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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5> 문화혁명 사인방의 발호

"국방부 긴급 전화입니다.” 1966년 12월 중순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사무실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비서가 뛰어 들어와 보고를 한다. 
“국방부라니?” 놀란 저우언라이가 전화를 집는다. 
“지금 홍위병들이 국방부 건물로 쳐들어간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전화 보고를 받은 저우언라이가 긴급히 비서를 불렀다. 
“빨리 중앙문혁소조를 연결해!”

 

 

1966년 10월과 11월은 문화혁명의 주요 분수령이다.  장칭(江青)은 11월 초순 상하이에서 린뱌오(林彪) 등과 협력해 기존 상하이시 당위원회를 완전히 뒤집어엎는데 성공한다. 9일에는 상하이에 왕훙원(王洪文) 등을 수뇌로 하는 상하이혁명조반총사령부가 성립된다.  마오쩌둥(毛泽东)의 후계자로까지 성장하는 왕훙원이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을 하는 것이다. 소위 문혁 사인방이 이때부터 형성된다.


왕훙원 등 사령부 대표들은 10일에는 베이징에 관련 보고를 하겠다고 기차를 탈취해 북상을 시도하다 혁명적 행동임을 인정받기로 하고 되돌아간다. 이제 상하이는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 손에 떨어진 것이다. 

 

 

문혁 사인방의 조정을 받은 홍위병의 공격 대상은 이뿐이 아니었다. 진정한 목표는 베이징이었다. 그것도 총칼로 무장한 군대를 관리하는 국방부에 대한 공격은 사인방이 바라마지않는 일이었다.  

당시 베이징에는 전국 곳곳에서 올라온 홍위병들로 가득했다. 시는 이들을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줬다. 베이징으로 가는 모든 열차는 무료였다. 계속해서 많은 지역의 학생들이 올라왔고, 이들 가운데는 군사학교의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국방부에 몰려가 군부대의 문혁을 요구했다.


1966년 10월 하순에는 드디어 홍위병들이 국방부 건물로 몰려가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들 홍위병은 10월 24일에서야 겨우 설득당해 물러선다. 그런데 12월 다시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의 선동에 의해 홍위병들의 국방부 공격이 예고됐다. 10월 혼란을 기억하는 저우언라이는 조바심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만약 양측이 충돌해 피라도 흘리게 되면 정말 큰일이었다.

유혈사태는 베이징이 아니라 전국으로 순식간에 번져갈 소지가 컸다. 다급해진 군부 간부들과 저우언라이가 각 방면으로 뛰어 겨우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고 당 자료는 전한다. 

 

저우언라이의 이 같은 행동은 바로 장칭 등 중앙문혁소조의 분노를 샀다. 사실 이미 중앙문혁소조의 저우언라이에 대한 간접 공격이 이미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중앙문혁소조는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고 런민르바오(人民日报) 등 당의 모든 선전기관을 장악하고 있었다. 

당 이론지인 훙치(红旗)는 이른바 절충주의 위선자들에 대한 비판하기 시작했다. 1966년은 루쉰(鲁迅) 30주기의 해였다. 그해 10월 31일 문화대혁명의 발원문인 ‘신해서파관을 비판하다’를 썼던 야오원위안(姚文元)은 당 이론지인 훙치에 “소위 ‘공정’이라는 자칭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세도를 누려온 위선자들과 한 편이다. 이들의 위선의 가면을 벗겨야 한다"라고 주장을 한다.

 

'절충주의자', 이때만 해도 이 말이 저우언라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장칭 등이 뒤에서 저우언라이를 ‘소방관’ 등이라며 비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1972년이 되면서 조금씩 변한다. 1972년 2월 장칭은 공개석상에서 저우언라이를 향해 “절충주의자”라고 비난한다. 

 

“총리 당신이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모임을 갖고 각종 절충안을 내놓는데, 이는 분명히 우리 중앙문혁소조에 반하는 행위다. 혹 모르시나 본데, 당신 역시 우리가 보호하지 않으면 홍위병의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신중국 수립 이전 겪었던 국민당의 총칼 위협보다 더 저우언라이를 곤혹스럽게 만든 순간이었다고 당 자료는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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