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이육사의 ‘교목’이다. 지난 1940년 '인문평론' 7월호에 발표됐다. 구구절절 의연함이 묻어있다. 거센 바람, 세월의 풍파 그 속의 교목이 주는 감정이다. 사실 교목보다 더 의연한 것은 절벽 위의 고송(孤松)이다. 거센 바람 속에 위태로운 모습으로 묘하게 고부란진 몸으로 하늘을 받들 듯 핀 외로운 소나무다. 꼬인 몸은 그가 견딘 세월이요, 고통의 무게다. 성경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모습이라 할까. 한자 의연할 의(毅)의 모습이 그렇다. 의는 회의자다. 거대하고 무서운 산돼지 앞에 채찍은 든 이가 선 모습이다. 정말 골리앗을 길들이는 다윗의 모습이다. 한자 의(毅)처럼 의연함의 가치는 우리 동양사회 면면이 이어진다. 사실 다윗처럼 굳이 그렇게 숭고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보다 높은 키의 종이뭉치가 실린 리어카를 끌면서도 길에 버려진 깨진 병을 주어 굳이 분리수거 쓰레기통에 넣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흰 머리를 모자 속에 감추
공기가 없으면 죽는다. 그런데 그 공기를 사람들은 소중한줄 모른다. 너무 흔한 탓이다. 흙이 없어도 사람은 죽는다. 아니 생명이 자라질 못한다. 그 한 줌 흙을 사람들은 소중한줄 모른다. 너무 흔한 탓이다. 본래 귀한 것은 드문 게 아니다. 네 주변에 있는 흔하디흔한 것이다. 너무나 귀하기에 귀해지면 너무나 많은 이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다. 한자 귀(貴)는 일찌감치 감치 갑골자에 등장해 귀함이 뭔지 잘 알려준다. 한 줌의 흙이다. 양 손으로 받쳐들은 흙이다. 흙은 만물의 고향이다. 흙에서 자라고 흙으로 돌아간다. 한 줌 흙에서 새싹이 피고 거대한 나무가 된다. 흙은 그 뿌리로 더욱 공고해지고 단단해진다. 잎은 땅위에 떨어져 거름이 돼 다시 싹이 되고 나무가 된다. 한 줌 흙에서 나온 싹은 열매를 맺고 사람을 살린다. 사람도 죽어 흙으로 돌아가 싹을 키운다. 바로 자연이 만든 생명의 순환이다. 한 줌 흙에서 시작하는 거대한 고리다. 장강의 남상(濫觴)처럼, 거대한 생명의 순환 고리의 첫 출발은 바로 한 줌 흙이다. 넘치도록 많아도 귀하디귀한 건, 샤넬 백도 번뜩이는 보석도 희귀한 약초도 아닌 한 줌의 흙뿐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어느 날 인류 문명의 종말이 왔다. 모든 문명이 갑자기 사라졌고 인류는 순식간 원시시대로 돌아갔다. 마치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인류는 이전의 모든 문명을 잊었다. 겨우 무리를 져 사냥을 하는 정도였다. 원시 동물 그 자체였다. 인류는 과연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지구는 그대로지만 문명을 잃은 인류는 당장 무엇을 먹어야 할지도 몰랐다. 나무의 열매 가운데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 들판의 어떤 것을 먹어야 배를 채울지 몰랐다. 자칫 독이라도 든 과실을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답은 다양하겠지만 최소한 한자를 아는 인간 부족이라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한자 속에는 생명의 부호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한자에 생명의 부호가 있다니, 사실이다. 한자에는 이 글자만 알면 어떤 것을 인류가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생명의 부호는 벼 화(禾)다. 벼 화는 상형자다. 벼, 보리, 수수 등 곡식의 모양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들판의 곡식들을 상징하는 글자다. 인류의 농경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당연히 일찌감치 갑골자에 등장을 한다. 다시 인류의 문명이 사라진 가상세계로 가보자. 혼돈의 지구가 안정을 되
나무로 물통을 만들어 쓴다. 물의 양을 얼마나 담느냐가 이 나무로 만든 물통의 활용도를 결정한다. 물통의 물의 양은 무엇이 결정하게 될까. 가장 긴 나무판일까? 아니다. 가장 수가 많은 크기가 비슷한 나무판일까? 아니다. 가장 짧은 나무판이다. 가장 짧은 나무판이 이 물통이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결정하게 된다. 바로 용도를 보는 법이다. 쓸모를 보는 법이다. 한자 쓸 용(用)이 가르쳐 주는 지혜다. 쓸 용(用)은 상용자다. 나무판을 이어서 만든 통이 바로 쓸 용의 의미다. 오래된 글자로 갑골문에 등장한다. 이미 갑골문에서 쓰다는 의미로 쓰인다. 중국의 첫 사전인 설문해자에서는 용(用)의 의미를 복(卜)과 가운데 중(中)에 따른다고 설명한다. 설문해자가 만들어질 당시 갑골자는 아직 땅 속에 있었다. 자연히 오류가 많다. 어떻게 나무통이 ‘쓰다’는 뜻이 됐을까. 중국 쪽 설명은 물통은 생활용품으로 자주 쓰이면서, 물통이라는 한자 용(用)에 쓰다는 뜻을 갖게 됐다고 한다. 설명이 좀 궁색해 보인다. 미술에서 형체를 만드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겉에서 깎아 가는 법과 덧붙이는 방법이다. ‘쓸모’를 알려면 같은 방법이 유용하다. 쓸모를 결정하는 한가지
