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4월 1일 류샤오치에게는 ‘사면홍기’의 날이었다. 중국 전국 신문에 치번위가 쓴 ‘애국주의냐, 매국주의냐’라는 제목의 긴 장문의 평론이 게재된다.
내용은 청궁비사라는 영화 평론을 빗댄 류샤오치 비판 문장이었다. 문장은 류샤오치가 청궁비사를 애국주의 영화라 평했다면서 류샤오치의 8대 죄악들을 열거했다.
류샤오치는 내용을 읽고 신문을 구겨서 바닥에 던진다. “아니 이 전부가 거짓말이다. 내가 언제 ‘청궁비사’ 영화를 애국주의 영화라 평한 적이 있었던가? 내가 하지도 않은 말들을 했다고 하다니, 이는 정말 무고다. 당내 투쟁이 언제부터 이렇게 하류에 머물렀던가?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용어는 내가 7차 전인대에서 처음 언급한 것이다. 그 뒤 누구보다 마오쩌둥 사상의 확산에 기여해왔다. 이제와서 내가...”
류샤오치는 억울했다. “내 발언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면, 누군가는 나를 변호해야 한다. 당 중앙 간부가 변호를 해야 하고, 인민들이 변호를 해줘야 한다. 지금이야 말로 내게 이 나라, 이 인민, 이 당의 공정한 몇마디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현실은 류샤오치의 소망과 달랐다. 1967년 4월 6일 저녁 홍위병 조반파가 류샤오치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류샤오치에게 앞으로는 식사도 혼자 해서 먹고, 청소도 혼자 해야 한다고 명했다. 이 자리에서 조반파들은 신문에 언급된 류샤오치의 8대 죄악에 대해 심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류샤오치는 이런 심문의 자리가 오히려 반가웠다. 자신에 대한 무고를 밝힐 기회라 여겼기 때문이다. 류샤오치는 심문장에서 8대 죄악에 대해 하나하나 반론을 소리높여 외쳤다. “모두가 거짓이다. 이미 당 중앙 모두가 누가 옳은 지 아는 일들이다.”
다음날 류샤오치는 내친 김에 자신의 변론을 써 당중앙에 보냈다. 그리고 대자보로 써 중난하이에 내걸었다. 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류샤오치의 대자보는 찢겨져 사라졌다. 이는 당내 언로를 막은 것으로 류샤오치를 지극히 낙심하도록 만들었다.
본래 류샤오치는 밤새 일하고 오전에 늦잠을 자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극심한 심적 상처에 생활 습관마저 바뀌면서 류샤오치의 건강도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설상가상의 일이 발생한다. 칭화대 조반파가 아내 왕광메이에 대해 ‘30만 비판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류샤오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류샤오치는 분노했다. “난 당을 위해 당 조직에 일을 했다. 내 잘못이라면 내가 책임지면 된다. 왜 조직 밖에 있어 아내가 내 대신 욕을 봐야 하는가. 누구나 잘못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문화대혁명이라고 잘못이라 없는가. 잘못이 있다고 하는 것조차 막는다면 더 큰 잘못아닌가.”
류샤오치는 자녀들을 불러 마지막 말을 남긴다. “내가 혹시 잘못된다면 유골을 바다에 뿌려다오. 내 세상의 바다에서 세상이 공산화되는 것을 지켜보련다. 너희도 앞으로 당과 인민을 위해 일하고 함께하기를 바란다.”
1967년 7월 18일 저녁 수십만의 홍위병 조반파들이 류샤오치와 왕광메이를 중난하이 두 식당에 각각 세워놓고 두시간여에 걸친 비판을 벌인다. 70순의 류샤오치를 허리를 반쯤 굽힌 채 비판 중에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했다. 혹 류샤오치가 입을 열려고 하면 옆에 있던 조반파 학생이 원고를 들어 류샤오치의 얼굴을 때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류샤오치의 얼굴에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