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영기업 15위인 중국해양석유총공사( 中国海洋石油总公司 )는 자국과 해외의 해양유전개발을 하는 기업으로, 영어이름은 약어로 CNOOC ( China Offshore Oil Corporation ) 이다. 1982년 국무원산하 국유기업기업으로 창립했다. 총 직원은 약 99,000명이고, 2019년 매출 1,089 억 달러로, 2020 포츈지 글로벌500기업 순위에서 64위 에 올랐고, 중국 3대이동통신사 중 1위인 중국이동통신 ( China Mobile / CMCC / 65 ) 보다 바로 윗순위이다. 그리고 글로벌순위에서는 미국의 씨티은행 ( Citibank / 70위) 영국의 홍콩상하이뱅크 ( HSBC / 73위) 보다 앞순위 이다. 중국은 50대 말부터 남중국해의 하이난 섬해역등 근해의 해양유전탐사를 시작했고, 1960대초부터는 텐진시 앞바다인 발해만에서의 탐사에 집중해 1972년까지 발해만 해역에 4개지역에 14개의 시추공을 설치해 본격개발을 시작했다. 현재 중국석유총공사는 중국내 4개의 지역지사와 1개 연구원의 1차 자회사를 두고 있다. 1. . 텐진 ( 天津 )직할시 지사 - 중국동해 발해만 지역의 해양유전 54개와 생산플랫폼 113개 보유 2.
중국국영기업 14위의 중국철도건축 그룹 (中国铁道建筑集团 / China Railway Construction Co. )은 , 앞서 본 12위의 중국철로공정 그룹 ( 中国铁路工程集团 / China Railway Engineering Group ) 과 거의 똑같이, 중국의 철도건설의 모든 것을 수행하는 기업이다. 글로벌 500 순위에서도 54위로 , 앞서 본 철로공정그룹이 50위 인 것과 비슷하고, 일 년 매출도 1,203 억달러로, 철로공정보다 약 30억 달러가 뒤지지만, 큰 매출의 차이는 아니다. 현재 이 두 그룹은 모두 다 철도와 고속철 나아가 자기부상열차등의 개발과 건설에서 다같이 세계정상급 기업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이 중국철도건축 그룹은 설립연도가 더 빠르다. 앞서 본 철로공정그룹은 1949년 10월 신중국 건국선포의 다음해인 1950년에 창립했지만, 이 그룹은 신중국 건국을 선포하기 1년 전인 1948년 7월에 창립한 회사이다. 이 기업의 전신은 ' 중국인민해방군 철도병 부대 ' (中国人民解放军铁道兵) 이다. 베이징 소재의 중국군 철도병사령부 산하의 병력은, 1954년 경에는 약 40 만명에 이르렇고, 이 40만 여명의 철도사령부소속 현역 군인들이,
인민지원군 42군을 지휘한 우루이린(吳瑞林)은, 1915년 쓰촨(四川)성 바중(巴中)현의 가난한 농민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10살 때 부터 벽돌·기와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은 매달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고, 공장 관리자들은 다양한 구실을 대며 직공들을 몰아세웠다. 1925년 무렵 이미 당시 공장에는 몇 명의 공산당 지하당원이 있었다. 이들은 노조를 결성했고 파업을 벌였다. 우루이린은 파업투쟁에 용감하게 참여했다. 이를 계기로 우루이린은 13살때인 1928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1932년 10월, 우루이린은 중국 공농홍군(工农红军 / 공인가 농민출신으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무장병력 )에 입대해, 통신병을 시작으로 파란만장한 군 생활에 접어든다. 통신병이라해서 오늘 날같은 무전기가 매우 귀해 취급하는 인원도 극 소수였다. 당시 통신병들은, 과거 전장의 편지를 나르던 연락 비둘기처럼, 부대의 중요 서류나 연락사항을 적은 편지들을 직접 지니고 목적지에 가서 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산길을 걸을 때도 많았다. 통신병의 임무수행방법은 단순했지만, 부대간의 비밀과 명령을 전달하는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었기에, 공산당의…
중국국영기업 13위인 상하이자동차그룹 (上海汽车 / SAIC Motor Corporation Limited (SAIC Motor) , 2020년 글로벌 500 순위가운데 52위를 기록했고, 매출약은 1,220 억 달러로, 직원은 약 15만명으로 추산된다. 중국의 많은 국영 자동차회사 브랜드가운데, 가장 좋은 브랜드파워를 가지고 있고, 중국자동차회가가운데 매출규모도 가장 큰 중국내 1위이다. 글로벌기업순위 52인 상하이자동차그룹은, 미국최대의 부동산기업인 패니 매 ( 53위) 그리고 독일의 BMW그룹( 宝马集团 / 56위)보다 앞서있다. 줄여서 샹치(上汽)영어로 싸익 ( SAIC ,Shanghai Automotive Industry Corp 의 앞글자 이니셜 )으로 불린다. 중국의 베이징치처 ( 北京汽车)상하이치처(上海汽车) 창춘치처( 长春汽车) 광저우치처 (广州汽车)등 각 도시의 이름을 딴 자동차회사들은 모두 시정부가 만든 국영기업이다. 상하이자동차그룹는 중국이 1979년 덩샤오펑의 개혁개방이후 , 처음으로 외국의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해 설립한 최초의 외국기업과의 합작회사를 자회사로 세우면서, 중국에서 가장 빨리 선진화된 자동차생산그룹이다. 중국은 1979년
