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한 사건은 마오쩌둥의 마음에 류샤오치에 대한 의심의 싹을 키운다. 그 싹이 자라서 마오쩌둥의 한 때 ‘나의 친밀한 전우’였던 류사오치는 일순간에 ‘반동’, ‘배반자’로 내몰린다. 그 것은 돌이켜보면 류샤오치의 변치 않는 한 가지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바로 인민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사실 정말 많은 초기 중국 공산당 멤버들은 한 가지 목적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미래 중국을 일으킬 사상은 ‘공산주의’여야 한다. 공산주의는 노동자들이 세상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변증법적 역사발전에서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세상은 왕권과 교권의 싸움에서 귀족들과 연맹한 왕권이 교권을 눌렀고, 다시 왕권은 커져가는 귀족들의 권력을 젠틀맨, 소위 자본을 일궈낸 부르주아지 눌렀다. 부르주와의 자본은 사실 노동자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것인데, 노동자를 착취해 이익을 독식한 자본가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세상, 공산혁명이 일궈내는 세상이었다. 서구 유럽의 발전에서 노동자들은 중국에서 농민을 포함한 세력으로 변해 있었다. 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중국에는 지주들의 착취를 당하는 농노와 소
달이 차고 기울 듯...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의 가까웠다 멀어진 행보 류샤오치는 그렇게 중국 공산당 정치무대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졌다. 중국 공산당사에 가장 기이한 회의로 꼽히는 지난 1968년 10월 13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류샤오치의 사형 선고를 내리는 회의였다. 마오쩌둥의 주도에 단 한 명을 빼고는 그 누구도 반발을 하지 못한 회의였다. 하지만 본래 마오쩌둥과 류샤오치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둘을 가장 가까운 전우였다. 지난 1922년 마오쩌둥과 류샤오치는 안위안루 탄광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특히 둘은 왕밍의 좌경 교조주의 통치 시절 우파로 몰리는 고초를 함께 치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국 공산당의 무력 투쟁 노선에 대대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쭌의회의에서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편을 들어 마오가 공산당의 중심인물이 되도록 힘쓴 공이 있다. 좌경 교조주의에 맞서 류샤오치와 마오쩌둥은 생사를 함께한 동지였던 것이다. 류샤오치는 이 때 ‘공산당원 수양을 논하다’, ‘당내 투쟁을 논하다’ 등의 저작을 내놓으며 공산당의 좌경 교조주의를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이런 류샤오치를 인정했다. 한 번은 보이보에게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에
청나라 마지막은 너무도 초라했다. 누구 하나 왕조를 되살리려 하지 않았다. 자금성에 수많은 황족들과 내시, 궁녀들이 원하는 건 청 왕조의 재건이 아니라, 청 왕조가 200여년 이상 중국 천하를 지배하며 모아놓은 보물이었다. 얼마나 도적질이 심했는지,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결혼식 직후 황후가 썼던 봉황관의 진주, 비취 등의 보석들이 나중에 보니 진짜는 모두 사라지고, 가짜로 바뀌었다고 한다. 훗날 푸이는 “도둑이 아닌 이가 없었다. 모두가 기회만 있으면 훔쳤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내시와 궁녀들은 몰래 훔쳤고, 황족과 대신들은 “물건을 살펴보겠다”고 가져가 되돌려 놓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황제 푸이마저 궁궐 내 물건을 훔쳐서 “동생에게 하사한다”는 명목으로 빼돌려 텐진 내 영국 조차지 내에 있는 사택에 따로 저장했다는 사실이다. 뭐 당시 군벌이라는 도적떼들이 언제든 들이 닥쳐 보물을 빼앗아갈 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조치로도 보인다. 이 때 푸이는 장장 5개월간 각종 보물을 빼돌렸는데, 이 때 푸이가 빼돌린 보물 가운데는 왕희지 부자, 구양순, 조맹부, 미불 등 명가의 서예 작품들이 포함됐었다고 한다. 그렇게 모은 보물들을 푸
