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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2> 어린 학생들을 집어삼킨 문화대혁명의 불길(1)

약법삼장의 20년 속박 속에 쌓인 장칭의 한은 문화대혁명으로 타올랐다. 린뱌오로 대표되는 군부의 지지까지 얻자 장칭의 기세는 파죽지세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중국 전역으로 번졌다. 장칭(江青)은 이제 마오쩌둥(毛泽东)의 그늘 속에서 벗어나 중국 정치무대로 나왔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향해 움직였다. 마오쩌둥이 큰 힘이 됐다. 전국 수억 명의 홍위병에게 박수를 받았다. 홍위병들은 장칭을 향해 "장칭 동지를 배우자"고 환호했다. 배우 장칭으로서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박수였다.


문화대혁명이 불타오르면서 장칭의 마성도 점차 극에 달했다. 점차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눈에 거슬리는 모든 것을 비판하고 처벌하는 마두가 되고 있었다.  이 시기 중국 공산당사(史)에는 저우언라이(周恩来)가 평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게 됐다고 전한다. 장칭의 극한의 마성에 맞서지는 못하고, 그녀의 정치적 폭정에 최대한 많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실제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그 속에서 점차 이성을 되찾는 홍위병들이 나타난다. 처음 장칭은 이들에게 접근해 다시 문화대혁명의 마성에 빠뜨리려 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자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롄둥(联动)'사건이다. 발단은 베이징의 홍위병 규찰대였다. 문화대혁명 초기 국무원 비서장 저우룽신(周荣鑫)이 나서 활동을 지도했다. 초기 규찰대에는 여느 홍위병들처럼 문화대혁명의 마성에 물든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저우룽신의 지도와 저우언라이 총리의 노력 속에 이성을 되찾았고,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 지역 안정을 도모하는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66년 8월만해도 장칭 등은 베이징시 규찰대를 품안에 넣으려 노력했다. 8월 6일 규찰대 회의에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장칭은 아직 어린 이들 고등학생들에게 "조심하라. 당 중앙의 의견이 항상 일치되는 것 아니다"라며 협박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장칭은 규찰대가 저우언라이 총리의 지도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8월 31일만해도 린뱌오(林彪)가 붉은 팔띠를 두르고 규찰대 집회에 참여해 독려를 했을 정도다. 그러나 베이징시 규찰대는 점차 장칭 등의 속셈을 알고 이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 홍위병이 베이징 일대 연합회위원회, 이른바 '롄둥'을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자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 역시 본격적인 탄압에 나선다.


가장 극적인 장면이 12월 16일의 베이징 고등학생 홍위병 집회에서 나온다. 이 집회는 베이징내 고등학교 홍위병 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에서 베이징 공인체육관에서 주최한 것이다. '베이징시중학비판자본계급반동노선서사대회'가 대회 공식 명칭이었다. 대회에서 장칭은 반 미친듯 열정적으로 연설했다. "살인과 폭력을 휘두르는 무리, 혁명에 반대가 되는 무리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 장칭은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순간 한참 연설을 하던 장칭이 갑자기 국무원 비서장 저우룽신을 손가락질했다. "그런 무리들의 보호자"라며 무대 위로 나와 죄를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저우언라이 총리 역시 저우룽신 등과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로서는 난처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장칭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자본주의 계급 노선을 지향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가 어린 학생이든, 나이든 노인이든 잘못을 바로 잡고 병을 고치는 태도로 비판하고 비판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때 처음 저우언라이 총리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료에 따르면 저우언라이 총리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무대에 올라 연설을 했다. "앞서 4개월간은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었다. 세상 만물이 그렇듯 어린 새싹은 처음 아무 것도 모른다. 잘 모르고 한 일은 고치면 된다. 새로 태어난 것은 자라게 마련이다. 우리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저우언라이의 연설이 끝나자 대회장은 박수 소리로 가득했다. 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당 자료는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12월 5일 베이징에는 '롄둥' 조직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학생들은 중앙문혁소조의 몇몇 지도자들의 월권행위를 고발하는 대자보를 내건다. 


롄둥의 활동이 시작되자, 중앙문혁소조 역시 바로 조치에 나선다. 12월 12일 인민일보 산하 훙치 잡지에 "투쟁의 창끝은 무엇을 향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글이 게재된다. 이어 14일에는 캉성이 나서 "반혁명분자들을 진압하라! 그것이 바로 최고의 민주다"라고 주장한다. 이어 어린 학생 조직인 '롄둥'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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