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사오치의 몰락을 그렇게 빠르게 찾아왔다.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의 발언을 자르고 자신의 주장을 펼쳤을 때 이미 몰락의 씨앗을 심어졌고,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촉발했을 때 몰락을 그렇게 우후죽순처럼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6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제 8기 11중전회, 바로 류샤오치의 몰락의 서막이 열린 회의다. 이 회의에서 류샤오치 당서열이 급전직하했다.
무엇보다 마오쩌둥의 후계자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이 전 공식석상에서 류샤오치를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언하곤 했다. 하지만 제 8기 11중전회를 통해 류샤오치는 더 이상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아니었다.
새롭게 등장한 이가 바로 린뱌오였다. 이 같은 변화는 류샤오치에게는 치명적인 충격이었다. 본래 말수가 적었던 류샤오치는 더욱 더 말수가 줄었다.
하지만 그래도 류샤오치는 이제 막 성립한 신 공산 중국의 국가 주석이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 일은 주석으로서 꼭 해야할 일들이었다.
1966년 10월까지 류샤오치는 자신의 우경화 노선을 자아비판하는 보고서를 준비한다. 10월 가을은 베이징이 가장 아름다운 달이기도 하다. 그런 계절 마오쩌둥은 인민대회당에서 중앙공작회의 개최를 예고하고 있었다. 류샤오치가 얼마나 열심히 보고서를 준비했는지, 중앙당사출판사가 발간한 ‘중남해인물춘추’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류샤오치는 하나의 습관이 있었다. 그 것은 식사 몇 분 전에 식탁에 앉는 것이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편하게 업무는 물론, 일상의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식사 중에는 일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갔다. 그러나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이 같은 습관도 없어졌다. 류샤오치는 온힘을 다해 보고서를 준비했다. 마오쩌둥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랬다. 류샤오치는 문화대혁명이 갈수록 극렬해지고 그 것을 뒤에서 조정하는 마오쩌둥의 태도를 보면서 위기를 느꼈다.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서, 아니 그보다 더 많은 간부들이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던 것이다.
류샤오치의 보고서 초안은 9월 14일 마오쩌둥의 앞에 보고된다. 류샤오치는 크게 3개 부분으로 나눠 자신의 우경화 노선에 대한 자아비판 보고서를 썼다. 1부는 1966년 5월 이래 50일간의 행적과 발언 속에 등장하는 우경화 노선에 대한 비판, 2부는 1949년 이래 있었던 자신의 우경화 생각을 노출한 발언과 행동들에 대한 비판, 3부는 이 모든 것의 근본적 원인으로 보이는 자신의 사고에 대한 비판이었다.
마오쩌둥은 보고서를 읽고 만족해 한다. 그리고 초안에 다음과 같이 코멘트를 달아 되돌려 준다.
“샤오치 동지,
보고서가 진지하고 제대로 잘 쓰였소. 특히 후반부가 좋았소. 이 보고서를 초안형식으로 인쇄해서 정치국과 서기처, 공작조(영도간부), 베이징시 위원회, 중앙문혁소조 각 위원에게 보내 토론을 하도록 하길 건의하오. 그래서 나오는 건의가 있다면 - 분명히 좋은 수확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오. - 그 것을 반영해 보고서를 수정하도록 하오. 그렇게 한다면 아주 합당한 보고서가 될 것이라 판단되오. 그렇게 합시다.
마오쩌둥
9월 14일”
마오쩌둥을 만족시키는 보고서는 이렇게 나왔다. 하지만 그렇게 류샤오치의 위기는 지나간 것일까? 마오쩌둥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1966년 10월 23일 오전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이 ‘지시한 그대로’ 자신의 우경화 노선에 대한 자아 비판 보고서를 중앙공작회의에 제출한다. 류샤오치의 보고서는 마오쩌둥이 자신의 대자보 ‘사령부를 폭파하라’ 상에 지적된 내용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누가 봐도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불길 앞에서 류샤오치가 꼬리를 내렸다고, 마음까지 변한 것일까? 마오쩌둥은 아직 아니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주도하는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류샤오치를 압박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