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치카이’(三七開) 중국에서 하나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인 공을 논할 때 흔히 쓰이는 방식이다. 3푼 정도의 잘못은 큰 공을 세우는 데 어쩔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의 마오쩌둥의 평가가 그랬다. 문화대혁명이라는 3푼의 잘못이 있지만, 인민들의 중국 국가를 세운 공이 7푼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평가 방식은 중국의 전통적인 방식이다. 대세를 흔들지 못하는 비율의 대표 3을 통해 나온 개념이 ‘천하 3분지계’다. 누구도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하도록 해서 천하의 안정을 찾자는 것이다. 하지만 류샤오치는 7보다 중요한 3을 이야기한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류샤오치는 이 논리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의 폐해를 언급한다. 바로 1962년 1월 25일부터 27일까지 열렸던 ‘칠천인대회’가 그 발언 장소다. 류샤오치는 현장 경험을 통해 일부 지역에서 보이는 대약진 운동의 폐해는 전체의 공을 뒤집을 정도의 잘못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재해는 하늘의 가뭄이 3푼이면, 7푼은 인재다. 경험부족이 큰 원인이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당 간부들이 자만했고 오만했다. 실사구시의 정신에 위배된 것이다” 류샤오치는 그러면서 펑더화이의
1962년 한 사건은 마오쩌둥의 마음에 류샤오치에 대한 의심의 싹을 키운다. 그 싹이 자라서 마오쩌둥의 한 때 ‘나의 친밀한 전우’였던 류사오치는 일순간에 ‘반동’, ‘배반자’로 내몰린다. 그 것은 돌이켜보면 류샤오치의 변치 않는 한 가지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인민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사실 정말 많은 초기 중국 공산당 멤버들은 한 가지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래 중국을 일으킬 사상은 ‘공산주의’여야 한다. 공산주의는 노동자들이 세상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변증법적 역사발전에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세상은 왕권과 교권의 싸움에서 귀족들과 연맹한 왕권이 교권을 눌렀고, 다시 왕권은 커져가는 귀족들의 권력을 젠틀맨, 소위 자본을 일궈낸 부르주아지 눌렀다. 부르주와의 자본은 사실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것인데, 노동자를 착취해 이익을 독식한 자본가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세상, 공산혁명이 일궈내는 세상이었다. 서구 유럽의 발전에서 노동자들은 중국에서 농민을 포함한 세력으로 변해 있었다.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중국에는 지주들의 착취를 당하는 농노와 소
달이 차고 기울 듯...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의 가까웠다 멀어진 행보 류샤오치는 그렇게 중국 공산당 정치무대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중국 공산당사에 가장 기이한 회의로 꼽히는 지난 1968년 10월 13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류샤오치의 사형 선고를 내리는 회의였다. 마오쩌둥의 주도에 단 한 명을 빼고는 그 누구도 반발을 하지 못한 회의였다. 하지만 본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둘을 가장 가까운 전우였다. 지난 1922년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안위안루 탄광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둘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 통치 시절 우파로 몰리는 고초를 함께 치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의 무력 투쟁 노선에 대대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쭌의회의에서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편을 들어 마오가 공산당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힘쓴 공이 있다. 좌경 교조주의에 맞서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은 생사를 함께한 동지였던 것이다. 류샤오치는 이 때 ‘공산당원 수양을 논하다’, ‘당내 투쟁을 논하다’ 등의 저작을 내놓으며 공산당의 좌경 교조주의를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류샤오치를 인정했다. 한 번은 보이보에게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에
