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있어 끝이 있고, 끝이 있어 시작이 있다. 끊을 절(絶) “끊는다.” “끝낸다.” 모두가 무엇인가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의미다. 진행되는 게 있어 가능한 일이다. “버린다.” “치운다.” 역시 무엇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있어야 없을 수 있고, 없어야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있도록 하는 법이며, 또 없도록 하는 법이기도 하다. 생이란 있고, 없고의 연속인 것이다. 한자 속에는 일찌감치 이 같은 삶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 있다는 의미가 있고나서 비로소 끝내다는 의미가 있다. 갑골자 절(絶)에 담긴 생각이다. 묶인 끈을 칼로 끊어 내는 모습이다. 본래 묶인 끈은 거래 관계를 기록한 수다. 그 거래가 끝나 끈을 끊어 내는 게 바로 절이다. 절(絶)은 한 거래의 끝이며, 비로소 새로운 끈에 거래를 맺어야 함을, 새 거래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마치는 게 나쁜 게 아니요. 새로운 시작이 두렵기만 한 거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끝내며 어떻게 시작하느냐다. 그래서 제일 높은 것을 절정(絶頂)이라 하고 가장 큰 것을 절대(絶大)라 했다. 가장 멋있는 것을 절경(絶景)이라 하고 당대 제일을 절세(絶世)라 했다. 하지만 희망의 끝을 절망(絶望)이라 했고
빛난다는 것은 자신을 감추는 일이다. 빛은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언제가 밝은 빛 그 뒤에 숨어 빛이 닿는 모든 것을 비추어 드러내고 빛나도록 하는 것이다. 빛의 밝음은 언제나 그 빛이 닿는 곳에 있지, 그 빛이 나오는 곳에 있지 않다. 자신을 감추고 남을 드러내는 것 바로 빛의 본질이다. 한자를 만든 동양에서는 진작에 빛의 본질을 꿰뚫었다. 갑골자에 그 생각이 잘 드러난다. 광(光)자는 불을 쬐는 사람의 모습이다. 앉은 사람의 머리 위로 불길이 보인다. 따뜻함과 밝음이 동시에 느껴진다. 빛이 있고 사람이 있어 그제야 느껴지는 것이다. 빛나는 모든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비춰 드러나게 할뿐이다. 그래서 빛은 그 것을 느끼고 비춰져 빛나는 게 있어 비로소 빛의 존재가 빛나는 것이다. “毕竟西湖六月中,风光不与四时同。 接天莲叶无穷碧,映日荷花别样红。” (필경서호육월중, 풍광부여사시동. 접천연엽무궁벽, 영일하화별양홍.) “아 6월의 서호로구나, 그 빛이 남 다르다네. 하늘가 연잎 푸르기만 하고 비춰진 연꽃 붉디 붉구나“ 송 양만리의 시다. 빛은 비춰서 빛이 나게 하는 것이다.
능력은 말로 증명하는 게 아니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능력이 있다는 것은 결국 진행된 과정과 결과가 이야기해주는 것이지 계획의 설계가 말해는 주는 게 아니다. 물론 당연히 계획의 설계가 좋아야 과정과 결과도 좋다. 하지만 어떤 계획도 실행할 수 없고 실행과정에서 생길 변수에 제대로 응할 수 없다면 그 결과가 좋을 수 없다. 결과없는 계획은 좋은 계획일 수 없는 것이다. 능의 이처럼 아주 실질적인 것이다. 능의 갑골문자가 그 의미를 보여준다. 능의 갑골자는 무서운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나무를 잘 타는 거대한 동물이다. 바로 곰의 모습이다. 곰의 이빨은 장식이 아니고 발톱은 멋이 아니다. 이빨로 물어뜯으며 발톱은 찢어 낸다. 능력은 그런 곰의 힘이다. 물어뜯고 찢어 내는 그런 힘이다. 실행되지 않는 모든 계획은 그저 장식이고 멋일 뿐이다.
