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至誠之至, 通呼神明" (지성지지, 통호신명) 공자집어 효본에 나오는 말이다. 문장 그대로의 뜻은 '성실의 극에 다다르면, 신명함을 이룬다'는 것이다. '성'이라는 말이 무겁다. 성의 한자는 말씀 언(言)과 이룰 성(成)이 합쳐진 회의자다. 뜻은 간단히 말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동양에서 성은 하늘의 도다. 하늘만이 그 말이 다 이뤄진다. 옛 현인들은 땅의, 인간의 도는 '성지'(誠之)라 했다. 말이 이뤄지도록 노력한다는 의미다. 인간은 말을 다 이루면 살 수 없다. '그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이다'라는 의미다. 다시 본문의 말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진다. 성지, 인간의 도는 마지막에 이르면 신통해진다는 의미다. 신의 밝음과 상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신의 밝음이란 무엇인가? 하늘의 도다. 하늘의 도는 앞에 이야기 했듯 '성'이다. 말이 다 이뤄진 것이다. 인간의 도가 지극에 다다르면 하늘의 도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다. 신명의 경지에 오른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보다 요즘 시대 조급하기만 한 우리 국민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싶다. 본래 진리란 그 답이 분명히 정해져 있다. 우리 가운데 과연 그 누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있을까?
블루, 레드, 화이트 1994년 나온 프랑스 영화다. 자유(블루), 박애(레드), 평등(화이트)을 주제로 했다는 뭔가 철학적인 수수께끼 같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내용을 보면서 왜 자유이고, 박애이며, 평등이 주제였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돼 내용도 잊었지만, 사색적인 도전을 던진 탓에 영화의 편린들이 아주 오래 남았다. 무엇보다 세 영화 중 백미는 첫 개봉된 블루다 싶다. 영화 전반적인 색감과 음악적 감성, 누가보다도 예술적이다 싶은 몽환이 서려있다. 특히 이지적인 줄리엣 비노슈의 고급 진 매력이 풀풀 넘친다. 동양의 우아함의 서구적 표현이다. 세 영화는 독특한 인생을 경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각기의 주제를 풀어간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한 시대를 살아 한 영화 속에서 모두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을 버리는 노인’이다. 영화를 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 딱 좋은 아주 짧은 순간에 등장한다. 안 그래도 작은데 허리가 굽어 더욱 작아 보이는 노인이 어렵게 손을 뻗어 병을 분리 수거통에 버린다. 정확히 버리기 위해 허리 굽은 노인은 한동안 애를 쓴다. 겨우 병이 버려지는 순간 장면은 바뀐다. 주인
오르고 또 오르고 싶은 게 사람이다. 위로, 위로 오르고만 싶다. 능력이 모자란 게 한(恨)일뿐이다. 그런데 묘한 게 오르고 올랐는데, 또 그 위에 뭔가가 있다. 이제 정상이다 싶었는데, 그 옆에 더 높은 봉우리가 나를 내려다본다. “넌 아직 멀었어!”하듯. 그럴 때 정말 힘이 빠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야 인생의 정상일까?’ 맞다. 역시 답은 문제에 있다. 왜 모든 산의 정상이 있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게 있는데, 우리 인생에는 정상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내 주변의 수많은 봉우리들을 보다 보면, 가소로운 게 바로 내 아래 것들이다. 내가 정말 죽을 둥 살 둥 기를 쓰고 여기까지 와서 보니 다시 더 높은 저 많은 봉우리들이 보이는데, 아직도 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한 것들이 수없이 많다. 여기까지 올라온 내가 주변의 수많은 더 높은 봉우리들을 보면서 ‘쉬면 안 되겠다. 다시 더 올라가자!’ 다짐을 하는 데 아래 수많은 것들은 그저 틈만 나면 쉬려고만 한다. 아쉽고 아쉬운 게 아래 것들이다. ‘뭐 그래서 아래 것들이지 …’ 하지만 얼마나 황당하고 철이 없는 생각인가. 자연을 관조하고 그에 비친 자신을 돌이켜 보면 자연히 반성을 하게 된다.
