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당시 이런 공장을 짓는 4000만~5000만 달러 정도가 든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금액이었다.이병철은 아무리 고민해도 이돈을 마련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병철은 마음도 정리할 겸해서 1959년 늦가을 일본을 찾는다. 사실 이 때부터 이병철은 매년 겨울을 일본에서 지내는 습관이 생긴다. 소위 이병철의 ‘도쿄구상’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다양한 분야에 경제 전문가들을 만나고, 국제사회 주요 정보도 얻으면서 사업을 구상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 처음이 바로 1599년 늦가을의 일본 방문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미국을 들러 일본 도쿄에 들려 새해를 맞는다. 1960년 두 번째 일본행에서 이병철은 비료공장 자금의 해법을 찾는다. 호텔에서 본 경제대담 프로가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60년 1월1일 새해를 도쿄 제국호텔에서 보내고 있을 때였다. TV에서 경제, 사회, 군사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대화를 나눴다. 군사문제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될 것인가의 여부에 화제가 모아졌고, 경제 문제에서는 미소간의 경쟁, 과연 소련의 경제가 미국 경제를 능가할 수 있나 없나는 것이 토론의 중심이었다.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한국비료, 한국 산업에도 그렇지만, 이병철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사업이다. 얼마나 이병철에게 의미가 있는지, 한국비료 이야기를 하면서 이병철의 첫마디를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비료공장을 한국비료라는 이름으로 울산에 완성시키는 데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한국비료에 대한 이병철의 술회다. 10년의 고난, 바로 한국 현대사의 급변과 맞물린 것이다. 계속 이병철의 이야기다.“1.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 장면(張勉) 정권하에서의 정치, 사회의 혼란은 5.16 군사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나라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부정축재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세금 추징이라는 명목의 재산몰수도 경험했다. 실의와 재가에서의 갈등, 이 10년은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이야기는 이병철의 이 10년간의 이야기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 사회는 급속히 안정을 찾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미국 원조에 의존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조가 영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은 수입대체 상품으로 제당과 모직 사업을 벌여, 값비싼 외제 상품을
‘돈병철’(錢鬼), 고 이병철 삼성명예회장에게 붙었던 별명이다. 한국에서 돈을 가장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돈만 안다는 폄하의 뜻도 있다. 돈이 많다? 사실이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으로 이병철은 스스로 고백했듯 한국에서 젖먹이 어린이만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이름이 됐다. 당시 한국 세금의 4%를 이병철과 그의 회사가 냈다. 당시 한국이 아무리 못살아도 한 나라의 경제 세수의 4%를 한 사람과 한 기업이 책임진다는 게 결코 적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뿐이 아니었다. 돈 병철이란 별명을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이병철은 한국 모든 시중은행의 대주주였던 적이 있었다. 은행이란 곳이 어떤 곳인가? 돈을 맡기고 관리하는 기구다. 이런 기구의 전부가 삼성 이병철 회장의 소유였던 적이 있다니? 무슨 사연일까? 1956년 직후의 일이다. 당시 한국전쟁도 마무리돼 한국 경제가 안정을 찾기 시작할 때였다. 앞에서도 여러차례 설명했지만, 일본이 패망을 해 한국이 독립한 뒤 이어 한국전쟁까지 한국 경제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하루에 자고나면 물건 값이 배로 뛸 정도였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해지면서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했다. 그런 현
한국인에 의한 가장 한국적인 ‘정원공장’, 제일모직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제일모직 공장 건축은 시작됐다. 이병철의 결심은 확고했다. ‘우리 손으로 하자. 비록 수입제 기계를 쓴다고 해도 다른 모든 것은 우리 손으로 하자.’ 자연스럽게 이병철의 철학이 공장에 녹아들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현장을 방문해 공장 하나하나 ‘왜 그렇게 지어야 하는지’를 직접 설명해야 했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기술자를 비롯한 건설 요원들에게 우리가 왜 모직 공장을 지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공장이 혹시라도 잘못된 데가 있을 경우에는 우리나라 기술자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고 독려를 했다. 각 부문의 기술 책임자에게는 기술 문제는 전폭적으로 일임한다고 당부하면서, 모직공장에 거의 나의 꿈과 이상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모직공장이긴 하지만 결코 국제 수준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그랬다. 제일모직 공장은 경영자 이병철의 이상과 꿈이 담긴 곳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여성 기숙사였다. 공장이 가동되면 1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일을 해야 했다. 역시 이병철의 고백이다. “
“쉬운 일은 없다. 다 어렵다. 다만 그래서 모든 일이 보람이 있다.” 이병철의 성공담이 주는 교훈이다. 참 누가 봐도 대단한 성공이 바로 이병철의 삼성이다. 이 글을 쓰는 2018년 9월 삼성은 이미 한국을 넘어섰다. 한국의 기업이 아니라 세계의 기업, 세계인이 함께 관심을 쏟는 그런 기업이 됐다. 이렇게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경탄하는 이병철의 성공이다. 하지만 그 성공의 길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박수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잘 안다. 이병철이 사업을 구상해 대부분의 경우 처음부터 반대에 부딪쳤다. 양조장 사업이 그랬고, 전후 세운 삼성물산이 그랬다. 제일제당은 삼성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조차 실행에 반대를 했다. 제일모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제당 성공에 취해 너무 무모해졌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고 막상 시작하려니, 정부 차원에서 간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병철이 당초 추진하려던 일본 모직 제조기를 놔두고 독일제를 쓰라고 압박을 해대기 시작했다. ‘참 그럴거면 처음부터 반대를 하지 말던지...’ 그래도 이병철은 한번 결심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성공의 결실을 만들어 냈다.