1964년 6월 6일은 현 중국과 프랑스의 수교일이다. 이 수교일은 중국 내 한 인물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그는 수교일에 맞춰 처음으로 주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는 이들에게 부탁해 ‘올리버’라는 이름의 커피숍을 찾아 커피 100여 잔 값과 300갑의 중국 담배를 가져다 주도록 했다. 수교를 기념하는 예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규모였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 왜 이런 예물을 준비해 전달을 한 것일까?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저우언라이였다. 중국 당시의 총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 그는 왜 프랑스 수교를 기념에 커피 100잔 값과 담배 300갑을 선물했던 것일까? 역시 선물이 아니었다. 그럼? 사실 저우언라이가 어린 학생으로 유학시절 얻어 마시고, 얻어 피웠던 담배를 갚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과 프랑스의 오랜 역사가 숨어 있다. 중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청나라 말기부터 은원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밀수해 팔아먹다 아편을 불에 태운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침략해 전쟁을 일으켰다. 소위 ‘아편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아편전쟁은 1839~1842년에 1차, 1856~1860년 2차 이렇게
1. 중국 현대사에 가장 이상한 당중앙 전체회의...운명의 제8기 12중전회 1968년 10월 13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열린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12차 전체회의는 중국 건국 이래 가장 독특한 회의로 꼽힌다. 전체 인원의 반수도 참석하지 못한 역대 가장 적은 수의 중앙위원, 후보위원들의 회의였기 때문이다. 당대 12중전회에 참석 대상인 중국 공산당 제 8기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수는 총 87명이었다. 본래 97명이었으나 10명이 사망했다. 후보위원 수는 98명이었다. 그런데 8기 12중전회 참석 중앙위원수는 40명, 후보위원은 더 적은 19명에 불과했다. 어찌 보면 초라할 정도의 회의였다. 하지만 이 회의는 중국 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어쩌면 가장 불행한 정치적 결정을 하는 회의였다. 중국 중앙위원회 위원과 후보위원들은 이 회의에서 자신들 손으로 뽑았던 국가주석인 류샤오치(1898. 11. 24~1969. 11. 12)에 대한 탄핵을 의결한다. 정족수도 못채운 이 회의에서 중국 현대사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 결정 되는 것이다. 류샤오치가 국가 주석이 된 사연을 알면, 무슨 말인지 안다. 먼저 중국 1대 주석인 마오쩌둥이 국가주석직을 내려놓는 원인을 알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 최소한 은혜를 저버리지는 말아야 한다. 그게 인간의 도리다. 그래서 군자는 은혜를 함부로 베풀지도, 받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 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당 장군 출신의 황웨이(黄维: 1904~1989)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그는 황포군관학교 1기 출신으로 독일 유학 중이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귀국해 군대를 이끌고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일본이 패망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우한에 새로운 군관학교를 열고 교장을 맡았다.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8년 국민당 12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수개월 후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에 의해 포로가 된다. 황웨이는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1975년 사면돼 석방됐다. 포로가 된 지 무려 27년만의 일이다.이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는 수감 시절부터 인민해방군 군사(軍史) 연구에 전념했다. "인민해방군은 항일전쟁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말을 자주 했다. 항일전쟁에서 인민해방군의 역할을 자리매김한 게 그의 연구 성과로 꼽힌다. 어찌 보면 27년간 공산당의 감옥에서 정신개조를 받은 덕(?)이었다. 그러나 이런 개조 작업 속에서도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동북 3성 지역을 점령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다. 이후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내전의 혼란을 틈타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중일전쟁 개전 넉 달 만에 일본은 상하이를 점령하고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장쑤성 난징까지 진격해 난징 시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육한 '난징 대학살'을 자행한다. 중국측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그해 12월 13일부터 이듬해 1월 중순까지 난징에서 약 30만 명을 학살했다. 