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중국어는 구어와 문어가 차이가 크지만, 과거 중국에서는 구어와 문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였다. 표의문자의 특성 때문이다. 쉽게 말해 말한다고 글을 쓰지 못했고, 써 놓은 글을 소리내 읽었다고 그 뜻을 일반 백성들이 알지 못했다. 글을 쓰는 수많은 법칙이 있었고, 그 법칙을 두루 달통하는 데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쉬운 예를 과거 시험도 마찬가지다. 4자, 4자로 대구를 이루는 문형을 써야 했다. 붓을 들고 쓸 때도 예서와 행서를 정해 놓고 쓰도록 했다. 그냥 논하는 글을 쓰기도 쉽지 않은 데 문형 규칙까지 지켜야 했으니, 오늘날의 대입 논술의 어려움은 과거 과거시험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싶다. 굳이 과거시험 문장은 말하지 않더라도 지방 행정 관서의 모든 문서가 이렇게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언어로 작성됐던 것이다. 시골에서 웬만큼 글을 배워서는 지역 관공서 일을 보기조차 힘들었다.
이렇게 차이가 컸던 게 문어와 구어다. 그나마 이렇게 큰 차이가 났던 게 좁혀진 게 청나라 말기 일어난 구어 문체 운동, 백화문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럼 백화문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중국 지식인들은 백화문 운동의 시조를 후스(胡适,1891~1962)로 꼽는다.
후스는 중국인들이 꼽는 현대 최고의 학자다. 평생 학문만 추구했다. 대만행을 택한 것도 "책이 많아서"라고 알려져 있다.
백화문 운동은 그가 1917년 1월 미국 유학시절 '신청년'(新靑年)이란 잡지에 쓴 글 "문학개량추이"(文学改良刍议)에서 촉발됐다. 후스는 문장에서 "옛 글을 모방 하지 말며, 선인의 글을 베끼려 하지 말며, 고전을 인용할 필요도 없고, 굳이 대구를 만들려 하지 말자"는 등의 8가지 새로운 문장을 쓰자는 주장을 했다. 이 8가지를 쓰지 않으면 문어의 제약이 크게 벗어나게 된다. 소위 백화문을 쓰자는 것이었다. 청나라 말기 개혁의 파고에 따라 백화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지만, 아직 그 누구도 감히 공개적으로 백화문을 쓰자는 주장을 하지 못할 때였다. 후스의 이 글은 당대 중국 지식인 사회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지식인 사이에 백화문 운동이 들불처럼 번지는 촉발제가 됐다. 중국의 루터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