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누구의 뜻이 이리 간곡한가? 뜻이 귀한 건 그게 오래 한결같을 때다.

돌탑이 쓰러지지 않는 건, 그 속의 수많은 구멍때문이다.

一片丹心



한 사람이 평생을 산을 좋아했다. 정상에 오르면 돌을 하나씩 쌓았다.

 

작은 기도와 함께 그렇게 돌에 돌을 하나씩 얹었다.

 

‘오늘도 이렇게 산을 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게 해주세요.’

 

작고 평범한 기도였다. 때론 행복을, 때론 건강을, 때론 자신을, 때론 가족을, 지인을 위한 것이었다.

 

작은 돌은 그렇게 또 다른 작은 돌 위에 쌓였다. 쓰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놓았을 뿐이다.

 

일 년이 지나 돌은 돌 위에 조금씩 자라 키가 커졌다.

 

탑이 됐다.

 

탑 모양이 되자 탑은 저절로 자라기 시작했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 사람들이 탑을 보고 하나둘씩 돌을 얹기 시작한 것이다.

 

돌탑은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허술해 보이는 수많은 작은 구멍 덕이었다.

 

구멍 덕에 돌탑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처음 돌을 얹은 이는 이제 더 이상 산을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탑은 더 자랐다. 탑 옆에 아들, 딸 탑도 생겼다. 탑 가족이 됐다.

 

산이 좋아 오른 이들의 작은 마음 한 조각이 그렇게 돌로 탑이 됐고, 탑의 가족이 됐다.

 

‘누구의 뜻이 이리 간곡한가.’

 

매번 산행에서 돌탑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감성이다.

 

변치 않는 마음의 한 조각, 그게 뜻이다.

 

뜻이 귀한 건 그게 오래 한결같을 때다.

 

 

한자에서 뜻은 마음의 소리다. 변치 않는 일편단심이다.

 

본래 갑골문에는 없다. 진나라 글자 소전에 등장한다.

 

농경사회가 정착되면서, '동물에서 사람 스스로가 떨어져 나왔을 때의 뜻' 이라는 글자가 나온 것이다.

 

한자 자형은 단순하다. 소리 음(音)이 마음 심(心) 위에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의(意)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본래 소리는 음과 성으로 나뉜다. 음 자 역시 갑골문에는 나오지 않고 금문에 모습이 보인다.

 

입 구(口)를 바늘로 찌른 모양이다. 즉 고정된 값이 있는 소리다.

 

반면 소리 성은 갑골문부터 나온다. 소리 성에서 소리 음이라는 개념이 구분돼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갑골문의 소리 성(聲)은 좀 복잡하다.

 

끈으로 묶인 돌을 막대기로 두드리며 울리는 것을 듣는 귀의 모양을 그렸다. 음악을 듣는 것을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소리를 낸다는 의미와 듣는다는 의미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소리를 내야 듣는다는 단순한 진리가 녹아 있다.

 

 

하지만 마음의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다. 마음으로 느끼는 소리도 있다.

 

바로 음이다. 소리 음은 관념적이지만 소리 성은 유물적이다.

 

굳이 구분하면 음은 고정된 값이 있는 소리이고, 성은 아직 고정된 값을 찾아가는 소리다.

 

음악의 소리를 음이라고 동물의 울음소리를 성이라 한다.

 

사람만이 음과 성을 다 낸다.

 

성은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없지만 음은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그런 소리값을 극음이라 한다.

 

우리의 귀가 듣는 범위를 넘어선 지극한 소리다.

 

귀에 들리지 않지만,

 

그 지극한 소리는 마음에 와닿는다.

 

마음을 움직인다.

 

작은 조약돌이 모여 이룬 탑이 전하는 소리다.

 

그런 현상을 당 시인 백거이는 이렇게 말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가 더 크다."

無聲勝有聲(무성승유성)

 

들리지 않는 지극한 마음의 소리가 바로 뜻이다.

 

뜻 의(意)은 마음의 소리다.

