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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星集团的始点——湖岩李秉喆(6)

조선반도에서 아무리 잘나도 일본의 식민지 민족

 

참 서글픈 게 본래 안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다. 어떤 경우 그 벽은 참으로 황당하기까지 하다.

 

 

“넌 우리 학교 출신이 아니어서 안돼.”, “넌 우리 지역 출신이 아니잖아?”, “넌 우리 선생님 제자가 아니잖아?”

 

 

소위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방어를 쌓은 벽들이다. 요즘도 정말로 많은 이들이 이 벽에 부딪쳐 좌절한다. 특히 노력해 벽을 넘으려 했던 이들이 그 좌절감을 맛본다. 자신보다 못한 이들이 벽 안에서 웃는 모습을 보며 억울함에 몸부림친다.

 

 

과거 봉건시대 한 핏줄끼리 그랬고, 일제시대에는 우리와 일본의 핏줄이 그랬다. 조선의 핏줄은 무조건 일본 핏줄에 한 등급 접어줘야 했다. 1910년 한 핏줄끼리 나 혼자 잘 났네 하던 양반들이 사회 속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권한을 손쉽게 일본에 양도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삼성의 이병철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식민 조선에 태어난 조선의 핏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병철은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던 그 해 조선의 양반 집에서 태어났다. 나라를 팔아먹은 양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당대 한 지역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던 집안의 자제였다. 솔직히 그래서 평범한 아이가 비범한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학교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다. 일반 집에서 태어난 천재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현대그룹의 창시자 정주영이 그랬다. 이병철보다 다섯 해 늦게 태어난 정주영은 돈 못 버는 농사일보다 더 나은 것을 배우기 위해 무슨 학교든 가고 싶어 가출을 해야 했다. 4번의 가출을 하고 비로소 학교는 못 가고 돈 버는 일을 할 수 있었다.

 

 

둘 모두 비범한 선택을 하면서 남다른 인생을 개척했다. 그래도 이병철은 정주영과 비교해 너무 순조로웠다. 서당 교육을 받고 서구식 교육을 원해 그런 교육을 받았다. 또 속성으로 마치고 싶다고 해 속성과정을 다녔다. 일본 유학을 가고 싶다고 해 일본 유학길도 올랐다.

 

 

그런 이병철이 본래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건이 있다. 조선의 핏줄이 어쩔 수 없이 느끼는 벽이었다. 바로 일본 유학길에서의 경험이었다. 이병철은 부친을 설득해 일본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병철 기억에 평생 그렇게 화를 내는 부친을 본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분노한 부친을 설득한 끝에 얻어낸 유학이었다.

 

 

부산에서 일본 시모노세키으로 가는 배를 탔다. 당시 배는 3000t급 대형 선박이었다. “배는 컸지만 내부는 허술했다고 이병철은 기록하고 있다. 그는 갑판에 올랐다가 같은 고향의 안호상安浩相박사를 만난다. 안 박사는 독일 유학으로 철학을 공부한 당대 인재였다. 그는 이병철에게 독일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 일본 교토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일본을 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둘이 한참을 이야기 하던 중에 배가 요동을 쳤다. 둘이 1등칸으로 돌아가려는 데 일본 형사를 만났다. “너희 조선인들이 무슨 돈으로 1등칸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 그러면서 형사는 둘의 신분을 캐물었다.

 

 

이병철보다 좀 세파를 경험한 안 박사가 나섰다. “우리는 돈을 듬뿍 가지고 일본에 놀러가는 길이요.” 겨우 1등칸으로 들어가고 나서 이병철은 비로소 자신이 식민지 출신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한다. 이병철로서는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 분노요, 굴욕이었다.

 

 

자서전에 이병철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 국가가 되어야 한다. 후년 내가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 지배하에 놓인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 두게 했던 그 부관 연락선에서의 조그만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픔으로 이병철의 도쿄생활은 시작된다. 자취 생활을 하며 이듬해인 1930 4월 이병철은 와세다 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 무렵 미국의 금융시스템 불안으로 야기된 불황이 세계를 휩쓸고 있었다.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고 공장에서는 파업이 잇달았다. 대학을 나와도 직장 구하기 힘들어지면서대학은 나와도라는 영화가 화제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런 사회 혼란 속에 이병철은 모처럼 책과 친해지며 사색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역시 뜻하지 않는 병고로 중단하게 된다. 역시 운명은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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