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치 혀를 위해 먹는가? 대략 9m다. 입에서 항문까지의 길이다. 음식이 들어가 맛을 느끼고, 다시 소화가 돼 영양분을 몸에 흡수하는 길이다. 그리고 남은 찌꺼기가 대장으로 몸 밖으로 배출된다. 우린 무엇을 위해 먹는가? 대부분이 세치 혀를 위해 먹는다. 맛있어야 먹고 즐기려 먹는다. 세치 혀가 맛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에 좋은 건 세치 혀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길고 긴 위장, 소장, 대장에 좋은 것이다. 건강은 세치 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비로소 얻는다. 화려한 색(色)도 화려한 음(音)도 모두 마찬가지다. 진짜 들어야할 것을 진짜 봐야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오늘날 숏폼도 다르지 않다. 다채롭고 화려한 5분의 볼거리를 위해 아니 요즘은 1분을 위해 우리는 1시간을, 반나절을 결국 인생을 소비한다. 소비가 아니다. 낭비다. 세치 혀를 위해 먹는 것은 음식의 낭비요, 1분의 볼거리에 빠져드는 것은 인생의 시간 낭비다. 그래서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오색영인목망, 오음영인이농) “오음이 눈멀게 하고 오음이 귀먹게 한다.” 한다 하는 것이다.
있어야 쓰는가? 맞지만 정확하게 있어서 빈 곳을 쓴다. 물컵은 어디에 쓰는가? 물을 담을 때 쓴다. 빈 곳에 물을 채워 쓰는 게 컵이다. 컵의 쓰임은 모양에 있지 않다. 컵의 빈 곳 크기에 있다. 큰 컵은 모양이 큰 게 아니라 빈 곳 크기가 큰 것이고, 모양만 크고 물을 담을 빈 곳이 작으면 쓸모가 적다하는 것이다. 주먹은 쥐면 남을 때릴 때 쓰고 피면 물건을 잡을 쓴다. 남을 때리면 적이 생기고 남을 잡으면 친구가 생긴다. 빈 곳과 빈 곳을 채우면 이음이 생기고 이어지면 새로운 쓰임이 생긴다. 바퀴살이 가운데를 비워 축과 이어지고 동력을 받아 구를 수 있는 것이다. 빈 곳을 가진 흙이 그릇이 되듯 비워진 주먹이 악수를 가는 것이다. 오늘날 플랫폼이라는 것도 사람과 사람의 빈 곳을 채워 이어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이어질 때 새로운 쓰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있는 유에서 없는 무를 찾으며 쓰임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當無有用’(당무유용) “빈 곳에 쓰임이 있다.” 한 것이다.
- 욕망과 욕심은 인간의 본심이다. 살아가는 이유다. 그 걸 버리면 과연 인간인가? 인간이길 포기하고 무슨 수양을 할까? 인간이 인간다운 게 그게 자연인 것을... 노자는 욕망이 나쁘다 하지 않는다. 다스리라 가르친다. - 편집자 주 “持而盈之 不如其已”(지이영지 불여기이) “쥐고 잡으려느냐? 그냥 있는 게 낫다.” 잡고 싶으냐? 그럼 먼저 잡은 것을 놓아라. 잡는 것은 펴고서 하는 것이지 쥐고서 하는 게 아니다. 주먹으로 잡을 수 있는 건 없다. 날선 칼은 자르려는 것이고 자르다 보면 무뎌지는 게다. 날선 칼은 무딘 칼보다 항상 먼저 쓰이고, 먼저 무뎌진다. 세상의 이치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쥔 것에서 펴고, 잡고 다시 쥔다. 날이 서고 쓰이고 무뎌진다. 다시 날이 서야 쓰임이 생긴다. 재물을 모으는 것은 크게 쓰려는 것이다. 크게 쓸 줄 모르고 모으기만 하면, 쌓는 수고만 낳고 도적을 키워 스스로 지키는 고생만 낳는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주먹에 든 재물이다. 주먹을 펴야 새로 잡을 수 있듯 공을 세우면 떠나야 새로운 공을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도란 그렇게 물 흐르듯 사물의 흐름이 바뀌는 순서다. 쥐고 펴며 날이 서고 무뎌지고 높은 곳에서 낮
