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출 습(襲) 정말 귀한 것은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 귀한 것을 귀하게 쓸 수 있다. 귀한 것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지키기도 힘들뿐이다. 노자의 생각이다. 꼭 필요할 때 내놓는 게 귀한 것을 귀하게 쓰는 방법이다. 사물도 그렇지만, 사람의 지혜가 특히 그렇다. 정말 좋은 지혜는 꼭 필요할 때 내놓는 것이다. 흔히 지혜로운 이를 ‘현명(賢明)하다’ 한다. 말 그대로 지혜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현명해도 꼭 필요할 때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지혜가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진정한 지혜는 평소 지혜로운 게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제시되는 지혜다. 노자는 그런 지혜를 ‘습명’(襲明)이라 했다. 현명에 상대하는 게 바로 습명이다. 평소 감추고 있지만, 꼭 필요할 때 드러내고 쓰이는 지혜다. 쓰여진 습(襲)자의 본의를 알면 이해가 쉽다. 갑골자 습자는 사람 이 팔 뒤로 무기를 감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무기를 감췄다가 필요할 때 내려치는 게 바로 습(襲)이다. 갑골자 습에는 숨어서 공격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에 앞서 있는 게 쓸 무기를 감추고 있다는 뜻도 있다. 용(龍)아래 옷 의(衣)는 갑골자 모양이 이어지다 보니 만들어진 글자다.
다 갖추면 누가 봐도 좋다. 그게 현(賢)이다. 집안도 좋고, 타고난 재능도 좋고, 말 그대로 금수저가 바로 ‘현’(賢)이다. 역사 이래 모두가 그래서 ‘현’하기를 좋아한다. 갑골자 현은 글자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그렇게 좋은 뜻이었다. 노예, 손재주, 재물 모두를 갖춘 게 현이다. 갑골자 현에는 아직 재물은 없었다. 신하 신(臣)에 또 우(又)만 있었다. 여기서 우는 ‘장악’, ‘관장’(管掌)하다는 뜻으로 풀리고 있다. 그래서 신하를 관장하는 인사 업무 혹은 손의 뜻을 강조해 ‘재능’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하와 재능을 갖춘 뜻을 ‘현’으로 보기도 한다. 훗날 금문에 와서 재물을 뜻하는 조개 패(貝)가 붙었다. 관리(官吏)를 뜻하는 현에 재물이 붙은 것은 참 묘하다. 돌이켜보면, 고래(古來)로 동서양에서 나랏일을 하는 관리는 부자였다. 왜 그럴까? 똑똑한 건 인정하는 데, 그래도 왜 관리가 부자인지는 역사적 의문이다. 고래로 동서양 어느 시대이든 관리의 녹봉이 부자가 될 정도로 많은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시 그래서 참 묘한 게 현이란 글자다. 모두가 현과 같은 관리를 싫어하지만, 모두가 현과 같은 상태를 좋아만 한다. 유일하게 현을 싫어했던
“舉杯邀明月,對影成三人” (거배요명월, 대영성삼인) “술 잔 들어 달 부르니, 그림자까지 셋이 됐네” 요정의 나라는 어린이 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순수한 사람라면 누구에게든 있다. 요정을 부르는 마법도 동화 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현실 속 술 한 잔은 요정의 세계로 가는 마법이 된다. 이백의 시다. 가장 유명한 시다. 한 번도 못 들어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읽은 이는 없다는 시다. 이백의 ‘월하독작’(月下獨酌)이다. ‘달 빛 아래 혼술’이다. 혼자 마시는 술이다. 본래 동양에선 ‘독작’(獨酌)이라 했다. 혼자 마시는 술은 외로워 마시는 술이다. 처량한 술이다. 혼자 취해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추태를 부리기 일쑤다. 그래서 외로워 마시는 술은 사람을 더 외롭게 한다. 이런 외로움을 시인 이백은 요정의 시공 속으로 가는 마법으로 풀어낸다. 소개한 구절은 바로 꽃밭이 요정의 마법 세계로 변하는 주문이다. 술잔을 들어 달에게 이 주문을 외우면 달의 요정이 화답을 하고, 그림자가 살아 움직인다. 다시 이백의 월하독작이 살아 움직인다. “꽃 속에 따른 한잔 술 홀로면 어떠랴, 저 달, 내 그림자 있는데 술 잔 들어 달 서생과 건배하고 술 잔 내려 그림자와 건배하
