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철저한 사실주의 글쓰기로 유명하다. 도박하는 장면을 쓰기 위해 먼저 도박을 연구해 공부했다. 현실의 모습을 작품의 품격으로 담아냈다. 나의 글쓰기는 진실을 담아내는 것, 그것에서 출발하고 그것에서 그친다.루쉰의 고백이다. 그의 글은 수많은 중국인의 가슴을 울렸다. 수억 명의 중국 청년들이 그의 글을 읽고 사회를 바꾸자는 혁명에 가담했다. 루쉰의 글은 일부 청년에겐 삶의 지표였고, 혁명 참여를 독려하는 대자보였으며, 삶을 규정하는 성스러운 경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루쉰도 피하지 못한 게 있다. 출판사와 원고료 다툼이다. 사실 어찌 보면, 원고료를 대척점으로 출판사와 작가는 오래전부터 고양이와 개의 관계처럼 본래 타고난 앙숙이었는지 모른다. 출판사는 어쨌든 원고료를 깎으려 했고, 작가는 어떻게든 원고료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했다. 1930년대 루쉰이 자주 거래하던 출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판사는 원고지의 글자를 일일이 다 세어, 원고비를 지급했다. 그 출판사는 그러면서 글자에 마침표 쉼표 등의 문장 부호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당대 인기 작가 루쉰의 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판사의 이런 태도에 루쉰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한 사회 조직의 내부 비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는 고발함은 누가 언제 발명했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한나라 때 발명됐다는 게 인정받는 설 중 하나다. 서한의 조광한(趙廣漢)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략 기원전 74년이다. 당시 지역 토호와 중앙 귀족이 손을 잡고 지역 행정을 농단하자, 조광한이 이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부 비리 척결에는 고발이 최고였던 셈이다. 그럼 조광한은 어떤 인물인가? 조광한은 한나라 선제(宣帝)를 옹립하는 일에 참여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진 뒤 선제 때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돼 강호(强豪) 원씨(原氏)와 저씨(褚氏) 등을 주살(誅殺)했다. 본시(本始) 2년(기원전 72) 조충국(趙充國) 등 5장군(將軍)을 따라 흉노(匈奴)를 격파했다. 다시 경조윤에 올랐는데,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법을 집행할 때 권귀(權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적도 많았다. 결국 나중에 일 때문에 정위사직(廷尉司直) 소망지(蕭望之)의 탄핵을 받아 요참(腰斬)을 당했다. 고발함은 그가 평원 원년(기원전 74년) 영천태수가 됐을 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영천 지역에는 토호들이 중앙 귀족과 결탁해 온갖 이
2022년 기준으로 중국 고속철도의 길이는 총 4만㎞가 넘는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거리다. 중국 철도 당국은 이를 2035년까지 7만㎞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중국을 '고속철의 왕국'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이라는 것도 단순히 보면, 중국과 유럽을 철도로 연결하자는 것이다. 이런 중국 철도의 시작은 어땠을까? 세계에서 가장 짧았다면 믿을 이가 몇이나 될까? 중국의 첫 철도는 운행 구간이 매우 짧았다. 중국 자료에 따르면 중국 첫 철도는 1865년 베이징 선무문 인근에 설치됐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500m였다. 버스 한 정거장 거리 정도였다. 중국 최초의 철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불과 며칠 뒤 바로 철거가 됐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이 볼 때 중국은 철도가 필수적인 나라였다. 국토가 넓기도 했지만, 사람이 많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기에 철도만큼 적절한 수단이 없었다. 막대한 수익을 안겨줄 거대한 철도 시장이 나타나자 열강들은 서로 먼저 청나라의 철도 산업을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웬걸? 청나라 관료들은 철도에 조금
