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도로 제자리! 한참을 노력해 나갔다고 생각했으나 돌아보니 제자리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주저 앉는다. 다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힘 쓰면 뭐하나?’ 하는 게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특히 이병철의 실패는 당대 조선 최고의 부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만큼 충격이 남달랐다는 의미다. 쌀 도정사업과 함께 운송사업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은행 자금을 이용해 29살의 젊은 나이에 200만 석 대지주가 됐던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이 밤마다 요정에서 술과 연회로 시간을 보내도 전문 관리인들이 알아서 이병철의 은행계좌에 쓴 돈보다 몇 배 많은 돈을 채워 넣었다. 그런 재산이 ‘일장춘몽’이라더니, 하루 아침에 모두 날아간 것이다. 이런 실패를 경험한 보통 사람이라면 그 좌절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달랐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마찰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미국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하고, 중국은 중국도 존중받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한다. 과연 둘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주제를 놓고 미국을 가장 잘 아는 중국인으로 꼽히는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와 중국은 가장 잘 아는 미국인으로 꼽히는 윌리엄 코헨 전 미 국무부 장관이 대화를 했다. 미중 수교 40주년을 맞아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과 국제문제 연구소 주최 세미나에서다. 14일 자유아시아 방송은 세미나에서 추이톈카이와 코헨의 대화를 잘 정리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추이톈카이와 코헨은 미중 간 협력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공감하면서 양국 간에 신뢰 부족의 책임을 서로 떠미는 모습을 보였다. 코헨은 과거 40년 동안 유지된 미국 중심의 세계가 그대로 유지되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추이톈카이는 중국은 중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발전하고, 그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추이톈카이나 코헨은 모두 미중의 공통 이익이 양국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시켰다는 의견을 같이 했다. 추이톈카이 "이러한 공통 이익은 계속 늘었다"라며 "특히 무역 관계와 세계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에서 그렇다."라고
1936년 이병철은 드디어 마산 북쪽 북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연다. 마산은 한국 경상남도에 위치한 도시다. 지금은 창원시에 통합됐다. 협동정미소가 문을 연 그 시점, 이병철 그의 나이 갓 26세 때다. 두 명의 주주를 확보해 3만원으로 시작했지만, 마산 제일의 정비소를 만들기에는 자금이 부족했다. 이병철은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의 지원을 받기로 한다. 지금 한국의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殖産)은행 마산지점 히라타(平田) 지점장과 면담을 했다. 본래 이병철은 담보도 충분하고 사업계획도 탄탄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문제 없이 대출을 받았지만, 그 절차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지점장은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곡물가격 변동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 곡물시장 동향을 어떻게 보는가? 비록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일개 정미업자로서는 알 필요도 없는 질문이 집요하게 계속됐다. 테스트 받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으나 꾹 참고 성실하게 답했다. … 지점장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조사해서 조건만 닿으면 융자해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드디어협동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리 호락
노비 해방의 훈훈한 기억 ‘사업을 하자.’ 이병철의 결심은 이렇게 오랜 방황 끝에 온 것이다. 이병철은 사업에 대단한 성공을 해 오늘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훗날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돌이켜보면 “그 성공이 바로 오랜 방황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방황은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전진을 위한 동력이 된다는 의미다. 참 범인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논리다. 사업을 하기로 한 순간 이병철은 이미 남다른 생각, 남다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병철을 이렇게 남다르게 만들었을까? 앞서 이병철의 남다른 면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병철은 절대 자질이 남다른 이가 아니었다. 이병철의 표현을 빌면, “너무 일반적이었다”고 스스로의 자질을 평했다. 그럼 무엇이 이병철을 비범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병철은 하고 싶은 것을 찾아하고, 하면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서울유학, 초등학교 중퇴와 중학교 속성과정 이수, 역시 중퇴하고 선택한 일본 유학 길을 택한다.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이병철은 뭐든 중도이폐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병철을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중도 하차가 아니
“졸업장 하나 없다.” 이병철이 스스로 자서전에서 고백한 내용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을 포기하면서 이병철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니기만 했지 졸업하지 못해 졸업장 하나 없었다. 오랜 감기로 몸이 허약해졌다는 게 대학 중퇴의 이유였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정말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잠시 일본 곳곳을 유람하며 방황한다. 그러다 이병철은 돌연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가방을 싸들고 한국행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너도 생각이 있겠지. 요양이나 잘 해라.” 이병철의 부친은 그렇게 아들의 귀향을 반긴다. 혼날 줄 알았던 이병철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고향산천의 공기와 물은 역시 좋았다. 일본에서 그렇게 이병철을 괴롭히던 감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편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이병철의 뜻하지 않았던 방황이 시작된다. 일본 생활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물론 처음엔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는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산업화에 가장 성공했다. 산업 분야는 무엇이든 한국보다 수십년 앞선 상태였다. 철도나 기계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