중국 정부는 난징 대학살 이후 77년만인 2014년 2월 27일 전국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매년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 희생자를 위한 국가 추모일(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로 공식 선포한다. 국가급 행사로 격상된 첫해인 2014년 12월 13일 시진핑 국가주석은 추모식에 참석해 “역사는 시대가 변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며 사실은 교활한 말로 잡아뗀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과거 역사의 치욕을 잊지 않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길을 개척할 것”이라는 2100여 글자 분량의 연설을 했고 이 광경은 14억 인민들에게 생중계
저우언라이(周恩来)를 향한 장칭(江青)의 공격은 집요했다. 저우언라이는 겨우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비서들은 줄줄이 낙마를 해야 했다. 첫 공격에 쓰러진 인물은 쉬밍(许明)이었다. 쉬밍은 1919년생이다. 본래 이름은 주위쥔(朱玉筠), 주핑(竹苹)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한 뒤 주로 저우언라이의 비서를 맡아왔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평소 모두가 좋아하는 밝은 성격이었지만, 모든 게 뒤바뀐 '문화대혁명'의 시기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장칭 일파의 분노를 사 사지로 몰리고 만다. 둘의 악연은 영화 '우쉰좐(武训传)'에서 시작된다. 문화대혁명 발발 직전 당시 장칭은 당 선전부 영화처 처장 직을 맡고 있었다. 중국의 모든 영화 등을 검열하는 직책이다. 쉬밍은 국무원 몫으로 가끔씩 영화 심의에 참여를 했다. '우쉰좐'이란 영화도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운명이 박복했다. 그 주인공은 청말의 실제 인물이다. 글을 못 배워 지주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만 했던 청년이다. 그게 한이 된 청년은 20년이 넘는 세월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모은다. 그 모은 돈을 들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학자를 찾아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위한 무료
중국의 대문호 루쉰은 철저한 사실주의 글쓰기로 유명하다. 도박하는 장면을 쓰기 위해 먼저 도박을 연구해 공부했다. 현실의 모습을 작품의 품격으로 담아냈다. 나의 글쓰기는 진실을 담아내는 것, 그것에서 출발하고 그것에서 그친다.루쉰의 고백이다. 그의 글은 수많은 중국인의 가슴을 울렸다. 수억 명의 중국 청년들이 그의 글을 읽고 사회를 바꾸자는 혁명에 가담했다. 루쉰의 글은 일부 청년에겐 삶의 지표였고, 혁명 참여를 독려하는 대자보였으며, 삶을 규정하는 성스러운 경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루쉰도 피하지 못한 게 있다. 출판사와 원고료 다툼이다. 사실 어찌 보면, 원고료를 대척점으로 출판사와 작가는 오래전부터 고양이와 개의 관계처럼 본래 타고난 앙숙이었는지 모른다. 출판사는 어쨌든 원고료를 깎으려 했고, 작가는 어떻게든 원고료 한 푼이라도 더 받아야 했다. 1930년대 루쉰이 자주 거래하던 출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판사는 원고지의 글자를 일일이 다 세어, 원고비를 지급했다. 그 출판사는 그러면서 글자에 마침표 쉼표 등의 문장 부호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당대 인기 작가 루쉰의 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출판사의 이런 태도에 루쉰이 화가 났다. 그렇다고 점잖은 체면에
문화대혁명이 초기 증명된 사실이 있다. 단 한가지 죄명 앞에서는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바로 '반역죄'였다. 누구든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 '반역죄'로 엮이면 바로 대중 앞에서 죄를 고하고 몰락했다. 문화혁명 초기 중국 공산당 권력의 2인자였던 류샤오치(刘少奇)가 그랬고, 덩샤오핑(邓小平)이 그랬다. 반역죄의 이름으로 엮을 수만 있으면 실제 그 죄가 크고 적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역죄는 장칭(江青) 등 문화혁명 주도 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죄로 엮기만 하면 수많은 홍위병들이 몰려가 자신들의 방법으로 응징을 했다. 거리를 개처럼 끌고 다니며 온갖 욕설을 했고 소위 '인민재판'을 했다. 굴욕을 견디지 못한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역죄가 왜 그리 무서운가? 2023년 오늘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신중국 건국 이전 국공 내전 시기였다. 이 시기 국민당은 공산당을 탄압하고 회유했다. 적지 않은 간부들이 한차례 정도는 잡힌 경력이 있고,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가짜 투항을 하기도 했다. 국민당은 주요 공산당 간부들 명의로 신문에 가짜 전향서를 발표하곤 했다.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