최고의 선은 선의 크기에 있지 않다. 아무리 작은 행위라도 선함을 잊지 않고 항상 실천할 때 그게 바로 최고의 선인 것이다. 그런 선은 물과 같다. 항상 먼저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한다. 높은 곳에서 스스로 내려와 저 아래 바다를 채운다. 내려오면서 산과 들의 나무와 곡식에 양분을 줘 열매를 맺고 향기를 나게 하지만, 물은 스스로의 공이라 하지 않는다. 꽃이 나무가 스스로 자랐다 하도록 한다. 그리고 물을 머물지 않고 저 아래 바다로 흐르길 멈추지 않는다. 흐르며 모든 빈 곳을 채운다. 웅덩이의 크고 작음을 나누지 않고 웅덩이가 세모이건 네모이건 가리지 않는다. 물은 그렇게 모두 채우고 채우고 나서야 다시 흐른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한다. 흙탕물이 되건 오염수가 되건 마다함이 없다. 바위를 만나면 싸우지 않고 피해 가지만, 결국 그 바위에 구멍을 내는 게 바로 물이다. 그렇게 흘러 흘러 채운 바다는 깊고 또 깊다. 그래서 우린 물은 항상 선하다하는 것이다. 세모 컵에 담기면 세모 컵 모양이 되고, 네모 컵에 담기면 네모 컵 모양이 되고 그렇게 모양은 수천 수만가지로 바뀌지만 물은 그 본질은 항상 변함이 없다. 항상 먼저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하며
착하다는 건 선(善)하다는 건 무엇일까? 왜 우린 선하기 힘들고 착하기 힘들다 하는 것일까? 사실 우린 모두가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안다.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선과 악을 알고, 느낀다. 우리 모두가 선하다 하는 건 같다. 그냥 본능적으로 같다. 강보의 영아(嬰兒)는? 선하다 한다. 그저 울기만 하고 보채기만 하는데 그래도 선하다 한다. 아기가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좋으면 웃고, 나쁘면 운다는 알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안다. 아기가 남을 해치질 능력도 마음도 없다는 걸. 심지어 아기는 그런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걸 우리는 안다. 버스에 올라탄 노인에게 임산부에게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좌석에 노약자, 임산부 보호석이라 써 붙여 놓지 않아도 일어서는 소녀는, 소년은, 우리는 선하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선(善)을 안다. 세상에 태어나 붉은 것을 모두가 붉다하고 푸른 것을 모두가 푸르다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떤 선이 있어, 붉은 색처럼 항상 붉을 수 있을까? 항상 푸르기만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같은 사람이라도 아이는 선하지만, 어른은 악할 수 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아이라 해도 자리를 양보할 땐 착하지만 컨닝을
천지만물도 마찬가지다. ‘천지’나 ‘만물’의 관계는 ‘우리’와 ‘나’, ‘나’의 관계처럼 그렇게 묘하게 이어져간다. 만물이 있어 정확히 나의 만물과 너의 만물이 있어 천지를 만든다. 부채가 존재하는 바람이 끊이지 않듯 천지가 존재하는 만물은 끊이지 않는다. 천지가 만물에 불인(不仁)한 이유다. 항상 네가 있어 우리는 ‘나’에게 불인(不仁)하며, 항상 ‘만물′’가 있어 천지는 만물에 불인한 것이다. 만물이 ‘좆밥’같고 너와 내가 ‘추구’(刍狗) 같다. 하지만 만물없는 천지가 없고 너와 내가 없는 우리는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찌 귀하지 않은 만물이 있고, 어찌 귀하지 않은 나와 내가 있을까? 천지만물은 이런 균형 속에 산다. 그래서 오래가는 것이다. 끝없이 나를 또 다른 나로 치환해 가는 것 천지가 장구한 도리요, ‘우리’의 장생지도다. 우리는 탄생을 통해 장생(長生)을 하는 것이지, 나와 나의 생에 머물며 장생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 하는 것은 너와 나에만 갇힌 탓이다. 있음 유(有)에만 머문 탓이다. 우리의 삶속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이 새로운 탄생으로 면면히 이어짐을 보라! 충일과 만족이 거기에 있다. 그래서 노자는 “天长地久;
‘나’와 ‘너’가 있어 ‘우리’다. 내가 없어도 네가 없어도 우리는 없다. 하지만 ‘너’는 또 하나의 ‘나’다. 또 하나의 나에게 나는 ‘너’가 된다. 우리 속에서 너는 또 하나의 ‘나’이며 나는 또 하나의 ‘너’다. 자연히 우리 속에서 언제든 나는 또 하나의 나로 치환될 수 있 언제든 너는 또 하나의 너로 치환될 수 있다. 우리 속에 나와 너는 없으면 안되는 귀하고 귀한 존재이면서 우리 속에 나나 너나 언제든 서로 치환되는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 속에 나와 너, 또 하나의 너와 나의 관계다.
