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존재에
도의 원칙은 예외가 없다.
유한의 존재도,
무한의 존재도,
모두 도의 품에 있는 것이다.
있음 유(有)과 없음 무(無)
둘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있고서야, 비로소
없을 수 있고,
없고서야, 비로소
있을 수 있다.
배 고프냐?
이제
배 부를 수 있겠구나!
배 고픔의 시작이
배 부름이요,
배 부름의 시작이
배 고픔인 것이다.
노자의 진리다.
세상의 쉽고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다.
노자는 너무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
반어적 효과를 극대화한
‘상생의 화법’이다.
가는 건
머문 탓이다.
한 쪽이
오르면
다른 쪽은
내려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둘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이 하나요.
추와 미가 하나다.
세상엔 만물이 있지만,
하나의 도만 있다.
하나의 도만 있다는 건
결국
세상이 하나요, 그 세상의
만물이 하나란 의미다.
유가 있어 비로소
무가 있다는
상생의 도리를
그대로
화법에도 적용한
‘상생어법’이다.
처음 이상한 이 말은
곱씹을수록
논리에
이치에
맞는다.
“네가 선해지려는 것은
그 악을 알기 때문이요.
네가 예뻐지려는 것은
네가 그 추함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악함은 착함의 모자란 부분이요,
추함은 아름다움의 부족분이다.
생과 사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다.
삶은 죽음은 앞면이요,
죽음은 삶의 뒷면이다.
우리는 어쩌면
매일
삶과 죽음을 되풀이 하며
사는 지도 모른다.
죽음 뒤에
우리는 어쩌면
죽음과 삶을 되풀이 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유무가 본래 하나 듯,
삶과 죽음도
본래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