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동양 철학의 정수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어떻게
무엇을
마음먹느냐,
바로
그거다.
마음이
무엇이냐,
물리적으로
피가 뛰는 심장이다.
보통
사람의 주먹 크기다.
왼쪽 젖꼭지와
가슴 중앙선
사이의 뼈 아래 근육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피를 돌린다.
성인기준 8만㎞ 길이의 혈관에
피가 돌도록 한다.
굴심방결절의 심박조율기 세포는
심장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뛰도록 한다.
대략 1분에 72회 정도다.
운동은 심박 속도를 늘리고
휴식은 심박 속도를 줄인다.
감정은
이 심장 리듬의 변화다.
묘하게도
놀랍게도
고대 동양의 현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일체유심조
이 말 속에는
바로
이 같은
생물학적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
대표적인 글자가
쾌락(快樂)의 쾌(快)다.
‘몹시 즐겁다’는
뜻이 쾌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도
담겨져 있다.
쾌는 갑골자가 아닌
금문에 나온다.
소전의 쾌(快)는
심장을
날카로운 기구로
긁어내는 모양이다.
가려움을 긁어주는
모양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심장을 긁는
극한의 고통이기도 하다.
쾌락의 본질이요,
고통의 본질이기도 하다.
본래 쾌락은
고통의 끝에 온다.
극한의 고통이
끝나고 느끼는
감정이 바로
쾌락이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다.
고통에 움추렸던
체내의 다른
감성들이 새롭게
움직이는 게
쾌락이다.
때문에
쾌에는 ‘병이 낫다’는 뜻도 있다.
쾌유(快癒)가 그 것이다.
고통이
쾌락의
본질인 것이다.
일체유심조
결국
모든 게
마음에 있는 것이다.
종이쪽보다
작은 차이로
고통과
쾌락이
갈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