스스로 인생을 가꾸는 장인 정신…오늘 삼성의 진정한 비밀 배안에서의 불쾌한 기억을 안고 도착한 일본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사실 아무리 식민지지만, 돈 많은 유학생이 박대 받을 이유는 없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소위 세계 IT업계의 두 거봉이다. 우리의 주인공 ‘이병철’의 이야기 자료를 읽다 보면 이들과 묘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연배는 이병철이 훨씬 앞선다. 무엇일까? 우선 빌과 스티브만 보면, 대학을 중퇴하고 싶었던 IT업계에 투신해 일가를 이뤘다. 이병철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실 당대 웬만한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도쿄 유학을 했다. 그것도 아주 넉넉하고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빌과 스티브처럼 졸업하지 않았다. 공통점이다. 하지만 더 정확한 공통점은 그게 아니다. 오직 앞서 언급한 것은 단순한 현상일 뿐이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이유, 그게 바로 정확한 이병철, 빌과 스티브의 공통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공통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정확한 공통점, 그것은 바로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배웠고, 스스로 충분히 배웠다고 판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하느냐, 모든 일이 그러하듯 시작이 반인 법이다. 이병철은 사업을 하기로 결심했지만, 그렇다고 이병철이 뚜렷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준비가 실패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을 이병철은 잘 알고 있었다. 이병철은 우선 두 가지로 사업을 준비했다 하나는 준비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 대상을 선정하는 것이다. 사실 삼성은 처음부터 돈 되는 일만 한다는 평을 듣는다. 삼성의 이 같은 평판의 뿌리는 이미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병철은 사업 투신의 결심에 대해 부친과 상의를 한다. “아버님, 제가 사업을 하고 싶습니다.” 말을 들은 이병철의 부친은 담담히 말한다. “그래? 안 그래도 네가 300석쯤 재산을 나눠 주려고 했다. 네가 뜻한 게 있으면 그것으로 해봐라.” 참 쿨한 부친이다. 이병철의 생애와 관련한 자료를 보다 보면, 오늘날 이병철의 절반은 그의 부친이 만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이병철의 이야기다. 돈도 마련이 됐겠다, 이제 사업 아이템만 확정하면 됐다. 이때 이병철은 어떻게 사업 아이템을 선정했을까? 그의 자서전에 나타나는 독
“졸업장하나없다.”이병철이스스로자서전에서고백한내용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을 포기하면서 이병철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니기만 했지 졸업하지 못해 졸업장 하나 없었다. 오랜 감기로 몸이 허약해졌다는 게 대학 중퇴의 이유였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정말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잠시 일본 곳곳을 유람하며 방황한다. 그러다 이병철은 돌연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가방을 싸들고 한국행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너도생각이있겠지. 요양이나 잘 해라.” 이병철의 부친은 그렇게 아들의 귀향을 반긴다. 혼날 줄 알았던 이병철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고향산천의공기와물은역시좋았다. 일본에서 그렇게 이병철을 괴롭히던 감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편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이병철의 뜻하지 않았던 방황이 시작된다. 일본생활에서돌아온이병철은물론처음엔다양한시도를해본다.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는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산업화에 가장 성공했다. 산업 분야는 무엇이든 한국보다 수십년 앞선 상태였다. 철도나 기계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농업생산효과자체
“하고싶은데는다이유가있다. 훗날의결과가그이유를알게해준다” 흔히골이깊으면산이높다한다. 고난이 쓰면, 열매는 더욱 달다 한다. 하지만 방황이 길어 결심이 옳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긴 방황의 경험들이 훗날 유익한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일반인의정서이고생각이다. 누구도 방황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삼성그룹을 세운 이병철은 달랐다. 일본에서돌아온이병철은돼지도키워보고, 고급 야채도 재배해본다. 하지만 농사일이라고 해보지 않은 이병철이 지시만 해서 하는 농사가 성공할리 없었다. 자연히 일들이 흐지부지되고 이병철은 당대 돈 많은 한량들이 그러했듯 노름에 빠진다. 그렇게낮에나가밤늦도록골패를하다달밤에그림자와돌아오는일상을보내던날, 이병철은 홀연 달빛에 이끌려 잠든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돌연히 깨닫는다. “아, 내가 이래서는 안된다. 집안 일, 농사 일이 아니어도 뭐든 해야 한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병철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사업이었다. 당시만해도한국에서요즘같은사업은없었다. 아니 없었던 것이 막 생기던 시점이었다. 무슨 말인가? 조선 왕조시대와 일제 치하의 식민 조선은 두 가지 측면에
“한국은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 전통문화를 알리고 싶었지만,어쩔 수 없이 알린 것은 중국 문화다!” 12일 세계화인주간의 문화 논평의 제목입니다.논평은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한국 전통문화라는 것이 결국 중국 문화였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부 중국 네티즌들은 한국이 또 중국 문화를 훔쳐 자신들 것이라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먼저 사진을 보시죠. 바로 고대 상나라 자료들입니다. 한국이 알린 고대 문화라는 게 고대 상나라 문화라는 것이죠. 그리고 한국 관복이라는 것도 결국 명나라 시대의 관복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보다 보니 좀 그렇더군요. 의문이 마구 쏟아집니다. 중국의 주류는 상나라가 아니라 주나라 아니었나요? 또 조선의 관복이 당시 가장 강성했던 명나라 관복을 닮은 게 왜 이상하죠?지금 중국 지도자들이 양복을 입는다고 중국이 미국이 됐다고 하나요?그런데 관련 기사의 댓글을 보니 다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대반전!어쨌든 이런 많은 의문이 들게 하는 글에 중국인들이 먼저 반발을 합니다.댓글들이 대부분 지나친 편견이 문제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음 기사 역시 둬웨이에서 올린 것입니다."한국이 중국 문화를 훔쳤다고?"기사에서 이렇게 반문합니다. 아시아 문화의 근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