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한다는 건 나누는 것이다. 그냥 나눠주는 게 아니라 양 손으로 공손히 바치는 것이다. 함께한다는 건 받는 것이다. 그냥 받는 게 아니라 양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드는 것이다. 그런 자세로 주고받을 때 우린 함께하는 것이다. 한 손을 내민 것을 두 손으로 받고 두 손을 내민 것을 한 손으로 받으면 최소한 ‘대등한 함께’가 아니다. 한 손으로 주고받는 것 역시 ‘존중받는 함께’가 아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같이 두 손으로 공손히 그 게 바로 ‘대등한 함께’다. 갑골자의 시대부터 이어진 ‘함께’의 정신이다. 갑골자의 함께할 공(共)이 전하는 정신이다. 갑골자에 공은 두 손으로 공손히 뭔가를 전하는 것이다. 또 다른 면에서 두 손으로 공손히 뭔가를 받아든 것이다. 함께하는 것은 공손히 뭔가를 주거나 뭔가를 받는 것이다. 공손히 받는 만큼 주는 것도 공손한 게 바로 ‘함께할’ 공이다. 준다는 게 받는만큼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제일 바보가 베풀고 욕을 먹는 이다. 간단히 한 손으로 줬기 때문이다. 받기는 했지만 마음이 불편한 탓이다. 두 손으로 함께하는 마음이 바로 공손할 공(恭)이다. 공(共) 아래 마음 심(心)이 있다. 바로 삼가는 마음이다. 예(禮)
공평의 공(公)은 나눔에서 나온 개념이다. 갑골문자부터 나온다. 그만큼 공평은 인류 초기부터 그토록 중요했던 일인 것이다. 갑골자는 팔(八) 아래 입 구(口)가 있는 모습이다. 어떤 글자는 입 구(口)가 사 또는 모(厶)로 읽는 부호로 쓰이기도 했다. 사 사(厶)는 사전에 물건을 둘러싸 자기 것으로 하려는 것이라 설명돼 있다. 하지만 여성의 음부를 상징했다는 설이 개인적으로 더 신뢰가 간다. 어쨌든 공(公)은 나눔이다. 공평은 나눔이 있고서 비로소 중요해지는 개념인 것이다. 나눔은 무엇인가? 무소유의 끝이요. 사유(私有)의 시작이다. 모두의 것을 나누면서 비로서 개인의 것이 생기는 것이다. 나눔이 있고서 비로소 사유가 있는 것이다.. 공평의 공은 사유화가 있어야 중요해진다. 사실 사(私)도 마찬가지다. 사(私) 역시 나눔의 문제다. 사는 공(公)과 대단히 유사하다. 둘 모두가 전체의 것을 사유화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다만 사(私)는 벼, 또는 그 씨를 은밀한 곳에 감춰 갖는 것이요, 공은 모두가 보는 곳에서 모두가 알게 나눈 것이다. 이제야 갑골시대부터 인류에게 중요했던 공평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공평은 혼자 몰래 갖는 사(私)와 달리, 모두의 앞에
생각은 심장에서 머리끝이다. 그 길이는 화성과 지구보다 길다. 수많은 것으로 그 길이 채워진다. 생각이 많은 이유다. 마음이 답답한 이유다. 생각은 심장에서 머리끝까지 바로 이어질 때 맑다. 봄날의 따뜻한 햇살 속을 걷듯 서둘지 않아도 발걸음이 가볍고 빠르며 마음이 순창(順暢)해 진다. 금문의 생각 사(思)가 전하는 도리(道理)다. 생각이란 심장에서 머리끝이 이어지는 것이라는 게다. 생각의 길에 장애가 많은 게 어리석음이다. 금문에 등장하는 어리석을 우(愚)는 심장에서 머리로 가는 길이 막혀 있다. 가슴에서 싹튼 것이 뭔가에 가로막혀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생각이 이어지지 않고 자꾸 끊어지며 잡념에 빠지는 게 바로 어리석음이다. 대학에 생각이 바르지 않으면 들어도 듣지 못하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고 보고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사물의 진정한 격(格)을 구분하지 못하니, 본말이 뒤집히고 진정한 결실을 구하지 못한다. 내가 진정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대로 사물의 결과가 나오는 것인데 스스로 똑똑하다는 많은 이들은 사물의 결과로 증명받기보다 안다는 것만 인정받으려 한다. 결과는 다툼이다. 다투다가 결실을 잃는다. 둘 다 아는 대로 이뤄지지 않으니,
