프로 부터 각 가지 압박을 받으며 쉽지 않은 2020년을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여러 이유
중국이 1950년 10월 19일부터 참전했던 한국전쟁, 중국에서 불리는 이름으로는 항미원조전쟁에 참전했다 희생된 중국군 지원군의 숫자는, 중국이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공식적으로 19만 7653명이다. 이들은 모두 션양항미원조열사능원 ( 沈阳抗美援朝烈士陵园/ '미국에 항거하면서 조선을 도운 전쟁에서 숨진열사들을 안장한 곳' 이라는 뜻) 에서 기념되고 있다. 션양 (沈阳) 시는 동북3성 중 남쪽에 위치한 랴오닝성의 성도로 2018년 현재 상주인구가 820만명이 되는 대도시로 한국인들도 적지 않게 거주하는 곳이다. 오늘 인천공항을 떠나 중국 군용기편으로 송환된 중국군 지원자 유해 117구도 션양항미원조열사능원에 안장돼 기념된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참전을 시작한 다음해인 1951년부터 전쟁중 희생된 인민해방군들을 이곳에 묻거나 비석을 세워 희생자를 기려오다, 1999년에 10월 15일 오늘날의 모습으로 , 항미원조열사능원을 조성했다. 이 기념능원 안에는 2천평방미터에 달하는 기념관이 있으며 전쟁관련 무기와 사진 그리고 당시를 그림으로 기념하는 회화등 449 점이 전시돼 있다. 중국은 항미원조열사로 추존하고 있는 약 19만여명 중, 전쟁발발이전의 38도선 그리고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