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있어, 돈 귀한 줄 모를까? 누가 있어, 금 좋은 걸 모를까? 귀한 건 세상이 먼저 안다. 그래서 쌓아놓은 금덩이는 도적을 부르고 쌓아놓은 곡식에는 쥐만 들끓는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귀한 게 뭔지, 알기는 하는 걸까? 그저 주변에 구하기 힘든 것 주변에 없는 그런 것들을 ‘귀하다’ 하는 건 아닐까? 심지어 주변에 없다고 착각하는 것들, 남부럽게 한다 착각하는 것을, ‘귀하다’ 착각하는 건 아닐까? 이리 생각해보자. 하늘에서 이상한 권리증을 하나 받았다. 이 권리증을 제시만 하면, 내가 그냥 자동차 공장에 가서 차를 가져올 수 있고, 내가 그냥 어느 식당이든 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걸 마음껏 먹을 수 있다. 그런데도 돈이 귀하고, 금이 귀한 게 될까? 내가 은행에 가서 달라고 하면 은행원이 그 자리에서 그냥 인쇄를 해 돈을 주고, 내가 마트에 가서 달라고 하면 점원이 그 자리에서 그냥 뭐든 담아서 배달해 준다면, 내가 금은방에 가서 달라고 하면 주인이 금이든, 다이몬드든 그냥 준다면, 돈이 귀하고, 금이 귀한 걸까? 실은 귀한 건 자동차요, 곡물이다. 정말 귀한 것은 인간의 제도 속에, 인간의 계약으로 인간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나를 배부르게
노자의 그런 도를 따르면 있음에는 반드시 없음이 따름을 알고, 그 없음이 있어, 비로소 있음의 존재 값이 정해짐을 안다. 그래서 이 도리를 알고 따르는 이는 있음을 통해 없음을 알고 없음의 유용함을 안다. 있음의 가치를 안다. 그렇게 있고, 없음이 어울려 성장하는 게 만물이 성장하는 이치다. 없음에 힘써 있음이 쓰이도록 하는 걸 우리는 “공(功)을 이뤘다” 한다. 없음에 힘쓰니 뭘 한다 말할 게 없고, 그래 공을 이뤘다고 뭘 했다 말 할 게 없다. 말하지 않았다고 위하지 않은 게 아니다. 말 보다 행동으로 위하고 때로는 행동하기 보다 참고 지켜봄으로써 위하는 게 진정한 위함임을 안다. 진정한 사랑이 놓아줄 수 있는 사랑이듯, 진정한 위함은 유로써 또 무로써 다함이라는 것을 안다. 그저 있음(有) 앞(前)에 없음(無)을 있어 순서가 생기고 원형의 세계에서 앞뒤가 계속 나가 언젠가 내 앞에 있는 뒤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노자는 시작을 시작이라 하지 않고 그 끝을 끝이라고도 않는다.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다. 오직 머물지 않아야, 떠남도 없는 것이다. “是以圣人居无为之事,行不言之教,万物作而弗始也,为而弗志也,成功而弗居也。夫唯弗居,是以弗去。”(시이
유와 무가 생을 만들고, 길고 짧음이 모양을 만드는 게 세상의 이치다. 세상만물이 서로 하나면서 만물로 다른 이치기도 하다. 도리를 따르면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만 않고 쉬운 것을 쉽다다고만 않는다. 어려우니, 이제 쉬울 수 있고 쉬우니, 어려울 수 있는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도리를 따르기 어려운니, 그 것은 쉬움은 어려움에 가려져 있고 어려움은 쉬움에 가려져 있는 탓이다. 짧은 것은 긴 것에 가려져 있고 긴 것은 짧은 것에 가려져 있다. 높고 낮음도 앞과 뒤도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가리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렇게 당장 드러나는 하나만 본다.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을 알면,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은 있다 할 것인데, 아쉽게도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한다. 없는 게, 무(無)란 없는 게 아닌데, 우린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한다. 1과 0처럼 1다음의 0이 10이 되듯 유와 무는 유무로서로 새로운 단위의 존재가 된다. 0을 ‘없음’이란 값이 아니라 그저 ‘없다’고만 하면 그런 인식의 세상 속에는 ‘1’은 언제나 ‘1’일뿐이지, 10이나, 100이나, 1000은 있을 수가 없다. 만물이 유와 무로 이뤄지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게 바로 노자의 도다.