항미원조전쟁 제 15회 , 운명의 영원전투가 시작되다. 1950년 11월 23일 새벽, 인민지원군 제 42군 군장 우루이린(吳瑞林)은, 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한센추(韓先楚)의 전화를 받는다. 38군 군장 량싱추( 梁兴初 )가 38군 단독으로 덕천을 공격하겠다고 하니, 당초에 세웠던 38군 42군의 합동 작전을 변경해, 42군은 단독으로 덕천의 서쪽 영원을 치라는 지시였다. 우루이인은 즉시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목표는 42군 정면에 있던 한국군 8사단이었다. 정면공격은 예하 125사단이 맡아 밀어부치고, 동시에 126사단은 한국군 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124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해 영원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사단장들에게 새 작전을 하달한 후, 우루이린은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영원 북쪽의 한 산봉우리에 올랐다. 힘들게 정상에 오른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부대가 공격할 영원 시내를 세밀히 관찰했다.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마을에는 하얀 눈만 쌓여 있었다. 영원의 한국군 부대상황를 완전히 파악한 그는, 돌격대를 편성해 8사단의 주력인 제10연대 지휘소를 먼저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다. 11월 25일 저녁 무렵, 제 2차 전역의…
중국철로공정그룹 ( 中国铁路工程集团 / China Railway Engineering Group )은, 세계에서 2번째로 땅이 넓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중국의 철도건설의 모든 것을 수행하는 회사로, 현재 중국국영기업 12위이자 글로벌 500대 기업순위의 50위에 랭크돼 있다. 1979년 중국개혁개방 이전의, 현대화초기에는 중국국영기업 1위였었다. 철도는 한 나라 국부의 뿌리이자 제 1순위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한국침략도 조선과 만주의 철도부설권부터 시작됐고, 영국 독일 프랑스도 제국주의 시절 중국대륙의 침략도 철도부설권이 화두였다. 중국철로공정그룹은 1949년 10월 1일 신중국건국이후 직후인, 다음해인 1950년 3월에 창립했다. 이후 철도부설 설계, 재료인 레일과 부목등 관련 부품의 생산, 각 역이 들어설 부동산과 역사건설등 철도부설과 관련되는 일체의 산업과 사업을 운용해왔다. 이후 2010년까지 약 60년동안 약 78,000 킬로미터에 달하는 철로를 건설했고, 이후 전기철도가 도입되면서 전력사업부문도 확장했다. 또 철도건설사업은 교량과 터널등 대형토목사업도 포함되기에 , 중국철로공정그룹은 종합건축건설회사로서, 현재는 사업부문별로 약 50개
중국 국영기업 11위인 중국런쇼우보험그룹 ( 中国人寿保险 )이름의 '런쇼우 (人寿 )' 는 장수, 즉 오래 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영어명은 China Life Insurance (Group) Company 이다. 2020 포츈지 글로벌 탑 500 기업중에는 45위로, 매출액은 1,312억 달러 (한화 환산 약 144조 원) 이다. 중국 1위 보험사인 핑안보험(平安保险)의 매출보다는 54조 원이 적은 제 2위의 종합보험사이다. 그러나 독일의 세계적인 보험회사로 알려진 알리안쯔 보험회사 ( Allianz )보험의 바로 앞 순위에 위치한다. 그리고 중국 최대의 민영회사 1위인 화웨이 그룹 ( 49위) 보다 글로벌 순위가 앞서 있다. 2019년 매출은 1,312억 달러이고, 총 직원수는 약 11만 명이다. 련쇼우 보험그룹은, 중국과 세계의 제 1위인 핑안보험보다 매출을 조금 작지만, 런쇼우 보험사의 역사는 훨씬 오래됐다. 핑안보험과 같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속 국영기업인 련쇼우보험사는,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과 거의 동시에 창립한 신중국 최초의 보험회사이다. 1949년 당시의 창립명칭은 중국 인민보험공사 ( 中国人民保险公司 ) 로, 신중국…