‘궁즉통’(窮卽通)이란 궁한 데로 쓰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나온 방법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짧게는 변통(變通)이라고 한다. 다만 상황이 달라지면 ‘궁즉통’의 방식은 불통(不通), 즉 통하지 않는 방식이 된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통하면 안되는 방식이 되기도 한다. 여기 짧은 이야기는 임시방편의 도리를 모르면 나오는 우둔한 사례를 보여준다. 짧고 가볍지만 주는 경고는 무겁고 무겁다. 옛날 중국에 한 마을에 자린고비 양반이 살았다. 어느 날 하루 이 양반이 긴 의자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이 양반은 긴 의자를 만들면서 나무를 사 쓰는 게 너무 아까웠다. 옆에서 그 고민을 듣던 목수가 ‘궁즉통’ 묘안을 내놨다. “영감, 이 긴 의자를 한 쪽에만 다리를 만들고 나머지는 식당 벽에 기대어 놓고 쓰면 됩니다. 그럼 의자 다리를 만드는 나무를 아낄 수 있지요.” 이야기를 들은 양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 좋은 생각이네, 그럼 빨리 만들어 주시게.” 그리고 의자가 만들어지자 양반은 목수를 칭찬하며 나무의자를 보고 감탄했다. “오 아주 좋아. 나무도 줄이고 의자도 쓰고, 아 좋네!” 그리고 얼마 뒤 양반의 집안에 행사가 열렸다. 양반은 최근 만든 의자를 자랑하고 싶어
허례와 허식 그리고 실속은 그릇과 음식의 관계와 같다. 그릇이 예쁘고 아름답다고 음식이 나쁘면, 나쁜 것이듯 겉치레가 아무리 화려해도 실속이 없으면 나쁜 것이 된다. 옛날 중국에 한 자린고비 양반이 있었다. 이 양반은 지역에서 가장 예쁘고 훌륭한 잔치그릇을 가지고 있었다. 그릇에는 매 그릇마다 담을 음식들이 채색된 그림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들이 얼마나 생생한지 마치 실제 음식처럼 화려하기 그지 없었다. 이 자린고비 양반은 매번 이 잔치 때마다 이 그릇을 이용해 득을 봤다. 사실 그 득이란 게 별개 아니다. 잔치를 하면서 그릇만 내놓고 실제 음식을 내놓지 않은 것이다. 하루는 한 손님에 물었다. “아니 어찌 음식이 없습니까? 뭘 먹어야 하나요?” 그러자 자린고비 양반이 답했다. “아니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지 않소. 보기 좋은 음식이 그득한 데 보기만 해도 배부른 게 아니요. ㅎㅎ” 어이 없어 하는 손님을 뒤로하고 자린고비 영감이 웃으며 돌아섰다.
“春风不相识, 何事入罗帏?” (춘풍부상식, 하사입라위) 어디선가 불어온 봄바람 애꿎은 치마 끝만 들추네. 시성 이백(701~762)의 춘사다. 이백은 누구라 말할 것 없는 천재 시인이다. 1300여년 전 당나라 시인이지만, 지금 읽어도 시의와 시정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적시고, 요동치게 한다. 그의 시어(詩語)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속에 있지만, 그의 시율은 시대를 넘어 천고를 관통해 면면히 이어진다. 동서양, 그의 시처럼 때론 호방하고 때론 애처롭고 때론 정욕에 싸인 듯 때론 백합처럼 간결하고, 깨끗한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시를 본 적이 없다. 춘사(春思)는 말 그대로 ‘봄의 생각’이다. 봄에 드는 그리움이다. 하지만 겨우내 가슴 속 깊숙이 농 익어온 마음의 정, 심정(心情)이다. 본래 그리움이 짙어지면 애달프다. 애달프다는 건 마음만 아픈 게 아니다. 몸도 아픈 것이다. 몸과 마음으로 그리고 그려, 그리다 못해 그대 오는 날 그만 버티지 못하고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고통, 애달픔이다. 춘사는 이 애달픔을 너무 간결하게 너무도 새침하게 너무도 요염하게 그렸다. 그래서 일견 소녀의 방심(芳心)같고 탕부의 음심(淫心)같으며, 때론 열부(烈婦)의 결의(
우리는 많은 경우 계산을 했는데, 어리석은 답을 얻곤 한다. 삶의 계산은 일차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면의 고른 고려가 더해져야 하는데, 보통의 경우 우린 하나만 알고 계산을 한다. 자연히 항상 어리석은 결론이 나온다. 옛날 중국에 돈만 많은 어리석은 노인이 있었다. 돈을 쌓아두고, 그 많은 농사와 밭을 혼자서 했다. 친구들이 조언하길; “여보게 노비를 고용하시게 그러면 더 많은 농사를 짓고, 밭을 할 것 아닌가? 자네는 쉴수도 있고.” 했다. 하지만 이 노인이 답하길; “아니 고용을 하면 일하는지 하지 않는지 감독을 해야지. 그러면서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숙소도 마련해줘야 할 것 아닌가. 수지가 맞지를 않아. 수지가...” 그 말을 들은 한 젊은이가 노인을 골려 주려 제안을 했다. “그럼 노인장, 우리 집에 어려서 도사의 술법을 얻어 밥을 먹지 않고 일만 잘하는 농노가 있는데, 데려다 쓰면 어떠시오? 내 노인장이 원하면 빌려 주리다.” 자리고비 노인이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럼 밥을 안 먹고 어찌 산다는 말이요.” 젊은이가 답하길; “어려서 도인에게 도술을 배워 바람을 먹고 방귀만 뀐다오.” 그러자 노인이 한 참 생각을 한 뒤 답했다. “아