제일제당의 탄생 대구의 조선양조장이 마련한 3억 원은 이병철에게는 기사회생의 활로였다. 이병철은 1951년 1월 10일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세운다. 서울의 과거 삼성물산 이름을 따왔지만, 이름만 같을 뿐 속내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였다. 이병철의 증언이다. 삼성물산의 재산은 이미 오유烏有로 돌아갔으므로, 부산에서의 삼성 재건은 그야말로 무에서 다시 출범한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과거 공신들이 적지 않이 합류했다. 본래 서울에서 신생사를 1년만에 당대 1,2위 무역상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었던 맹장들이었다. 부산의 삼성물산은 날개를 단 듯 성장했다. 설립 1년후에는 결산에서 3억 원의 출자금이 그 20배인 60억 원으로 불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도 이병철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쟁의 황량한 조국을 보면서 현지에 거의 모든 생필품을 수입해 조달해 돈을 버는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곱게보지만 않았던 것이다."무역업이 당시 한국의 국가적 급선무였던 것은 오늘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당시는 극도의 물자부족 시대였던 만큼, 수입이야말로 시급하고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 이병철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우리 국민이 필요한
"인적 자원 외에는 자원다운 자원을 갖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그 것을 다양한 상품으로 가공하여 수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는 제조업이다. “사장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3억 원 가량 비축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피난차 갔던 고향에서 이병철이 들은 말이다. 3억 원. 지금도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당시 한국 상황에서 정말 일반인은 꿈도 꾸기 힘든 액수다. 한국에 80년까지 백만장자라는 말은 있어도 억만장자라는 말은 있지도 않았다. 이병철은 이에 이렇게 적었다. “전락으로 인심이 자못 황폐해진 때가 아니던가. 이렇게 정직하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감동되어 가슴이 메었다. 익자삼우益者三友요, 손자삼우損者三友라 했다. 정직한 자를 벗으로 하고, 미더운 자를 벗으로 하고 견문 많은 자를 벗으로 함은 익이요. 아첨하는 자를 벗으로 하고 성실치 못한 자를 벗으로 하고 말만 앞세우고 실이 없는 자를 벗으로 함은 손이라고 했다. 또는 순경順境은 벗을 만들고 역경逆境은 벗을 시험한다는 말도 있다. 선인들의 가르침을 새삼 되씹
다시 무에서 시작 제일제당 공장 착공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호암 (1953) ⓒ삼성그룹 '한국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는 무로 돌아가 버렸다. 인천과 용산의 보세 창고에 보관돼 있던 손질 상품도 깨끗이 없어졌다. 용산 창고의 것은 공산군이 약취해 갔고, 인천 창고의 것은 공산군이 미처 약취하기 전에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 혼란의 틈을 타서 한국의 어느 유력자가 가로채 착복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전쟁은 이렇게 세상을 도적의 것으로 만들었다. 적도 아군도 전쟁의 극한에서는 모두 도적이 됐다. 초반 전세는 절대적으로 남한에 불리했다.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6월 25일 침략을 시작해 8월에는 이미 대전 남쪽까지 밀고 내려갔을 정도다. 그러다 9월 15일 인천상륙이 성공하고,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된다. 서울 수복과 함께 확인된 것은 삼성물산공사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특히 인천 창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삼성 간부들이 나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서울이 다시 북의 손에 넘어가면서 재판은 한번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년 남짓한 짧은 동안에 기존 대회사와 비견할 만
고난 속에 깨달은 나라와 경제의 중요성 한국 전쟁은 이병철에 무슨 의미였을까? 당연히 첫 감성은 혼란과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적군의 탱크가 시내에 진입을 하고 총칼을 든 병사들이 이전 정권하에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을 잡으러 다닌다. 이병철은 당대 서울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히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전부였을까? 그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 따르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우선 정부에 대한 실망, 사업을 하며 돈을 벌어온 그동안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공산체제에 대한 분노, 나라 수호에 대해 절실함 등등이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 속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우선 불안과 두려움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기 전날 밤의 표정이 이렇게 기록이 돼 있다.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로 서울에 이주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무역업을 겨우 궤도에 올려놓은 무렵이었다. 기업 경영을 다소 알게 되고, 개인적인 축재에서 벗어나 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의 참 뜻과 기쁨을 되새기고 다짐하면서, 포부에 부풀어 있던 바로 그 때 동란의 발발은 충격적이었다. ‘사업은 어떻게 되나, 그 보다
삼성, 크고 많고 강하고, 영원히 빛나라 이병철은 그렇게 새로 시작을 한다. 대구 수성시장 인근의 250평 남짓한 사무실을 빌려 삼성상회를 설립한다. 작지만 그래도 소위 무역회사였다. 건어물 같은 식품 등 생필품을 주로 교역하는 회사였다. 2개월간의 대륙 여행을 통해 선택한 것이었다. 이병철은 무역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조사 여행 결과 청과물과 건어물과 잡화 등의 무역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상생활에 불가결한 것이므로 소비도 늘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의 무역을 담당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당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시작하면서 생필품이 품귀현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병철은 사업 성공의 기본으로 3가지를 꼽았다. 정확히 시대의 변화를 읽을 것, 풍부한 자본을 가질 것, 좋은 인재를 확보할 것 등이다. 이병철의 사업 판단 기준은 단순하지만 정확했다. 본래 사업이란 단순하면서도 비전이 명쾌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바로 오늘날 삼성 성공의 최대 비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병철은 사업 목표로 역시 세 가지를 꼽았다. 크고, 강하고 많아야 한다. 이병철의 그의 자서전에서 삼성의 ‘삼’은 이 세 가지를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