"인간이 세상 만물 속에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시간 때문이다." 삶에 있어 ‘시간’보다 더 중요한 개념이 있을까? 인생이 그 자체가 한 사람의 시간이고, 삶과 죽음이 시간에 있다. 그 삶 속의 모든 것도 시간이다. 모든 일의 성패가 1분, 1초 시간 차이에 갈리기도 한다. 세상 만물 이렇게 시간에 달렸다. 도대체 시간은 언제부터 우리 삶에 들어왔을까? 언제부터 이렇게 중요해졌을까? 다른 건 몰라도 우리 하늘 천(天)을 통해 시간을 배웠다. 시간은 하늘에 있고, 하늘에서 나왔다. 하늘 공간의 변화가 바로 시간이다. 해의 하루 변화를 일(日)이라 했고, 달의 변화를 월(月)이라 했다. 별의 변화를 절(節)이라 했다. 절이 쌓여 한 해(年)가 되고, 한 해가 쌓여 역(歷)이 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시간의 전부인가? 하늘의 시간에 호응하는 땅의 시간이 더 있다. 이 땅의 만물은 하늘의 시간을 사는 게 아니다. 하늘의 시간에 호응하는 땅의 시간을 산다. 같은 소나무여도 평지의 소나무는 하늘로 곧게 뻗지만, 저 높은 산정 절벽의 소나무는 이리 굽고 저리 굽어 산다. 묘하게 구부러짐은 그 소나무의 삶의 흔적이다. 역경의 흔적이다. 소나무는 소나무가 자라는 지역에만
하늘은 시간일까? 공간일까? 도심 속 우리가 잊고 사는 게 하늘이다. 하늘의 푸르름, 고즈넉한 하얀 구름은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에 있지만 하루 한 번 보는 이 드물다. 항상 머리 위에 있어 그저 고개만 들면 되는데…, 그런 여유가 없다. 도심의 우린 1분의 여유가 없다. 푸르고 높고 가없는 하늘은 그렇게 우리 도시인에게 잊혀있다. 대신 우린 매일 쫓고 쫓기며 산다. ‘빵빵’이는 자동차처럼 서로가 서로를 재촉한다. 출퇴근길 버스를 위해 달리고, 식당 줄을 서기 위해 달린다. 쫓기며 사는 우리가 달고 사는 말이 있다; “시간이 없어!” 그렇게 하늘을 잊은 우린 시간에 쫓기며 산다. 정확히 하늘의 시간을 빼앗긴 우린 땅의 시간에 쫓기며 산다. “하늘이 공간일까? 시간일까?” 도심 우리에겐 좀 뜬구름 없는 이야기다. 질문이 그렇다. ‘하늘이 공간일까? 시간일까?’라니, 역시 우리가 잊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다. 특히 한국인이 잊어버린 이야기다. 한자 하늘 천(天)의 이야기다. 서양에서는 하늘은 sky, 시간은 time이다.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구글링으로 찾아본 영어 sky의 어원은 고대 게르만어 scuwo (region of the clouds) 및 고대 노르만
“한자란 수천 년 인류의 지혜를 담아 전하는 USB다.” 한자에 대한 생각이다. 간단히 참 진(眞)자를 보자. 참되다는 게 무엇일까? 우리의 먼 선조들은 무엇을 보고 이 글자를 참이라는 뜻을 갖도록 했을까? 갑골문에서 참 진은 시체를 의미한다. 그럼 어떻게 시체가 참되다는 뜻이 됐을까? 언제부터 참되다는 뜻이 됐을까? 자연히 이런 의문들이 든다. 그리고 그 의문들에 답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참 됨이란 무엇인가?’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참 진을 제대로 알면 ‘무엇이 참됨’인지 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수십 수백편의 논문을 써도 정의가 쉽지 않은 ‘참됨’이라는 의미를 한자 한 자가 가르쳐주는 것이다. 무엇이 한자에게 이런 기능을 갖도록 했을까? 한자는 인간 스스로의 ‘딥런닝’ 과정을 극도로 압축했기 때문이다. 한자가 이 땅에 만들어 쓰인지는 대략 5000여 년 전이다. 본래 한자는 고대 주변의 산과 강 등 주변의 사물과 각 종 동물과 기구의 모양을 본 따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모여 다시 새로운 한자를 만들어 갔다. 이 과정은 인류의 생활이, 의식이 복잡해지는 과정과 같다. 생활이 복잡해지면서 사용하는 물건이 다
지는 갈림길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고, 혜는 어지러움을 쓸어 밝게 하는 것이다.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남과 잘 어울리는 이가 있다. 물이 나올 곳을 알고 기다리듯, 삶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저절로 얻는 사람이 있다.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분명히 알고 처신해 그런 결과를 얻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지혜智慧롭다'하고, '현명賢明하다'한다. 지혜롭고 현명한 삶,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리되고 싶고, 그리 살고 싶어도 쉽지 않다. 무엇을 지혜롭다 하는가? 지혜란 무엇인가?입이 탁 막히는 질문이다. 답이 쉽지 않다. 많이 아는 것?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것, 과학의 발달을 그저 지혜라 할 것인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만 하다면, 삶이 너무 단순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갈수록 똑똑해진다는 데, 모든 것을 인공지능의 결정에 맡기면 될 것이다. 누가 있어, 세상의 모든 지식을 가장 빠르게 검색하는 데 인공지능만 할까? 인공지능이 지혜다. 그런데, 과학이 증명하듯 우리 인간이 사실로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까지 과학은 얼마나 많은 과거 무지와 편견을 깼던가. 혹 인공지능이 무장한 지식