지혜롭고 싶은가? 슬기롭고 싶은가? 지혜의 본질이 뭔지 알아야 한다. 지혜의 본질은 하나다. 지혜는 정보다. 정보의 양이 지혜의 깊이다. 정보가 많을수록 정보가 다양할수록 지혜의 폭도 지혜의 깊이도 넓고 깊어진다. 세상의 정보는 눈과 귀로 접한다. 동영상의 시대는 눈이지만, 과거 고대에는 귀였다. 귀를 열어 놓아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게 바로 지혜의 시작이었다. 기억력이 좋다, 영리하다는 뜻의 총명(聰明), 그 중에서도 총(聰)의 시작은 귀(耳)에 있다. 갑골자에서 총(聰)은 귀와 생각 사(思)의 회의다. 사(思)는 심장에서 머리를 말한다. 사(思) 위 부분은 신생아 머리의 열린 부분을 형상화한 부호다. 신생아의 대천문을 말한다. 중국 바이두에서는 총(聰)의 생각 사(思)부분을 그냥 귀로 마음의 창을 여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 역시 멋진 해석이다 싶다. 듣고 생각하는 게 총(聰)이라는 해석이다. 귀로 마음의 창문을 연다는 해석과 그 본의를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혜는 남의 말을 듣는 데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말을 놓고 생각하는 데 지혜의 완성이 있다. 듣고 생각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 때 귀로 들은 데이터가 정보로 쌓이고 정보가 쌓이는 게 바로 지혜가
강하다는 건 활을 들고 말하는 것이다. 말에 앞서 활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을 수밖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영화 대부(代父) 속 대부가 상대방 머리에 총을 겨누고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하듯 활을 겨누고 말을 하는 게 바로 강(强)이다. 갑골자 강이 보여주는 도리다. 입구 위에 활이 보인다. 금문에 와서 오늘날 강(强)처럼 충(蟲)이 붙는다. 갑골자 강(强)이 클 홍(弘)으로 변한 뒤 그 아래 파충류를 의미하는 충(蟲)이 붙었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다. 큰 도마뱀이 혹 거대한 곤충이 보여주는 공포가 바로 강(强)인 것이다. 갑골이나 금문이나 강하다는 건 한 의미다. 바로 말이 말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활로 힘으로 말을 이루는 것이다. 중국 고대 ‘바르다’는 의미의 정(正)이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듯 강하다는 건 ‘크라토스의 로고스’(권력의 말) 힘으로 이뤄지는 말이다.
마음 곁에는 뭐든 함부로 둬서는 안된다. 대부분이 그 마음을 두렵게 한다. 한자의 생각이다. 겁을 내다는 뜻의 대부분 한자는 마음 심(心) 곁에 뜻하지 않는 물건을 둘 때다. 률(慄)이 그렇고 구(懼)가 그렇고 우(懮)가 그렇고 포(怖)가 그렇다. 물론 곁에 둬서 좋은 것도 있다. 대체로 자신과 연관된 것들이다. 항상 긍(亘)이거나 나와 가족(兄, 弟) 등 합(合)당한 것들이다. 마음의 위에도 마찬가지다. 마음 위에 뭐든 함부로 두면,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이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마음의 중심이 둘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 둘로 나뉘면 그게 근심의 시작이요, 몸의 병(病)이 된다. 그 도리를 적은 한자가 바로 근심 환(患)이다. 마음 위에 중심이 둘인 모습이다. 금문에 등장해 마음의 병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마음의 중심이 하나인 충(忠)도 힘든데 그 충이 둘이니 얼마나 힘들 것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게 마음의 중심이 두 개인 경우다. 사랑으로 치면 삼각관계다. 두 사람 모두 좋은데 어쩌란 말인가. 그저 근심만 쌓일 뿐이다. 해결책은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마음 중심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마음을 다 잡을 때 대부분 근심은 스스로 사라지
중심(中心)은 가운데 마음이다. 사전에 중심(中心)은 가운데요, 중심(重心)은 무게의 가운데라 했다. 사실 중심(中心)이나 중심(重心)이나 다르지 않다. 다만 실제 찍히는 점(点)이 다를 수 있다. 평균과 중간이 다른 이치다. 길이의 중심(中心)과 무게의 중심(重心)은 개념상 비슷하지만 실제 점(占), 점한 곳이 다른 경우가 많다. 길이의 중심(中心)은 그 길이의 반이 중간이다. 하지만 무게의 중심(重心)은 길이의 반이 반드시 그 중심(重心)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중심(中心)은 길이의 중심(中心)과 무게의 중심(重心)이 더해진 개념이어야 한다. 진정한 마음의 중심(中心)이 바로 충(忠)이다. 충은 마음의 중심 그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복잡한 개념 탓에 한자 충(忠)은 갑골자가 아니라 금문에서 나온다. 마음에 가운데 중심(中心)이 선 모습이다. 마음의 중심을 잡는 게 바로 충(忠)인 것이다. 그래서 치우쳐 편협하지 않고 한 가지 일에 마음 씀씀이를 다하는 것, 그게 충(忠)의 본의(本意)다. 중세 봉건왕조가 충(忠)의 대상을 군주(君主)로, 상급자로 고착시키면서 뜻이 변했지만, 본래 충(忠)이란 스스로를 가꾸려는, 즉 수양(修養)하는 개인이 사