‘온고지신(溫古知新)’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 공자의 말이다. 논어 위정 편에 나온다. 정말 많은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웬 공자왈 맹자왈? 중국의 식품 위생 관리의 연원을 논하기 위해서다. 요즘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중국은 ‘가짜 달걀’, ‘가짜 식용유’ 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거리에서 즐겨 먹었던 양 꼬치는 양고기가 아닌 경우가 많았다. 개고기는 물론 죽은 쥐의 고기를 화학약품으로 부드럽게 처리해 팔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온고지신과는 무슨 연관일까? 중국 고대 왕조들의 식품 위생 관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중국 왕조들 가운데 식품 위생 관리에 대한 규정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주나라 때 일이다.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에서 기원전 771년까지 존재했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3000년 전의 일인 셈이다. 예기(礼记)에 따르면 주나라는 제철이 아닌 과일이나 식물을 시장에서 팔지 못하도록 했다. 무분별한 사냥을 막기 위해 사냥철과 사냥 대상을 정해 놓고 때가 아니면 시장에서 거래를 허락하지 않았다. 시대를 건너 당나라에 이르러서 규정은 더욱 엄격해진다. 당나라는 618년 이연(李淵)이
중국 문화의 특징으로 꼽는 게 '담벼락 문화'다. 마을, 무리에 속해 강한 소속감을 가지는 문화를 의미한다. 내부의 결속은 외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중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모든 문화를 용광로처럼 흡수해 발전해 나가면서도 분명히 존재했던 게 바로 '담벼락 문화'다. 담을 쌓는 문화는 오늘날 중국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아파트 단지마다 서로 철창을 둘러 싸 이웃 단지와 구별되게 한다. 한국 등 다른 나라도 물론 없지는 않지만 중국의 이 담벼락 문화는 세계 그 어느 곳보다 강해 보인다. 어디서 이런 문화가 유래했을까? 중국의 마을 어귀마다 세워졌던 패방(牌坊, 패루<牌楼>)를 이해하면 중국의 이런 담벼락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패방은 쉽게 말하면 문짝 없는 대형 문이다. 마을의 입구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지금도 차이나타운에 가면 쉽게 발견하게 된다. 패방이 마을 입구의 상징이 된 것은 수당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나라 때 도성을 구축하면서 정방형으로 마을을 나눠 이 한 단위를 리(里)라 불렀고, 이 제도는 당나라로 이어졌다. 다만 리가 방(坊)으로 변했을 뿐이다. 수와 당은 각 리, 방마다 담을 두르고 문을 만들어 관리했다. 시간에 따라…
본래 근본적 문제는 뿌리가 깊고, 쉽게 해결되지 않는 법이다. 부국강국의 근본은 인재요, 교육이다. 한 명의 성군이 나와도 다양한 인재가 두루 퍼져 있지 않으면 대업을 이루기 어려운 법이다. 많은 가난한 나라가 모두 답을 알지만 실행하지 못한다.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장 급하게 해결할 게 너무 많다는 게 가난하고 문제가 많은 나라 지도자들의 생각이다. 본래 눈앞의 일이 급한 법이다. 자기 눈에 불이 나면 세상이 온통 불만 보인다. 정말 하지만, 그런 게 답일까? 눈앞에 불을 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모두가 답을 안다. 아니다. 정말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는데 대가가 싸고, 시간이 들지 않는다면 그게 제대로 된 치료법일까? 역시 아니다. 역사가 보여준다. 청나라 역시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가 있었다. 황제가 나서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나라보다 만주족 황가의 안녕을 먼저 생각한 어머니 손에 좌절하고 만다. 그런 상황에서 부국강국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한 사람이 있다. 중국인이 아니라 영국인 선교사였다. 중국 이름이 이제마태(李提摩太)인 티모시 리처드(Timothy Richard, 1845~1919)로 영국 웨일스의 침례교 가
중국의 개혁개방은 공식적으로 1978년 12월 제11기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에서 시작됐다. 그 뒤 반년이 지난 1979년 5월, 개혁개방과 함께 복간된 영화 잡지 '대중영화(大众电影)' 제5호에 '신데렐라'를 영화화한 영국 영화 '수정구두와 장미'가 소개된다. 내용은 별 것 아닌데 뒷표지에 실린 영화 스틸 컷이 문제가 된다. 화려한 궁전에서 신레렐라와 왕자가 키스하는 모습이 실린 것이다. 과거 극좌가 판을 치던 문화대혁명 시대 중국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여론의 풍파가 일었다. 신장위구르의 한 건설병단의 선전관은 흥분해 격렬한 논조로 이렇게 썼다.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서 당장 시급한 일이 남녀의 키스를 허락하는 일이란 말인가? 