도리를 따르면 어려운 것을 어렵다고만 않고 쉬운 것을 쉽다다고만 않는다. 어려우니, 이제 쉬울 수 있고 쉬우니, 어려울 수 있는 때문이다. 하지만 이 도리를 따르기 어려운니, 그 것은 쉬움은 어려움에 가려져 있고 어려움은 쉬움에 가려져 있는 탓이다. 짧은 것은 긴 것에 가려져 있고 긴 것은 짧은 것에 가려져 있다. 높고 낮음도 앞과 뒤도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가리고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렇게 당장 드러나는 하나만 본다.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을 알면,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은 있다 할 것인데, 아쉽게도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한다. 없는 게, 무(無)란 없는 게 아닌데, 우린 보이지 않는다고 없다한다. 1과 0처럼 1다음의 0이 10이 되듯 유와 무는 유무로서로 새로운 단위의 존재가 된다. 0을 ‘없음’이란 값이 아니라 그저 ‘없다’고만 하면 그런 인식의 세상 속에는 ‘1’은 언제나 ‘1’일뿐이지, 10이나, 100이나, 1000은 있을 수가 없다. 만물이 유와 무로 이뤄지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게 바로 노자의 도다. 그런 도를 따르면 있음에는 반드시 없음이 따름을 알고, 그 없음이 있어, 비로소 있음의 존재 값이 정해짐을 안다. 그래서 이 도리를 알
생이 무엇이더냐? 있고, 없는 게 생이다. 없어야 있을 수 있고, 있어야 비울 수 있다. 이룸이 무엇이더냐? 어렵고 쉬운 게 이룸이다. 어려워야 쉬울 수 있고, 쉬워야 어려울 수 있다. 형태란 무엇이더냐? 길고 짧은 게 형태다. 길어야 짧아지고 짧아야 길어진다. 서로 다른 길이들이 만드는 게 모양이다. 같은 길이는 한가지 모양만 만든다. 화음이 무엇이더냐? 음 높이가 다른 음들의 어울림이다. 한 음으로는 노래를 만들 수 없다. 그럼 따른다는 게 무엇이더냐? 앞과 뒤가 같이 있어야 비로소 따를 수 있는 것다. 네가 앞이냐? 내가 뒤냐? 방향만 달리하면 내가 앞이고 네가 뒤다. 결국, 앞은 뒤의 다른 이름이요, 뒤는 앞의 다른 이름이다. 이 모든 게 항상 그렇다. 노자는 이 도리를 ‘항’(恒)라 부르고, 혹자는 이 도리를 ‘조화’라고 부른다. “有无相生,难易相成,长短相形,高下相盈,音声相和②,前后相随,恒也。”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형, 고하상영, 음성상화, 전후상수, 항야) "유무가 같이 생을 만들고, 쉬음과 어려움이 같이 성공을 만든다. 길고 짧은 게 같이 모양을 만들며, 높고 낮음이 같이 채움을 이뤄진다. 소리와 소리가 겹쳐 화음을 이루며, 앞과 뒤가
모든 존재에 도의 원칙은 예외가 없다. 유한의 존재도, 무한의 존재도, 모두 도의 품에 있는 것이다. 있음 유(有)과 없음 무(無) 둘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있고서야, 비로소 없을 수 있고, 없고서야, 비로소 있을 수 있다. 배 고프냐? 이제 배 부를 수 있겠구나! 배 고품의 시작이 배 부름이요, 배 부름의 시작이 배 고품인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노자는 너무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 반어적 효과를 극대화한 ‘상생의 화법’이다. 가는 건 머문 탓이다. 한 쪽이 오르면 다른 쪽은 내려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하나요. 추와 미가 하나다. 세상엔 만물이 있지만, 하나의 도만 있다. 하나의 도만 있다는 건 결국 세상이 하나요, 그 세상의 만물이 하나란 의미다. 유가 있어 비로소 무가 있다는 상생의 도리를 그대로 화법에도 적용한 ‘상생어법’이다. 처음 이상한 이 말은 곱씹을수록 논리에 이치에 맞는다. “네가 선해지려는 것은 그 악을 알기 때문이요. 네가 예뻐지려는 것은 네가 그 추함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악함은 착함의 모자란
배 부름이 있어야, 배 고품이 있는 것이다. 선과 악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선하더냐? 악을 알아야 비로소 선을 아는 것이다. 선해려는 것은 결국 악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이다. 내 악을 알아야 내가 선해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악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내가 비로소 선해질 수 있는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결국 선하려 하는 것은 이미 악하기 때문인 것이다. 내가 추함을 알아야 고쳐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감춰서 예뻐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노자가 옳다. “天下皆知美之为美,斯恶已;皆知善之为善,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부선이.) “천하가 안다. 아름다워지려는 것은 아름다움이 추하기 때문이며, 착해지려 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에 이 원칙은 예외가 없다.