사람을 볼까? 자리를 볼까? 성인(成人)의 만남, 사회 교류는 자리를 통해 이뤄진다. 자리에 앉은 이를 찾아 만나고 자리에 앉아 찾아온 이들을 만난다. 자리란 무엇일까? 눈에 보이는 건 사무실 안 책상 하나 의자 하나다. 그 옛날엔 그저 바닥 위의 두터운 방석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그 의자 뒤 그 방석 위에 따르는 권한과 의무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보는 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권한과 의무다. 아니 권한이다. 사람이 자리를, 자리의 앉은 이를 찾는 건 그 권한 때문이다. 의자가 그냥 의자가 아니요. 방석이 그냥 방석이 아니게 되는 이유다. 자리가 그냥 방석이 아닌 이유다. 그런 방석에서 사람과 사람이 마주 한 것이 바로 자리에 앉는 것이다. 한자 좌(坐)의 변천은 이 같은 세속의 도리(道理)를 전한다. 본래 갑골자 시대 앉는다는 것은 그저 순수하게 방석에 앉는 것이었다. 나라의 틀이 잡히고 권한과 의무가 생기며 앉을 좌(坐)는 동등한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꼴이 됐다. 사실 자리를 보고 사람을 만나는 건 속세의 상리요, 도리다. 속세를 사는 한 군자나 소인이나 다름이 없다. 차이는 만나고 나서 비로소 생긴다. 소인은 자리만 보고 군자는…
농사를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을 고르는 일이고 건물을 짓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돌 고른 땅을 다지는 일이다. 세상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이 도리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초요, 기본이다. 삶과 인생의 공리다. “모든 일이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있고서야 비로소 끝이 있다. 모든 일이 본이 있고, 본이 있고서야 비로소 말이 있다.” 대학의 도리다. 자연의 순리다. 땅이 고르고 단단해야 그 위에 무엇이든 지을 수 있다. 심지어 어느 나무도 터를 잡지 않고는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인간의 삶은 더욱 그렇다. 삶의 터를 잡아야 삶이 편해지는 것이다. 삶의 터는 어떻게 내리는가? 한자 기(基)가 그림으로 그 방식을 전한다. 땅 위를 돌을 쌓아 만든 틀로 내려치는 것이다. 때리고 때려, 다지고 다져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삶의 기초도 마찬가지다. 기본 틀을 되풀이 해 익히고 익히는 것이다. 다지고 다져 능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면 익혀야 한다. 그 배움이 다져지고, 익숙해져 기초가 될 때 비로서 삶이 편해진다. 바로 알면 실행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의 경지다.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
기쁘고 슬프고 모두가 실은 하나다. 정(情)이다. 정 하나의 서로 다른 양 끝이다. 관계가 있고서야 정도 쌓이고 정이 쌓여야 기쁘기도 슬프기도 한 것이다. 만남의 시작은 본래 고기 한 점이다. 같이 나누는 고기 한 점, 같이 먹은 한 상 차림 바로 모든 관심의 시작이요, 관계의 시작이다. 정(情)의 시작이다. 정은 마음이 항상 푸른 것이다. 관심이 생기고서야 상대방이 내 마음 속에서 항상 푸른 것이다. 갑골자, 아주 오랜 사람의 글자 속에 보이는 사귈 제(祭)의 의미다. 발이 있는 귀한 그릇 위로 고기 한 점을 얻는 손의 모습이다. 사귄다는 건 상대방의 숟갈에 얹는 고기 한 점이었던 것이다. 이를 죽은 이에게 하면 제사(祭祀)가 되고, 산 이끼리 하면 축제(祝祭)가 된다. 너와 나의 사귐은 하나의 경계를 넘는 교제(交際)가 된다. 여기 제(際)에는 경계를 의미하는 부호가 담겼다. 사귐은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다. 서로 나눈 고기 한 점, 귀한 식사 한 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