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있어
스스로를 낮춰
천해지려 할까.
누가 있어
스스로 더러워지며
남을
깨끗이 하려할까.
누가 있어
많고 적고의
높고 낮고의
차별 없이
공평할 수 있을까.
누구 있어
존재만으로
남에게
생명을 줄까.
물 수(水)의 덕(德)이다.
물 수(水)는
가장 오래된 한자 중 하나다.
강의 물이
흐르는 모습이다.
항상 중심을 잡는
중봉(重峯)의 수류(水流)와
항상
넘치며 물길을 넓히는
지류(支流), 변연(边沿)의
각 두 획으로 이뤄져 있다.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반짝임을
표현한 듯도 싶다.
내 천(川)이 급속히
흐르는 물이라면
물 수(水)는 멈춘 물이라 할까.
큰 내 강(江)과 바다 해(海)
모든 물을 대표한 자가
바로
물 수(水)다.
항상 물은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며
항상 물은
스스로를 더럽혀
돌과 동물에
묻은 더러움을
닦아 준다.
항상 물은
크고 작은 모든
구덩이를 채워야
비로소
다시 흐른다.
항상 물은
바위를 만나
피해 흐르지만
결국
천년 바위의
모양을 바꾸고
결국
그 바위를 깨뜨린다.
물은 낮은 곳을
채워
강을 이루며
바다를
이룬다.
사해의 모든 물이
결국 바다를 만든다.
바다의 장엄함은
다른 게 아니다.
차별이 없어
한 없이 커진
규모에서 나온다.
‘상선약수’(上善若水)
노자는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하고도 그 공을 내세우지 않아’
가장 선(善)하다 했다.
고래로 동양에서
강은
척박한 서쪽을
시원(始原)으로
굽이굽이
동으로, 동으로
흐르며
이 땅에
온갖 생명의 씨앗을
뿌리고,
다시
그 사체를
그 영혼을
거둬 바다로
가져가는
메타퍼였다.
“靑山依久在 幾度夕陽紅”
(청산의구재 기도석양홍: 언제나 푸르른 저 산은, 얼마나 많은 석양을 겪었을까?)
명나라 양신(揚愼)의 감탄이다.
이 감탄에 이어
그는
그 산에 생(生)을 주고
수많은 영웅을 꽃잎처럼
띄워 사라진
존재를 물이라, 장강이라 부른다.
“滾滾長江東逝水”
(곤곤장강동서수; 굽이굽히 동쪽으로 흐르는 장강)
여기서
장강은 시간이요,
절대자다.
중국뿐이 아니다.
일본 역사대하 소설 ‘대망’의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는
그 소설 속에서
자신의 이름에 내 천(川)을 넣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묘사한 대목을 넣는다.
이에야스는 가신들 앞에서
자신의 이름 천(川) 자를 빌어 가신들의 역할에 대해 말한다.
“물결이 중심을 잡고 흐를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방향의 가신들이 중심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노자의 물의 예찬은
다시 한 번
우리가 물에서 배워야 할
흐름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악: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 임하며)
‘水善利万物而不爭’
(수선리만물이부정: 만물을 이롭게 하되 (공을) 다투지 않는다‘
누가 있어
물과 같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