감출 습(襲) 정말 귀한 것은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 귀한 것을 귀하게 쓸 수 있다. 귀한 것을 함부로 드러내서는 지키기도 힘들뿐이다. 노자의 생각이다. 꼭 필요할 때 내놓는 게 귀한 것을 귀하게 쓰는 방법이다. 사물도 그렇지만, 사람의 지혜가 특히 그렇다. 정말 좋은 지혜는 꼭 필요할 때 내놓는 것이다. 흔히 지혜로운 이를 ‘현명(賢明)하다’ 한다. 말 그대로 지혜가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현명해도 꼭 필요할 때 지혜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 지혜가 아무리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진정한 지혜는 평소 지혜로운 게 아니라 꼭 필요할 때 제시되는 지혜다. 노자는 그런 지혜를 ‘습명’(襲明)이라 했다. 현명에 상대하는 게 바로 습명이다. 평소 감추고 있지만, 꼭 필요할 때 드러내고 쓰이는 지혜다. 쓰여진 습(襲)자의 본의를 알면 이해가 쉽다. 갑골자 습자는 사람 이 팔 뒤로 무기를 감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무기를 감췄다가 필요할 때 내려치는 게 바로 습(襲)이다. 갑골자 습에는 숨어서 공격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에 앞서 있는 게 쓸 무기를 감추고 있다는 뜻도 있다. 용(龍)아래 옷 의(衣)는 갑골자 모양이 이어지다 보니 만들어진 글자다.
다 갖추면 누가 봐도 좋다. 그게 현(賢)이다. 집안도 좋고, 타고난 재능도 좋고, 말 그대로 금수저가 바로 ‘현’(賢)이다. 역사 이래 모두가 그래서 ‘현’하기를 좋아한다. 갑골자 현은 글자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그렇게 좋은 뜻이었다. 노예, 손재주, 재물 모두를 갖춘 게 현이다. 갑골자 현에는 아직 재물은 없었다. 신하 신(臣)에 또 우(又)만 있었다. 여기서 우는 ‘장악’, ‘관장’(管掌)하다는 뜻으로 풀리고 있다. 그래서 신하를 관장하는 인사 업무 혹은 손의 뜻을 강조해 ‘재능’이란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신하와 재능을 갖춘 뜻을 ‘현’으로 보기도 한다. 훗날 금문에 와서 재물을 뜻하는 조개 패(貝)가 붙었다. 관리(官吏)를 뜻하는 현에 재물이 붙은 것은 참 묘하다. 돌이켜보면, 고래(古來)로 동서양에서 나랏일을 하는 관리는 부자였다. 왜 그럴까? 똑똑한 건 인정하는 데, 그래도 왜 관리가 부자인지는 역사적 의문이다. 고래로 동서양 어느 시대이든 관리의 녹봉이 부자가 될 정도로 많은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다시 그래서 참 묘한 게 현이란 글자다. 모두가 현과 같은 관리를 싫어하지만, 모두가 현과 같은 상태를 좋아만 한다. 유일하게 현을 싫어했던
돈 싫은 사람은 없다. 돈을 벌기 싫거나, 관리하기 싫을 수 있어도 돈 자체가 싫은 사람은 없다. 돈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한다. 돈이 많아 뭐든 풍족하게 다 갖는 이들이 부자다. 하지만 정말 그게 부자일까? 가진 게 많으면 그럼 정말 부자일까? 한국 제일의 부자 이병철 회장이 남긴 임종 전의 편지가 유명하다. 소위 ‘이병철의 24개 질문’이다. 하나같이 근본적인 질문이다. 쉽게 ‘우린 왜 사냐’는 질문들이다. 그중 부자에 대한 질문이 2개 있다. 하나는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또 다른 하나는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24개 질문 중 15번째와 16번째 질문, 전자는 부귀 후자는 부자에 대한 질문이다. 사실 한자 세계의 답을 너무도 간단하다. 한자의 세계에서 부(富)는 물질에 있는 게 아니다. 한자의 세계에서 부(富)는 개인의 마음속에 있다. 어떻게 마음 속에 있을까? 한자 부(富)는 춘추전국 시대 등장한다. 갑골처럼, 동물의 뼈에 새겨진 아니라, 소위 청동기에 각인 돼 있다. 자형은 집 안에 술
세상 모두가 바라는 게 있다. 뭘까? 금은보화, 명예, 직위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한 번에 갖게 하는 게 있다. 뭘까? 바로 ‘성공’(成功)이다. 성공은 그 순간 원하는 걸 이룬다. 하지만 정말 그게 성공일까? 성공이란 우리가 원하는 걸 이루는 것일까? 대부분 경우가 그렇듯 사람들은 결과만 보길 좋아한다. 성공을 하면 그 결과가 원하는 걸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만 안다고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성공이란 게 뭔지 정확히 알아야 비로소 성공을 할 수 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공(功)을 이루는 것이다. 그럼 공이란 무엇인가? 공이라는 한자는 비교적 일찌감치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갑골문자에 나온 공(工)과 력(力)이 만든 회의자 겸 형성자인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상 등장은 소전체에서 나온다. 소전은 진나라의 글씨다. 자형은 단순하지만, 그 의미가 깊고 깊은 때문 아닌가 싶다. 공(功)은 인간 존재적 가치의 개념이다. 기구를 써 힘, 노동(힘과 시간)을 더해 만들어진 부가가치에 대한 첫 개념이다. 자연이 주는 가치가 아닌 인간이 스스로 만든 가치다. 세상 만물 가운데 자연을 빼고 세상에 부가가치를 만드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다
