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베이징의 공기가 많이 좋아졌다는 소식이 종종 보입니다. 어제였던 5월 2일 베이징에 비가 조금 내렸었는데 비온 뒤 공기가 좋아 야경과 어우러져 맑은 풍경을 자아냈습니다. 둬웨이에서 베이징올림픽공원의 야경을담았습니다. 글=김상태 http://news.dwnews.com/china/photo/2018-05-02/60055560.html#p=3 출처 : 둬웨이多维 출처 : 둬웨이多维 출처 : 둬웨이 多维
백성 민은 노동계층이었다. 다스림의 대상이었지, 다스림의 주체가 아니었다. © Couleur, 출처 Pixabay 우리 동양의 민주주의는 애초부터 철인정치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철인은 스스로 나기도 하지만, 백성이 믿고 따를 때 만들어진다. 그런 믿음을 쌓아가는 게 우리 동양에서 '덕치'요, '선정'이었다. 이런 점에서 동양의 민주는 서양의 ‘democracy’와 차이가 있다. democracy를 ‘민주주의(民主主義)’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두 단어 어근의 의미는 사뭇 다르다. 영어의 ‘democracy’는 민중을 뜻하는 ‘demos’와 지배를 뜻하는 ‘kratos’가 결합된 단어다. 즉 대중, 다수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현대적 의미를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폈듯 동양의 ‘민주’는 그렇지 않다. 옛 중국에서 ‘민주’는 ‘민의 주인’, 즉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양의 역사에서 백성 민은 스스로 군주를 저버리는 게 유일한 대안이었다. 산속에서 숨어 살거나, 산 속에서 뭉쳐 도적이 될 뿐이었다. 앞서 보았듯 백성 민은 노동자를 의미했다. 노동하지 않는 민은 더이상 민이 아니었다. 화적, 중국에서는 流氓liúmáng이라 불렸다. 결국 동양
시력을 잃은 노예, 백성 민은 노동이 무기였다. 점차 민은 직업을 가진 노동력을 의미하게 됐고, 귀족들은 민의 주인 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자각하게 됐다. 그렇게 민은 조금씩 역사의 굴곡을 기어 나왔다. © CoolPubilcDomains, 출처OGQ 학자들은 ‘민’이 백성이란 의미를 갖게 된 것을 주(周) 나라 때로 보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그 의미가 확고해졌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주나라 이전의 풍속을 노래한 시경 소아(小雅)의 ‘어떤 풀이 시들지 않느냐(何草不黃)’라는 시에 "부역 간 장부들만 불쌍하네, 그들만 홀로 백성(民)이 아니란 말인가 (哀我征夫, 獨爲匪民:애아정부, 독위비민)"라고 노래했다. 즉 부역 간 장부가 ‘민’의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한탄한 것이다. 노예가 아니라, 이제 대접을 받는 백성이 된 것이다. 정말 시력을 잃은 노예에서 상상도 못하던 변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민의 의미는 아직 아니다. 이때만 해도 지금 흔히 쓰는 '민주'民主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달랐다. 춘추전국시대 민주는 민이 주인됨이 아니라, 민의 주인 즉 군주를 의미했다. 주나라 이전 왕조 역사를 다룬 상서(尙書)에서 ‘민주’ 란 단어가 군주란 뜻이었
참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 민民, 백성이다. 노예에서 직업을 가진 사람을 의미했고, 이제 역사의 주인이 됐다. © ajaegers, 출처 Unsplash ‘민주’ 뜨거웠던 청춘 대학시절 이 말을 듣고 가슴 띄지 않았던 이 있으랴. 특히 한국 민주화 시대 80년대 대학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예외가 없을 듯싶다. 뛰는 가슴 안고 살아가는 청춘들의 열망이었다. 민주, 쉽게 '백성이 주인 된다'라는 의미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고, 아직도 진정한 민주가 완성됐는지, 의문부호가 찍힌다. 사실 민주라는 말이 어떻게 연변 했는지 알면 그 어려운 이유를 새롭게 체감할 수 있다. 갑골자에서 민자는 노예를 의미하는 자였다. 갑골자에서 민자는 사람의 눈을 날카로운 침으로 찌르는 모양이다. 눈이 멀어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이 바로 백성 민이다. 피눈물을 흘리는 게 백성 민이다. 참 무서운 글자다. 눈을 찌른 이유는 시력을 빼앗기 위해서다. 실명이 아니고, 눈이 잘 보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옛날 이웃 마을과 전쟁을 해 부락민을 노예로 잡으면 했던 일이다. 노예들이 일은 하지만, 전투력을 상실하도록 하기 위해 한 조치다. 시력을 상실하면 스스로 구속되길 자청한다. 주변에 의존을
요즘 한국 서해가 평화롭다고 합니다. 중국 어선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 많던 중국 어선을 옮겼을까요? 한중이 합의한 휴어기 덕입니다. 중국 동해안의 표정에 한국 서해가 평화로운 원인이 있습니다. http://news.dwnews.com/china/photo/2018-04-29/60055076.html