인민지원군의 제 2차 전역의 개전 초에, 평안북도 덕천 인근의 대동강 상류의 교량폭파 기습전은, 이후 전세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제공했다고 살펴보았다. 그리고 바로 전회에서 기술했던 그 당시 이 기습전을 이끌었던 38군의 정찰과장 장퀘이인 (張魁印) 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샨시성 출신인 장퀘이인 (張魁印)은 1922년생으로, 1951년 1월 항미원조전쟁에 투입돼 이 기습전을 지휘할 때 29살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이후, 1급 공훈훈장을 수여받고, 38군 114사단의 부사단장을 거쳐, 헤리롱지앙성 군구 ( 黑龙江省军区 )의 부참모장을 역임하고, 1982년 60세에 퇴직군인으로 전환돼, 이후 부군장급 (副军职)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부군장급 대우는, 부성장급으로 알려진다. 지난 2019년 12월 16일에 한 웨이보 ( 晨晖纪实 / 천훼이지시 / 아침햇살 기록) 가 41년 동안 감춰졌던 비밀이란 제목으로 장꿰이인을 인터뷰한 기록이 등장했다. 이 웨이보는 장퀘이인이 헤이롱지앙 성도인 하얼삔에서 아들식구와 함께 살며 노년을 지내는 가정을 방문해 인터뷰하고 당시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항미원조전쟁 초기에 있었던 무릉교
2차 전역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인 11월 24일, 인민지원군 38군의 군장 량싱추( 梁兴初 )는, 군단 정찰과장 장퀘이인 (張魁印)과 113사단 정찰과장 저우원리(周文禮)를 불러 중요한 임무를 맡긴다. 적진을 돌파해 26일 오전 8시 전까지 덕천을 지나는 대동강 상류의 교량을 폭파하라는 임무였다. 38군이 덕천을 공격할 때 후퇴할 수 없도록 퇴로를 막기 위해서였다. 332명으로 구성된 정찰대가 구성됐다. 대부분이 공병대원이었다. 정찰대에는 소수의 영어 및 한국어 통역병, 길 안내 역할을 할 평안도 내무서 서장 등도 함께 대오로 편성되었다. 달빛이 고요한 11월 24일 밤, 정찰대는 한국군 7사단이 지키고 있던 적진 구역 속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지뢰밭과 철조망을 통과하면서 점점 깊숙히 적진으로 들어갔다. 한국군 병사를 가득 실은 트럭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정찰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다. 미군과도 조우했으나 미군은 그들을 한국군으로 착각했다. 7사단 점령구역을 벗어난 정찰대는 다음날 25일 하루 종일 산길을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25일 황혼 무렵이 되자 포성이 들렸다. 량싱추의 제38군이 예하의 3개 사단을 앞세워 남하하면서, 인민지원군의
중국은행은,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혁명으로 봉건왕조인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1912년 난징에서 탄생한 중국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최초로 설립한 최초의 근대은행으로, 중화민국의 중앙은행이었다. 한 나라의 이름을 앞에 붙힌 은행은, 그 나라의 화폐제조와 유통을 하는 국립은행의 역할을 하는 은행이다. 당시는 현재 한국의 한국은행 일본의 일본은행처럼, 한 국가의 통화를 제조 유통 관리하는 중앙은행으로서 설립했다. 중화민국 건국의 아버지인 쑨원 ( 孙文/ 손문)이 임시총통으로서, 근대국가의 은행으로서 중국은행설립을 비준한 이후,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후에도 계속됐으며 , 1995년 현재의 중국 인민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 새롭게 등장하기 전까지 지속됐다. 즉 1995년, 중국인민은행이 중국은행의 중앙은행으로서의 기능을 인수받은 이후에는 일반은행으로 바뀌어, 앞서 본 중국공상은행 건설은행 농업은행 그리고 후술할 다른 일반은행과 같이 일반은행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성격이 전환되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일반은행들이 국무원산하로 감독을 받는다면, 일반은행으로 성격이 바뀐 과거의 중앙은행이었던 중국은행은 국무원 즉 중국인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