마오 주석이 이끈 사회주의혁명국가에서 이런 사진을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은 이미 대세였고 잡지사에 쏟아진 1만1200여 통 편지의 대부분은 키스 스틸 컷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이어 같은 해 중국 자체 제작 영화에서도 처음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생활의 떨림(生活的颤音)'이란 영화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해 몰리는 관객의 안전을 우려해 소방관과 경찰들이 비상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오늘날의 중국을 탄생시킨 인물이 바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이다. 덩샤오핑은 언제나 현장을 중시했다. "사무실에 앉아 보고를 받지만 말고 현장에 가 확인한 후 판단을 내리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이를 몸소 실천해 보여줬다. 지난 1974년 4월의 일이다. 당시 덩샤오핑은 부총리로 재직하면서 중국을 대표해 유엔 총회 제6차 특별회의 참석차 미국 뉴욕을 방문했다. 뉴욕은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도시로 그 중심지는 당시에도 금융가 월스트리트였다. 반면 당시 중국은 1966년 시작된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1976년 종료)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였다. 당시 중국 대표단의 눈에 월스트리트는 말 그대로 '역사적 반동'의 무대였다. 그런 반동의 중심지에서 중국 대표단은 모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빡빡한 회의 일정을 마치고 맞이한 휴일인 4월 13일(토요일), 덩샤오핑은 중국 대표단원들에게 월스트리트에 가보자는 제안을 한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니 이 민감한 시기에 하필 반동의 중심지를 가다니? 그러나 덩샤오핑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우리는 반드시 월스트리트에 가봐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서방 세계
중국 후한시대 환관 채륜(蔡倫)이 개발한 가볍고 저렴한 종이(紙)는 중국 역사에서 문무(文武)의 발전에 모두 기여하게 된다. 종이와 학문의 뗄 수 없는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황이고, 무(武)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이 갑옷이 대표적인 파생 상품으로 꼽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고대 병사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여러 겹의 종이에 무명이나 비단 등 천을 덧대 아교, 송진 등 접착제로 고착시킨 갑옷이었다. 종이 갑옷은 장점이 많았다. 철갑(鐵甲)에 비해 제작 비용이 훨씬 적었다. 철갑에 비해 무게가 적게 나가 전장에서 재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유용했다. 특히 물에 빠지는 경우에도 가라앉지 않아 수군에게 적합했다. 한 마디로 저비용 고효율 갑옷이었던 셈이다. 옛 중국 기록에도 그 나름 효과가 컸다고 나온다. 송나라 인종 때 발간된 국방백서인 ’무경총요(武经总要)‘에 따르면 당시 갑옷은 철, 가죽, 종이 등 세 가지 재료로 제작됐는데 일반 병사들이 착용한 종이 갑옷이 실제 전투에서 믿음직스러운 기능을 발휘했다고 기록돼 있다. 종이 갑옷에 대한 언급은 ’무경총요‘에 앞서 당나라 때도 엿보인다. 당 의종 때 한 절도사가 "종이로 갑옷을…
중국국가는 짧다. 1절이 전부다. 내용도 명료하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发出最后的吼声。 起来! 起来! 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前进! 冒着敌人的炮火前进! 前进! 前进! 前进!进! 일어나라 ! (깨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여 !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만리장성을 만들자 ! 중화민족이 가장 위태로운 이 때에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최후의 함성이 터져나오리!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적의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전진 ! 전진 ! 전진 ! 나아가자 ! 중국 국가의 별칭은 '의용군진행곡(义勇军进行曲)'이다. 1935년에 상하이에서 개봉된 영화 '풍운아녀(风云儿女)'의 주제곡, 즉 OST이다. 가사는 한 눈에 봐도 전투적이고 비장하다. 곡은 힘차고 울림이 장엄하다. 이런 내용과 느낌의 주제곡이 삽입된 영화라면 스토리가 어떠할지 감이 잡힌다. 영화가 개봉됐던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영화와 주제곡의 메시지가 더 명료해진다. 당시 상하이는 이미 영국,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행정권과 치외법권이 보장된 조계지가 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