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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7> 류샤오치 몰락의 서막

1966년 7월 31일 베이징 날씨는 섭씨 25℃, 기온은 따뜻했지만 구름이 많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늘의 구름도 구름이지만, 중난하이에는 문화대혁명의 짙은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다.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11차 전체회의(이하 11중전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창(戈)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은 이른바 무산계급의 독재를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마오쩌둥이 발동을 건 문화대혁명의 이름으로 공격이 시작되면서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점차 문화대혁명 시대 방패(干)의 역할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바로 중국 공산당 당사가 규정한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다.

 

1966년 8월 1일로 베이징에서 열린 11중전회는 처음부터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마오쩌둥은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중앙이 대학 혁명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어느 것 하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작조 90% 이상이 나쁜 짓만 한다. 군중을 억제하고 제어하려고만 한다."

 

이어 마오쩌둥은 회의 첫날 바로 칭화(清华)대학 부속 중학 홍위병들에게 편지를 쓴다. 이 어린 학생들은 당 중앙이 파견한 공작조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마오는 편지에서 "어린 학생들의 혁명 정신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고 밝혔다. 이제 전국 각지에서 그나마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했던 유관부서의 공작조 파견 노력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마오쩌둥은 8월 3, 4일 회의에서 당의 공작조 파견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좋게 말해서 방향성의 오류라 하지, 실제 상황을 말하면, 자산계급의 입장에서 무산계급 혁명을 억제한 것이 바로 공작조 활동이다. 바로 이 자리에 앉은 이들 가운데도 (무산계급 혁명에 반대하는) 괴물 종자들이 있다." 

 

마오쩌둥의 주장에 따라 회의가 연장됐다. 그리고 8월 5일 운명이 날이 왔다.
마오쩌둥은 이날 문화대혁명 총동원령인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글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刘少奇)를 핵심으로 하는 현 지도부를 '류샤오치를 수뇌로 한 자산계급 사령부'라고 칭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목 그대로 폭파시키라고 명한다. 글 하나하나가 가시처럼 류샤오치 지도부를 비난하는 것이었다.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덩샤오핑(邓小平) 등은 그제야 마오쩌둥이 지난 '5·16 통지'에서 지칭한 우파 수정주의, 자산계급 대표 인물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늦고만 상황이었다.

 

이미 마오쩌둥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장칭(江青) 등 문화대혁명의 사인방들은 매일 치밀하게 모든 공격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주석이여, 명령만 내리소서"하는 상황에서 마오쩌둥이 마침내 "사령부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사인방의 대공세가 시작된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나이는 이미 68세. 중국 공산당의 산증인이었지만 평생 겪어보지 못한 풍파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본인의 안위도 안위였지만, 수십 년 고락을 함께 하며 신중국 건국을 이뤄냈던 오랜 동지들을 보호하는 일을 저우언라이가 맡게 됐다.


그 첫 대상은 손중산(쑨원)의 부인 쑹칭링(宋庆龄)이었다. 1966년 11월 12일은 중산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쑹칭링은 이를 기념해 인민일보를 통해 '손중산' 선집을 발간한다. 장칭은 이 선집을 트집잡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다. 바로 저우언라이가 책의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우언라이는 홍위병의 당 간부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8월 30일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당 간부 명단을 밝힌다. 이 명단의 가장 첫 번째가 바로 쑹칭링이었다. 중국 공산당 자료는 저우언라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당 간부와 사적을 보호하려 노력했다고 평하고 있다. 천이(陈毅), 허룽(贺龙) 등의 간부들도 저우언라이가 최선을 다해 보호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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