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함은
남을 이겨야
비로소 안다.
권위 수준은
내 말을 듣는
남의 태도에
달려 있다.
그럼
총명함은 어찌 아는가?
남의 우둔함을
보고 비로서 안다.
남의 잘못이 보이고
고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총명함을 안다.
그럼 다시
부유함은 어찌 아는가?
마찬가지다.
남의 재산을 보고 안다.
남보다 많으면
스스로 부유하다 한다.
하지만 이 것들이 정답인가?
정말 아는 것인가?
정말 강한 것인가?
정말 총명한가?
정말 부유한가?
남을 통해야 비로서
아는 게
정말 아는 것인가?
맞을 수 있다.
하지만 비교의 남이 바뀌면,
답도 바뀌는 게
정말 정답인 것인가?
그럼 왜?
내가 강한데,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고,
내가 총명한데
왜?
나보다 더 총명한 사람이 있는가.
또 그럼
왜 내가 부유한데
항상 나 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있가.
그 앞에
왜 나는
항상 모자라기만 한 것인가?
도대체 어찌해야,
진정 강함을 알고,
어찌해야,
진정 총명함을 알고,
어찌해야,
진정 뜻이 있음을 알까?
또
어찌해야,
내가
진정 부유함을 알까?
동방의 성인 노자는
‘내 자신에서 알라’ 했다.
남을 이기는 자는
그저 힘이 있는 자요,
진정한 강함은
스스로를 이기는 데 있다 했다.
남을 아는 이는 지혜롭지만,
진정한 현명함은
자신을 아는 데 있다 했다.
스스로 그칠 줄 알 때
비로서
그 뜻이 있음을 안다 했다.
감히 그칠 수 있음이
진정한 용기요,
진정한 용기를
갖춘 의지가 참된 것이라 했다.
내가 진정 부유하고
여유롭다는 것은
내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서 안다 했다.
나눌 수 있는 것은
자족(自足)하기 때문이다.
또 역으로
나눔만이 자족함을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부유하지만 나누지 못하면
여유가 없는 것이고,
이 천하에 여유가 없는 것이
오래 가는 법은 없다 했다.
작은 나눔들,
스스로 작아지는 것들이 이 세상을 크게 하는 법이라 했다.
‘습명’(襲明)과 ‘미명’(微明)의 지혜다.
누구나 알지만
실천하지 못함이
그 어려움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