‘和而不同’, 친구는 조화의 대상이지, 또 다른 내가 아니다. 친구만이 같은 오른손을 내밀 수 있다. © Myriams-Fotos, 출처 Pixabay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오른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같은 오른손을 내밀 수 있는 이는 내가 아닌 친구뿐이다. 친구가 아니면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우린 친구와 같은 한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게 중국의 대화 모양이다. 세계에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것이 중국인들의 거실 배치다. 무협 영화를 보면 자주 등장하니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듯싶다. 중국인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탁자는 마주 보지 않도록 구성돼 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한 방향을 보고 이야기하도록 구성돼 있는 것이다. 대화는 상대방과 같은 곳, 같은 비전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실생활에서 서로 대화가 잘 안될수록 얼굴을 맞대게 된다. 중국 거실 배치의 묘미는 얼굴을 맞대지는 않지만 귀는 더욱 가까이 둔다는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를 더 가까이 상대방 입에 두게 된다. 둘만의 은밀한 비밀 이야기가 하기 쉽다는 의미다. 서로 눈을 마
출처 : 웨이보 微博 우리나라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오는 27일 남북정상회담을 가질 예정입니다. 이날의 만찬을 위해 준비될 메뉴들이 24일 공개되었는데요.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만찬 메뉴와 관련하여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애쓰셨던 분들의 뜻을 담아 준비했다.그분들의 고향과 일터에서 먹을거리를 가져와 정성스러운 손길을 더했다"라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중국 네티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동북 지역의 명물 猪肉炖粉条(돼지고기 당면 조림) 한번 소개해주자 - 만약 한 명은 배부른데, 한 명은 부족하면 어떻게 하려나? - 봐봐, 이런 게 바로 수장의 식사지. 나도 어떻게든 먹고 싶다ㅠㅠ 하나하나 모양새도 이쁘고, 의미도 깃들어있는 이번 회담에 아주 적합한 메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양적인 측면이 아쉬울 것 같네요^^ 만찬과 함께 남북 관계도 든든해지길 해동주말도 바랍니다. 글=김상태
문화유산은 한 나라의 역사가 깃든, 보호해야 할 귀중한 것들입니다. 중국 허베이 박물관에는 24만 점의 문화유산을 보관하고 있는데, 최근 출국이 금지된 국보급 문화유산들을 공개하였습니다. 글=김상태 http://news.ifeng.com/a/20180426/57886197_0.shtml#p=1 출처 : 봉황망 凤凰网 출처 : 봉황망 凤凰网 출처 : 봉황망 凤凰网 출처 : 봉황망 凤凰网
친구가 뭘까? 한자적 의미는 정말 단순 명쾌하다. 힘 쓰는 오른 손을 보태주는 것이다. 내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 geralt, 출처 Pixabay벗, 참 예쁜 우리 말이다. 그게 꼭 우리 말이어서만이 아닐 것이다. 영어도 친구를 버디(Buddy)라고 하는 데 뭔가 발음상 친구의 가까움을 보여주는 인연이 있는 듯 싶다. 표음문자들은 가장 기본적 발음의 정감에서 닮은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세상에 나와 처음 접하는 가족, 엄마에 대한 호칭에는 '으므' 라는 가장 기본적인 입 모양과 모음이 들어가 있다. 엄마, 모(母), mutter, mother 등이 그 예다. 그래서인지 우리 말 벗이 그 어원을 따지면 인도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우리의 벗의 옛 발음은 '벋 '데 인도의 물을 뜻하는 고어가 벋, - 현대어의 발음을 찾아보니 '빠니'라 한다 -이고 이 인도어는 유럽으로 건너가 몸을 의미하는 바디(Body), 친구를 의미하는 버디(Buddy) 등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물 같은 게 친구라는 의미여서 그렇다고 한다. 그럴 듯 해 보인다. 또 벋은 '벋어나가다'의 의미로 친구란 사교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친구란 무엇인가?'하는
아버지의 어깨는 세상의 무게다. © geralt, 출처Pixabay 작가 김정현은 지난 1996년 소설 아버지를 출간해 큰 인기를 모았다. 췌장암 말기로 사형선고를 받은 한정수라는 50대 부친의 생의 마지막 5개월간의 이야기다. 주인공 한정수는 28세 인생의 절정을 맞는다. 늦깎이 대학생이 되면서 같은 해 행정고시에 붙었다. 비록 지방대였지만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언론 매체들이 가난에 굴하지 않고 공부해 대학 입학과 함께 행시합격을 이룬 정수의 사연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게 김정수의 발목을 잡는다고 꼬집는다. 가난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은 집안이 별 볼 일 없다는 것, 지방대라는 것은 학연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언론 덕?에 이 같은 사연이 만천하에 알려진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노력'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정수는 세상의 부조리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흙 수저는 노력을 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정수는 공무원 발령을 받고 정말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항상 그저 그런 평가만 받는다. 사실 보직부터 본래 힘 있고 학벌 좋아 공무원이 된 이들과 달랐다. 한직을 떠돌아서는 성과를 내기란 애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