“배 고프냐? 이제 배부를 있겠구나.” 노자의 말이다. 무슨 말인가 싶다. 배 고프다는데, 그럼 이제 배부를 수 있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라. 배 부른 이가 어찌 배 부를 수 있겠는가? 배 고픈 이가 어찌 배 고플 수 있겠는가? 배가 부르려면, 먼저 배가 고파야 하고, 배가 고프려면, 먼저 배가 불러야 하는 법이다. 이제 생각하니 너무 당연한 말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바로 노자의 진리들이다. 도덕경 2장의 이야기를 위한 몸풀기다.. “天下皆知美之为美,斯恶已;皆知善之为善,斯不善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악이; 개지선지위선, 사부선이.) “천하가 안다. 아름다워지려는 것은 아름다움이 추하기 때문이며, 착해지려 하는 것은 악하기 때문이다.” 착해지려는 게 악해서 그렇다니? 마치 착해지려 애쓰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배 고픔과 배 부름을 생각하면 답이 있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无,名天地之始;有,名万物之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모) “도를 네가 정의하면 비상의 도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비상의 이름이 된다. 없음은 천지 시작의 이름이요, 있음은 만물 시작의 이름이다.” 묘한 말이다. 알려주고 싶지 않은 듯싶다. 마치 이리 말하는 듯싶다. “왜 알려고 하는가? 말하면 알아듣기는 하는가? 그럼 한 번 들어는 봐라.” 그리고 입을 땐다. “도를 네가 정의하는 순간, 그 도는 상(常)도가 아닌, 비상(非常)의 도다. 마치 인간들 사이의 네가 네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다른 인간과 구분돼 네가 되는 것과 같다. 이름이 있는 너는 너이지, 일반의 인간이 아니다. 하물며 그 것은 인간의 말일뿐이다. 보라, 인간에게 산은 산은데, 새에게도 산은 산이던가? 인간에게 강은 강인데, 물고기에게도 강은 강일까? 만물을 존재케한 게 만물의 도인데, 왜 너만 부르려 하는가. 네가 정의한 도는 너만의 도이지, 모두의 도가 아니다. 비상의 도인 것이다.” 천지만물 속에 인간이 있고, 인간 속에 나와 네가 있다. 유(有)와 무(無)도 마찬가지다. 나 아(我)와 비아(非我)가 그렇다.
편집자 주: 본 시리즈 '노자심득'은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이야기다. 노자는 유가의 공자도, 도가의 장자도 스승으로 여겼던 이다. 세상에 딱 한 권의 책 도덕경을 남겼다. 5000자의 도덕경은 총 81개의 장으로, 37장까지를 도경, 44장을 덕경이라고 한다. 노자는 이 도덕경을 통해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음을 제시하고, 그 원리를 따르라 권한다. 원리를 따르면 흥하고 따르지 않으면 망한다 한다. 하지만 묘한 게 그 원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노자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것을 네가 안다 하는 순간, 그 도는 무엇인가 변질된 도라고 한다. 묘한 말이지만,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노자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된다. 노자가 말하는 원칙 앞에서 스스로를 숙이게 되고, 순응하게 된다. 이에 수천년 장구한 동양의 역사에서 도덕경은 이 원칙, 천지창조의 진리로 인도하는 비서(秘籍)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 난해한 문구 탓에 아쉽게도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 노자는 잊혀가는 인물, 도덕경은 잊혀져 가는 책이 됐다. 많은 이들이 도덕경을 읽은 현인이 남긴 말에는 감탄하면서 정작 노자의 말은 읽지 않는다. 이번 시리즈는 이에 노자의 생각, 노자에 대한 집필자의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