 

바늘로 찔려 고정된 마음의 소리다.

 

변치 않는 소리다.

 

마치 뮤직 비디오에 흔한 찻집 한 벽에 꽂힌 메모와 같다.

 

메모에는 마음 한 조각이 적혀있다.

 

“1988년 3월 14일 A♥B 왔다. 가다!"

 

긴 세월이 흘러 지금 이 메모 속 주인공들은 무엇을 할까?

 

남겨져 오래된 마음, 그게 뜻, 의(意)다.

 

뜻은 그렇게 오래 지날 수록 가치가 있다.

 

변치 않았을 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 뜻을 남긴 사람이 굳이 잘 난 사람일 필요도, 굳이 돈이 많은 사람일 필요도 없다.

 

한 뜻이 오래오래 변치 않으면 저절로 가치가 생긴다.

 

그 것이 숭고한 '의지'(意志)다.

 

오래 오래 변치 않는 마음의 소리다.

 


사회

더보기
"급식체는 언어의 자연스런 변화" VS "사자성어도 말할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 한 영상이 화제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영상은 소위 ‘급식체’를 쓰는 어린이들이 옛 사자성어로 풀어서 말하는 것이었다. 영상은 초등학생 주인공이 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包的’라고 말하지 않지만, ‘志在必得’, ‘万无一失’, ‘稳操胜券’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老铁’라고 말하지 않지만, ‘莫逆之交’, ‘情同手足’, ‘肝胆相照’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绝绝子’라고 말하지 않지만, ‘无与伦比’, ‘叹为观止’라고 말할 수 있다…” ‘包的’는 승리의 비전을 갖다는 의미의 중국식 급식체이고 지재필득(志在必得)은 뜻이 있으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의미의 성어다. 만무일실(万无一失)을 실패한 일이 없다는 뜻이고 온조승권(稳操胜券)은 승리를 확신한다는 의미다. 모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뜻하는 말이다. 초등학생이 급식체를 쓰지 말고, 고전의 사자성어를 다시 쓰자고 역설하는 내용인 것이다. 논란은 이 영상이 지나치게 교육적이라는 데 있다.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초등학생의 태도에 공감을 표시하고 옛 것을 되살리자는 취지에 공감했지만, 역시 적지 않은 네티즌들이 자연스럽지 않은 억지로 만든 영상이라고 폄훼했다. 평파이 등 중국 매체들에

문화

더보기
[영 베이징] '관광+ 문화' 융합 속에 베이징 곳곳이 반로환동 변신 1.
‘문화유적 속에 열리는 여름 팝음악 콘서트, 젊음이 넘치는 거리마다 즐비한 먹거리와 쇼핑 코너들’ 바로 베이징 시청취와 둥청취의 모습이다. 유적과 새로운 문화활동이 어울리면서 이 두 지역에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바로 관광과 문화 융합의 결과라는 게 베이징시 당국의 판단이다. 중국 매체들 역시 시의 놀라운 변화를 새롭게 조망하고 나섰다. 베이징완바오 등 중국 매체들은 앞다퉈 두 지역을 찾아 르뽀를 쓰고 있다. “평일에도 베이징 시청구 중해 다지항과 동성구의 룽푸스(隆福寺) 상권은 많은 방문객을 불러모았다. 다지항의 문화재 보호와 재생, 룽푸스의 노포 브랜드 혁신이 시민과 관광객에게 새로운 소비 경험을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올여름 열풍을 일으킨 콘서트가 여러 지역의 문화·상업·관광 소비를 크게 끌어올렸다.” 베이징완바오 기사의 한 대목이다. 실제 중국 각 지역이 문화 관광 융합을 통해 ‘환골탈퇴’의 변신을 하고 있다. 베이징시 문화관광국 자원개발처장 장징은 올해 상반기 베이징에서 ‘공연+관광’의 파급 효과가 뚜렷했다고 밝혔다. 시에 따르면 대형 공연은 102회 열렸고, 매출은 15억 위안(약 2,934억 6,000만 원)에 달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