뱃속의 똥을 보라. 살았느냐? 똥을 쌌다는 의미다. 먹으면 반드시 싸게 돼 있다. 우리는 그 것을 살았다, 살아 있다 한다. 살아 있다는 것 바로 ‘생’(生)이요, 생은 먹고 쌌다는 변화의 연속이다. 먹는다는 게 무엇인가? 빈 배를 채운다는 게다. 빈 배가 무엇이던가? 우리 속의 빈 곳이다. 우리 겉보다 길고 어두운 빈 곳이다. 그 빈 곳은 살아 있는 한 끝없이 채워져야 한다. 또 비워져야 한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곳 바로 우리 뱃속이다. 우리 뱃속은 너와 네가 살아 있는 한 음식이 들어오고, 찌꺼기, 똥이 돼 나오는 곳이다. 입이 입구요, 항문이 출구다. 생명의 출구도 있다. 정자가 들어가 새 생명이 돼 나오는 곳, 바로 ‘현빈의 문’(玄牝之門)이다. 항문에서 나오는 건 배설, 똥이요, 현빈의 문에서 나오는 건 탄생이다. 우리를 둘러싼 우주도 마찬가지다. 무엇인가의 빈 곳. 끝없이 무엇인가 들어와 무엇인가로 변해 나가는 곳, 우리의 빈 곳, 뱃속이며 우주다. 그 속 현빈의 문에서 나오는 게 ‘상생’(相生)이요, ‘탄생’(誕生)이다. 면면히 끝없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 “면면약존 용지불근”(绵绵若存,用之不勤) “끝없이 존재하며, 힘을 쓸요가 없다.” 다 개똥
어느 부채가 바람을 아끼던가? 부채가 움직이면, 바람이 이는 것을 어찌 부채가 바람을 아낄까? 부채만 있으면, 바람은 끝이 없거늘. 하지만 우린 모두가 안다. 부채가 귀한 건 바람 때문인 것을. 끝없이 일어난 바람인 것을. 사람은 바람만 귀히 여기지만, 결국 귀한 건 바람이 아니라 부채다. 끝없이 바람을 우리에게 불어 주는 그런 부채 노자의 도는 부채다. 끝없이 생명을 불어 일으키는 그런 부채다. 허이부굴, 동이유출(虚而不屈,动而愈出: 비었으나 끝이 없고, 움직일수록 더 많은 게 나온다.) 바람보다 귀한 게 바로 부채이듯 생명보다 귀한 게 바로 도다. 그 것이 귀한 것이다. 말 하면 뭘 하나, 귀한 걸 귀하다 알면 그 뿐인 것이다.
원하느냐? 그럼 참아라. 때를 기다리고, 네 능력이 다 차길 기다리고, 조건들이 성숙되길 기다려라. 그럼 원하기만 하면, 원하는 걸 얻는다. 만고의 진리다. 노자의 진리이기도 하다. 나의 조건은 내게 있는 것이지만, 일의 조건의 내겐 없는 것이다. 내게 있는 것으로 다하고, 없는 것으로도 다하는 것, ‘위무위, 무불치’(爲無爲, 無不治: 있고, 없음으로 위함은 다스지 못함이 없다.) 의 경지다. 위함의 완성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함께 만들어낸다.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위함’이 있어야 이뤄지는 것이다. 무위는 방치가 아니요, 포기는 더더욱 아니다. 무위는 너무나 위해서 위함마저 참는 것이다. ‘하지 않음으로서 위하는’ 단계다. 드러난 것만을 높이 세우지 말며, 감춰진 것들도 귀히 여길줄 알면, 삶이 본시 홀연히 있다가 없어지는 것임을, 삶이 본시 홀연히 이뤄졌다 흩어지는 것임을 보고 느끼고 깨닫게 된다. 보라, 흩어지지도 않을 것은 본래 이뤄지지도 않음을! 보라, 있지도 않았을 것은 본래 사라지지도 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