내가 강함은 어찌 아는가? 남을 눌러서 안다. 남에게 나의 말을 강제하며 안다. 내가 뜻이 있음을 어찌 아는가? 그치지 않아 안다.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뜻한 바를 다하는 순간, 내가 뜻한 바를 안다. 내 총명함은 어찌 아는가? 남의 우둔함을 보고 안다. 남의 잘못이 보이고, 내가 고칠 수 있을 때 비로서 ‘총명 하구나’ 안다. 내가 부유함은 어찌 아는가? 역시 마찬가지다. 남을 보고 안다. 남보다 재물을 많은 것을 보고, 비로서 ‘부유 하구나’ 안다. 하지만 정말 아는 것인가? 정말 강한 건인가? 정말 뜻이 있음인가? 정말 총명한 것인가? 남을 통해야 비로서 아는 게 정말 아는 것인가? 남이 바뀌면, 답도 바뀌는 게 정말 정답인 것인가? 그럼 왜 내가 강한데,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고, 내가 총명한데 왜 나보다 더 총명한 사람이 있는가? 결국 내가 약하고, 우둔한 것 아닌가? 또 그럼 뜻이 분명한 데 왜 내 뜻은 영원히 그치지 못하는 것인가? 욕망이요, 집착이지, 그게 뜻인가? 또 그럼 왜 내가 부유한데 항상 나 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있가. 그 앞에 왜 나는 항상 모자라기만 한 것인가? 도대체 어찌해야, 진정 강함을 알고, 어찌해야, 진정 총명함을
“나눔은 부유(富裕)해서 하는 게 아니다. 족(足)하기에 하는 것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란 가난에 만족하는 삶이 아니라, 맞춰 나눌 수 있어 즐겁다는 것이다.” 가난은 행복의 조건이 아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가난한데도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가난해서 행복하다는 건 거짓말, 거짓말이다. 가난한 자의 자기합리화, 자기변명일 뿐이다. 흔히 이런 이들의 행복이란, 가난했던 시절 한 방에서 모든 가족이 자야했고 그래서 불편은 했지만, 가족끼리 더 아끼고 더 이해하고 사랑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일자리에서 밤늦게 귀가하신 아버지가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에 혼자 앉아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뒷모습이 안타깝고 아련하다. 그 시절 가난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런데, 그럼 지금은? 돈이 좀 있는데, 자식들은 스마트폰만 끼고 살고 밖으로만 나다니고 … 마치 가난이 행복을 준양, 행복의 조건인양 이야기한다. 자기합리화, 자기변명일 뿐이다. 그저 행복으로 포장돼 남은 추억일 뿐이다. “세상이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마음 속 주문이 만든 기억의 재구성일 뿐이다. 나눔의 빈(貧)을 가난할 빈(貧)으로 치환하면서 생긴 자기변명이다. 한자
함께한다는 건 나누는 것이다. 그냥 나눠주는 게 아니라 양 손으로 공손히 바치는 것이다. 함께한다는 건 받는 것이다. 그냥 받는 게 아니라 양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드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주고받을 때 우린 함께하는 것이다. 한 손을 내민 것을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을 내민 것을 한 손으로 받으면 최소한 ‘대등한 함께’가 아니다. 한 손으로 주고받는 것 역시 ‘존중받는 함께’가 아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같이 두 손으로 공손히 그 게 바로 ‘대등한 함께’다. 갑골자의 시대부터 이어진 ‘함께’의 정신이다. 갑골자의 함께할 공(共)이 전하는 정신이다. 갑골자에 공은 두 손으로 공손히 뭔가를 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뭔가를 받아든 것이다. 함께하는 것은 공손히 뭔가를 주거나 뭔가를 받는 것이다. 공손히 받는 만큼 주는 것도 공손한 게 바로 ‘함께할’ 공이다. 준다는 게 받는만큼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일 바보가 베풀고 욕을 먹는 이다. 간단히 한 손으로 줬기 때문이다. 받기는 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탓이다. 두 손으로 함께하는 마음이 바로 공손할 공(恭)이다. 공(共) 아래 마음 심(心)이 있다. 바로 삼가는 마음이다. 예(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