‘취해 잊은 시간 너도 나도 웃고‘ “我醉君复乐,陶然共忘机。”(아취군복락, 도연공망기) “취한 그대에 건넨 한 잔 그댄 환희 웃고 우린 어느새 시간마저 잊었다네.” 시성 이백(李白:701~762)의 시다. 가장 흥했던 당이 망조가 들기 시작한 시기의 인물이다. 한문학의 영향을 받은 동양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시인이다. 일찍이 중국 천하를 유람하며 곳곳에 명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쉽고 간결하며 호방하면서도 때론 간절하다 못해 애절한 시구를 남겼다. 한 수 한 수가 사람의 심결을 따라 스며든다. 소개한 시는 ‘下终南山过斛斯山人宿置酒’(하종남산과곡사산인숙치주)다. 제목 그대로 ‘종남산 아래를 지나다 은거해 사는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다’는 내용이다. 석양 산길을 지나 친구를 만나는 묘한 기대가 풍경 묘사에 담겼다. 그리고 만난 친구와 나눈 주담(酒談) 낙엽 소리에도 웃는 소녀만 같다. 이제 시의(詩意) 속으로 들어가 보자. 긴 여름밤이다. 산기슭 친구를 찾아가 술 한 잔을 나눌까, 길을 나선다. 능선에 오르니 해가 진다. 길어지던 나뭇가지 그림자 어느새 달 빛 그림자로 바뀌어 간다. 발걸음 총총 재촉하니, 달빛도 졸졸 따라온다. 어느만큼 왔나, 돌아보니,
옛날 중국에 두 자리고비 양반이 이웃하며 사이 좋게 살았다. 어느 여름날 한 자리고비가 옆 마을 자리고비 양반 집에 놀러갔다. 하인이 차를 들고 들어왔는데, 옷이 없어 기와장 두 장을 묶어서 허리에 걸쳐 앞뒤 민망한 곳만 가린 채였다. 집 주인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내가 손님이 있으면 제대로 의관을 갖추라 했거늘, 이게 체면 안 서게 무슨 짓이냐!” 놀란 하인이 급히 나갔다. 잠시 뒤 들어온 하인은 여전히 옷을 벗은 알몸이었다. 다만 기왓장 두 장 대신 이번에 큰 뽕 잎 두장을 끈으로 엮어 역시 앞 뒤 민망한 곳만을 가린 채였다. 주인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차를 권하자, 놀러온 자린고비가 말했다. “아니. 주인장 보니까 낭비가 심하시오” 주인이 되물었다. “무슨 말이시오? 내가 어찌 낭비가 심하단 말이오?” 객이 답했다. “어찌 하인이 겨울옷 여름옷을 구분해 입는다는 말이요. 내 그 것만 봐도 주인장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 줄 알겠오.” 그러자 집 주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이 양반아, 내 어찌 그런 도리를 모르겠어. 내 저 놈을 지난 여름에 거둬들였는데, 당시 조건이 먹는 건 자기가 어찌 알아서 해결할테니, 옷만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오. 그
인동(忍冬)의 마음, 세한심(歲寒心)이다. 푸르려는 마음, 겨울을 세는 마음이다. 겨울나기가 힘든 건 지루하기 때문이다. 밖에는 온 통 추위 뿐, 꽃도 나무도 변화가 없다. 방에서 이 지루한 겨울을 나야한다. 묘한 게 지루함과 싸움이다. 지루함은 이기려 하면 할수록 지치고 지루함에 지고 만다. 이 지루함을 지나야 봄을 맞을 수 있는데 …. 봄의 꽃을, 풀잎의 푸름을 즐길 수 있는데 …. 지루함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잊는 것이다. 뭔가를 잊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수를 세를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선 예로부터 겨울이면, 붓으로 굵은 나무 가지를 그려, 그 위에 하루에 하나씩 1000개 나뭇잎을 그려 넣으며 1000일, 3개월여의 겨울을 셌다. 겨울을 세는 마음이 바로 세한심(歲寒心)이다. 봄의 푸름을 기다리는 마음, 누구나 고대하고 기다리는 변치 않는 마음이다. 시인에게 시를 쓰게 하는 그런 마음이다. “江南有丹橘 经冬犹绿林(강남유단귤, 경동유록림) 岂伊地气暖 自有岁寒心(기이지기난, 자유세한심)” 강남 단귤 나무 봄 맞아 푸른데. 그 어찌 봄기운만의 덕이랴, 겨울 센 변치 않는 의지 때문이지. 역시 장구령(張九齡, 673~740)이다. 감우십이수(感遇十二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