어느 여성이 샤넬 백을 마다할까? 어느 남자가 람보르기니 자동차를 마다할까? 왜 그리 가지고 싶은가? 한마디로 귀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비싸기 때문이다. 남들은 못 갖는 것이기에 나는 꼭 갖고 싶은 것이다. 귀한 게 이렇다. 그 본질을 보면 남과 달라지려는 데 있다. 남과 다른 대접을 받으려는 데 있다. 비싸 호텔은 남다른 서비스가 있기 때문이고, 샤넬 백이 비싼 이유는 대다수가 샤넬에는 른 품위가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귀하다는 게 이런 것이다. 남 다른 것이다. 비싼 것이다. © hpkofficial, 출처 Unsplash 그런데 정말 이게 다일까? 이게 정말 귀하다는 전부일까? 소위 말하는 생명은? 인격은? 우리 주변에 아직 가격을 메기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은 귀한 것일까? 귀하지 않은 것일까? 한자의 세계에서 귀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역시 선인들의 생각은 ‘사무사’하다. 선인들에게 귀한 것은 ‘한 줌의 흙’이었다. 갑골자 귀는 한 줌의 흙은 두 손으로 감싸는 모습이다. 참 대단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반전이다. 귀하다는 게 ‘한 줌의 흙’이라니? 왜 흙인가?흙의 어떤 가치가 귀할까? 도처에 널린 게 흙인데? 그런데 공
예법은 동양의 사회를 지탱해온 규범이다. 예는 사대부를 규율하는 것이고, 법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예를 중시하는 공자와 법을 중시하는 법가가 다퉜다. 본래 진나라를 장악해 법가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결국 다스리는 것은 공자의 유가 손에 넘겨준다. 예가 법을 이긴 것이다. 권력은 빼앗겼지만, 그 뒤 법가의 가르침은 국가 경영에 중요한 틀이 됐다. 서양의 법체계가 좀 더 근대적 의미에서 정교해 많은 이들이 아시아, 예컨대 한국에 법이 없었다고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큰 오해다. 한국, 중국 아시아 각국에는 나름대로 정교한 법규가 있어 사회를 구속해 왔다. 물론 그것을 만들고 집행하는 데 서구 사회처럼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면도 있다. 하지만 각 시대마다 법을 만들면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민의를 반영하려 노력했고, 법의 집행이 공평하게 하려 노력했다.특히 예라는 게 있어 아시아 왕조와 왕조를 넘어 법 해석과 집행에 최대 권한이 있는 황제를 구속했다. 예와 법은 서양에서 그러했듯 동양에서 시대를 지나면서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예를 읽다 보면 과연 이런 복잡한 절차가 왜 필요한가를 알기 힘들다. 예가 몸에 익으면 절로 몸과 마음
시간의 시(時)는 갑골문의 "해가 태어난다"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손이 더해졌다. 햇볕을 받아 나무가 자란다는 것에 사람의 손, 즉 사람의 역할이 더해진 것이다. 해로 대표되는 하늘의 시간, 자라는 나무로 대표되는 땅의 시간에 사람의 손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시간이 더해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들여 나무를 더욱 우거지게, 곡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땅의 시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공간의 하늘에서 시간의 하늘을 알고 나면 참 많은 것이 새로워진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과 한계가 정해진 땅의 시간 차이 속에 새삼 스스로 한계가 더욱 명백해진다. 스스로 자연의 변화를 관조하게 되고, 홀로 있어도 겸허하게 된다. 세상은 멈춰진 듯, 빈 듯 보이지만 영원한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고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 그리고 인간적 시간을 합친 게 '時'다. 바로 우리가 잊었던 시간의 하늘을 알고 나서 느끼는 변화다. 우리가 하늘 천(天) 자만큼 잘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가 '공부'(工夫)다. 역시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공부는 명사로 "학문이나 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