1. 중국 현대사에 가장 이상한 당중앙 전체회의...운명의 제8기 12중전회 1968년 10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중국 건국 이래 가장 독특한 회의로 꼽힌다. 전체 인원의 반수도 참석하지 못한 역대 가장 적은 수의 중앙위원, 후보위원들의 회의였기 때문이다. 당대 12중전회에 참석 대상인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수는 총 87명이었다. 본래 97명이었으나 10명이 사망했다. 후보위원 수는 98명이었다. 그런데 8기 12중전회 참석 중앙위원수는 40명, 후보위원은 더 적은 19명에 불과했다. 어찌 보면 초라할 정도의 회의였다. 하지만 이 회의는 중국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어쩌면 가장 불행한 정치적 결정을 하는 회의였다. 중국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들은 이 회의에서 자신들 손으로 뽑았던 국가주석인 류샤오치(1898. 11. 24~1969. 11. 12)에 대한 탄핵을 의결한다. 정족수도 못채운 이 회의에서 중국 현대사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 결정 되는 것이다. 류샤오치가 국가 주석이 된 사연을 알면, 무슨 말인지 안다. 먼저 중국 1대 주석인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을 내려놓는 원인을 알
저우언라이(周恩来)를 향한 장칭(江青)의 공격은 집요했다. 저우언라이는 겨우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비서들은 줄줄이 낙마를 해야 했다. 첫 공격에 쓰러진 인물은 쉬밍(许明)이었다. 쉬밍은 1919년생이다. 본래 이름은 주위쥔(朱玉筠), 주핑(竹苹)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한 뒤 주로 저우언라이의 비서를 맡아왔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평소 모두가 좋아하는 밝은 성격이었지만, 모든 게 뒤바뀐 '문화대혁명'의 시기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장칭 일파의 분노를 사 사지로 몰리고 만다. 둘의 악연은 영화 '우쉰좐(武训传)'에서 시작된다. 문화대혁명 발발 직전 당시 장칭은 당 선전부 영화처 처장 직을 맡고 있었다. 중국의 모든 영화 등을 검열하는 직책이다. 쉬밍은 국무원 몫으로 가끔씩 영화 심의에 참여를 했다. '우쉰좐'이란 영화도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운명이 박복했다. 그 주인공은 청말의 실제 인물이다. 글을 못 배워 지주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만 했던 청년이다. 그게 한이 된 청년은 20년이 넘는 세월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모은다. 그 모은 돈을 들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학자를 찾아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위한 무료
문화대혁명이 초기 증명된 사실이 있다. 단 한가지 죄명 앞에서는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바로 '반역죄'였다. 누구든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 '반역죄'로 엮이면 바로 대중 앞에서 죄를 고하고 몰락했다. 문화혁명 초기 중국 공산당 권력의 2인자였던 류샤오치(刘少奇)가 그랬고, 덩샤오핑(邓小平)이 그랬다. 반역죄의 이름으로 엮을 수만 있으면 실제 그 죄가 크고 적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역죄는 장칭(江青) 등 문화혁명 주도 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죄로 엮기만 하면 수많은 홍위병들이 몰려가 자신들의 방법으로 응징을 했다. 거리를 개처럼 끌고 다니며 온갖 욕설을 했고 소위 '인민재판'을 했다. 굴욕을 견디지 못한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역죄가 왜 그리 무서운가? 2023년 오늘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신중국 건국 이전 국공 내전 시기였다. 이 시기 국민당은 공산당을 탄압하고 회유했다. 적지 않은 간부들이 한차례 정도는 잡힌 경력이 있고,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가짜 투항을 하기도 했다. 국민당은 주요 공산당 간부들 명의로 신문에 가짜 전향서를 발표하곤 했다.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유
"국방부 긴급 전화입니다.” 1966년 12월 중순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사무실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비서가 뛰어 들어와 보고를 한다. “국방부라니?” 놀란 저우언라이가 전화를 집는다. “지금 홍위병들이 국방부 건물로 쳐들어간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전화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긴급히 비서를 불렀다. “빨리 중앙문혁소조를 연결해!” 1966년 10월과 11월은 문화혁명의 주요 분수령이다. 장칭(江青)은 11월 초순 상하이에서 린뱌오(林彪) 등과 협력해 기존 상하이시 당위원회를 완전히 뒤집어엎는데 성공한다. 9일에는 상하이에 왕훙원(王洪文) 등을 수뇌로 하는 상하이혁명조반총사령부가 성립된다. 마오쩌둥(毛泽东)의 후계자로까지 성장하는 왕훙원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소위 문혁 사인방이 이때부터 형성된다. 왕훙원 등 사령부 대표들은 10일에는 베이징에 관련 보고를 하겠다고 기차를 탈취해 북상을 시도하다 혁명적 행동임을 인정받기로 하고 되돌아간다. 이제 상하이는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 손에 떨어진 것이다. 문혁 사인방의 조정을 받은 홍위병의 공격 대상은 이뿐이 아니었다. 진정한 목표는 베이징이었다. 그것도 총칼로 무장한 군대를 관리
