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의 선택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가 자칫 공산당 노선의 변화를 예고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마오쩌둥이 선택이다.
‘전쟁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전장의 미묘한 변화에 민감하고 가장 유효적절하게 반응해 생존을 해온 마오쩌둥의 본능적 선택이었다.
중국 공산당 사료에 따르면 마오쩌둥이 당시 위기의식을 느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류샤오치였다.
류샤오치는 자신이 믿고 대외적으로 후계자를 사실상 확정해 놓은 상태인데, 그런 류샤오치가 마오쩌둥이 자신과 당 내 노선을 달리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특히 당 중앙공작 회의에서 류샤오치는 새로운 청렴운동을 통해 당내 불순한 무리를 솎아 내려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심지어 마오쩌둥의 말을 중간에 끊고 청렴운동은 말 그대로 경제적 관점에서만 다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또 이 회의에 마오쩌둥이 공산당 내 업무처리 능력을 인정한 덩샤오핑이 류샤오치와 한 부류였다. 심지어 좋은 의도를 가장(?)한 채 - 적어도 마오쩌둥의 그리 생각했을 수 있다고 당 사료들은 당대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감기 몸살로 몸도 불편하니, 회의 참석을 하지 않으면 어떠냐?”고 마오쩌둥을 설득하기도 했다.
자신이 참석을 한 상태에서도 류샤오치는 대약진운동 등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심지어 정풍운동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을 공공연히 반대했다. ‘아니 내가 참석하지 않았으면, 회의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이런 생각에 마오쩌둥은 등골이 서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마오쩌둥은 ‘모든 어지러운 것들을 한번에 정리하자’고 마음을 먹는다. 바로 민중을 동원한 ‘문화대혁명’이 그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의 공식 사료에 따르면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 사이 마오쩌둥은 중국 현대사를 피로 묽들 게 한 ‘문화대혁명’을 발동한다. 동시에 베이징에서 당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한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회의의 모든 것은 앞서 4월 마오쩌둥이 항저우에서 개최한 중앙정치국 상무확대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재차 확인하는 수준으로 진행됐다.
그리고 5월 16일 회의는 훗날 소위 ‘5^16통지’라 불리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통지’를 채택한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공식적인 진행을 확인하는 통지였다. 류샤오치는 모든 것을 어쩔 수없이 수용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고 마오쩌둥은 베이징에 머물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류샤오치는 혼란으로 치닫는 정국을 어떻게든 수습하려 하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이미 마오쩌둥이 쏘아올린 적색 신호탄은 전국의 홍위병들을 광분케 하고 있었다.
류샤오치는 정국 불안을 마오쩌둥에서 보고하며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지만, 마오쩌둥은 마치 의도적으로 회피하듯 “알아서 잘하시게”하는 반응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름을 부은 것이 1966년 6월 소위 베이징대 대자보 사건이 터진다. 니에위안쯔가 5월 25일 ‘쏭수어, 루핑, 펑페위안 등은 문화대혁명시기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라는 제목의 실명 비판 대자보를 써 붙인 것이다.
처음 단순한 대학 내의 시사 비판 대자보 정도라 여겨졌던 이 대자보는 6월 1일 중앙인민라디오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마오쩌둥의 생각을 대변한 대자보로 승격하게 된다. 라디오 방송은 대자보 전문을 낭독하는 데, 이는 전국 인민 모두가 듣는 대중매체에서 전파된 최초의 대자보였다.
다음날 인민일보는 이 대자보를 “베이징대학의 대자보가 숨겨진 비밀을 들춰내고 있다”는 편집자 주와 함께 전면 게재했고, 곁에는 ‘대자보를 환호한다’는 평론까지 달았다.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를 ‘문화대혁명의 제일 대자보’라고 칭했다. 이후 중국 천하는 “橫掃一切, 造反有理”(횡소일체, 조반유리: 모든 것을 쓸어버리자, 체제전복의 이유가 있다) 구호로 뒤덮였다.
류샤오치는 긴급히 덩샤오핑과 함께 마오쩌둥을 만난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냉담하기만 했다. “그저 잘 대응하시오”라고 하기만 했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류샤오치는 홍위병으로 들끓는 대학에 공작조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마오쩌둥의 생각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1966년 7월 24일 마오쩌둥은 중앙상무회의와 문혁소조 회의를 개최한다. 류샤오치에 대한 마오쩌둥의 공식적인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덩샤오핑을 실명 거론하며 비판한다. 회의는 류샤오치가 대학에 파견했던 공작조 철수를 결정한다. 류샤오치가 진행해온 많은 사업들이 이 회의를 통해 부정된다.
바로 이어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제 8기 11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린다. 류샤오치의 공식적인 실각이 가시화되는 회의다. 마오쩌둥은 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의 한 분수령이 된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문장을 발표한다.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이 폭파하고 싶어하는 사령부의 본령이었다. 류샤오치의 당서열을 2위에서 8위로 추락한다.
류샤오치는 서슬 시퍼런 마오쩌둥의 공세에 숨죽이며 말한다.
“당의 지시에 복종할 것을 맹세합니다. 모든 과오를 깨닫도록 노력하며 당에 불리한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류샤오치의 불행은 이 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