1966월 12월 24일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 수많은 청년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고 있다. 68세의 한 노인이 초초한 듯 시간을 본다. 군중의 목소리가 더 커진다. 세계의 절반이 크리스마스 이브 분위기에 젖어 있을 무렵이다. 중국 베이징 체육관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문화혁명 사인방의 발호는 갈수록 심해졌다. 장칭(江青) 등 사인방은 당 중앙의 주요 간부들을 겨냥했다. 자신들과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을 하나씩 제거해갔다. 사인방의 총과 칼은 당중앙 중난하이(中南海) 밖에 있는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이었다. 사인방은 외부 홍위병을 독려해 말썽을 일으키고, 그것을 문제삼아 당중앙 간부들을 낙마시켰다. 물론 이 모든 것의 뒤에는 마오쩌둥(毛泽东)이 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는 그의 생애 가장 혹독한 10년을 겪게 된다. 그는 어떻게든 장칭 등이 제거하려 목표로 삼은 당간부들을 보호하려 했다. 사실 그게 자신을 위한 길이기도 했다. 모든 간부가 낙마를 하면 결국 저우언라이 자신도 낙마할 것이 뼌했다. 그렇다고 저우언라이 자신이 낙마하면서 남을 보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 역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저우언라이였다. 장칭
롄둥(联动)의 활동에 장칭(江青) 등 중앙문혁소조의 소위 4인방은 불안을 느꼈다. 어린 학생의 도전이라고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먼저 위기를 느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롄둥의 뿌리는 베이징시 규찰대였고, 시청 규찰대는 국무원의 지도를 따르는 곳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보다 안정을 추구했다. 지역의 안정에 힘을 쏟은 조직이 바로 롄둥이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12일 런민르바오(人民日报) 산하의 이론지 '훙치(红旗)'마저 이런 롄둥을 비판하고 나섰다. 모두 장칭 등 문혁 4인방이 뒤에서 힘을 쓴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고육지책을 썼다. 그는 롄둥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해 "이제 롄둥 스스로 조직을 해산할 때"라고 말한다. 롄둥을 향해 독수를 준비하고 있던 장칭의 마음을 꿰뚫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장칭이 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장칭 등은 12월 18일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홍위병 1, 2, 3 사령부 그리고 수도병단 대표 등을 접견한다. 그리고 이들 대학생 홍위병 조직이 고등학생 조직인 '롄둥' 조직을 진압하도록 선동한다. "반동에는 나이가 없다. 어린 학생들을 때려 잡아라!" 소위 중앙문혁의 명령이었다. 베이징이 다시 혼돈에
약법삼장의 20년 속박 속에 쌓인 장칭의 한은 문화대혁명으로 타올랐다. 린뱌오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까지 얻자 장칭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장칭(江青)은 이제 마오쩌둥(毛泽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 중국 정치무대로 나왔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마오쩌둥이 큰 힘이 됐다. 전국 수억 명의 홍위병에게 박수를 받았다. 홍위병들은 장칭을 향해 "장칭 동지를 배우자"고 환호했다. 배우 장칭으로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박수였다. 문화대혁명이 불타오르면서 장칭의 마성도 점차 극에 달했다. 점차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마두가 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사(史)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가 평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게 됐다고 전한다. 장칭의 극한의 마성에 맞서지는 못하고, 그녀의 정치적 폭정에 최대한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실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속에서 점차 이성을 되찾는 홍위병들이 나타난다. 처음 장칭은 이들에게 접근해 다시 문화대혁명의 마성에 빠뜨리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자 본격적인 탄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