‘민주’ 청춘의 대학생 시절 가슴을 뛰게 한 단어다. 1980년대 대학생 가운데 누가 있어 이 단어에 술 한 잔 기울이지 않은 이 있으랴.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 민주여 백성 민, 주인 주의 민주여. 하지만 이 민(民)이라는 단어 자체가 본래 그렇게 가슴 벅찬 단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백성의 민(民), 사실 글자 하나가 핏빛 역사를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갑골자에서 백성 민(民)은 상형자다. 눈을 날카로운 바늘로 찔러 피가 흐르는 모습이다. 아래로 바로 위로 찌르는 게 바늘이요, 사선으로 아래로 길게 뻗은 게 핏물이다. 잔혹한 형벌을 받는 모습이다. 본래 이 모습은 노예를 만드는 장면이라고 한다. 과거 전쟁에서 적을 사로잡으면 노예로 만들었다. 팔 다리를 족쇄로 묶기도 했지만 그러면 힘을 다 쓰지 못해 생산력이 줄었다. 그래서 고대 생각해낸 방법이 눈을 찔러 시력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시력이 떨어져 눈앞만 보도록 하면 힘을 힘대로 쓰면서 저항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백성 민(民)은 노예 민(民)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 글자가 어떻게 백성 민(民)이 됐을까? 동양에서는 주나라와 춘추전국 시대 노예와 백성 민(民)의 역사적
집, 한국인 뿐 아니라, 중국인, 일본인 등 동양인 가산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게 바로 집이다. 흔히 부동자산, 부동산이라 한다. 대략 자산의 70% 이상이다. 70% 가량이면 삶이 안락하다. 80% 가량이면, 삶이 팍팍하고 90% 가량이면, 삶이 쪼들리고 100% 이상이면 삶이 버겁다. 자산에서 집값의 비중이 삶의 행복을 결정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무리해서 집을 가지려는 이유는 집이 없으면 특히 자산 가치가 큰 집이 없으며 평생 자산을 제대로 모으기 힘들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람은 달팽이마냥 집의 부담을 그렇게 지고 살아야 하는 운명인지 모른다. 운명이라면 참 서글픈 운명이다. 한자는 이런 고민이 생각보다 오래됐음을 보여준다. 갑골자의 집 가(家)는 집 안에 돼지를 키우는 모습이다. 돼지는 가축, 가족 생산물의 대명사다. 집은 생계를 이어가는 경제 활동의 첫 단위, 최소 단위였던 것이다. 그런 집에 모여 그 것을 지켜가는 게 바로 가족이다. 가족에는 혈연관계이기 보다 경제적 공동체라는 개념이 먼저 있다는 게 새롭다. 물론 그 경제적 공동체의 첫 구성원은 피붙이다. 갑골자에서 돼지 시(豕)와 개 견(犬)의 차이는 꼬리의 길이만 다르다. 농협중앙회가
“환난은 같이해도 태평성세는 같이 하기 어렵다” 어려움은 같이 해도, 공을 나누기는 어렵다는 의미다.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로 유명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에 대한 구천의 책사 범려(范蠡)의 평이다. 범려는 BC 497년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부초산(夫椒山) 전투에서 대패한 구천을 도와 최후의 승리자로 만든 이다. 그런 그가 구천을 이렇게 박하게 평한 것이다. 본래 그렇다. 어려울 때 나를 봐준 친구라고 내가 성공해도 나를 봐주는 게 아니다. 나와 같이 성공을 일군 벗 우(友)라고 반드시 그 성공을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성공을 한 탓에 다툼이 생기고 친구와 멀어지게 된다. 사실 우리의 벗이라는 개념은 너무도 추상적이다. 감성적이고 좋기만 하다.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최근 이야기 되는 우리말 벗의 어원도 그렇다. 앞서 소개한 ‘벌거숭이를 함께 한’이라는 주장 외, 인도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우리의 벗의 옛 발음 ‘벋’이 고대 인도어, 범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범어의 벋은 ‘물’이라는 뜻이다. 물에서 옷을 벗고 노니 벌거숭이라는 의미와 닿는 면이 있다. 벋은 인도 현지에서 ‘빠니’라고 발음됐는데, 이 인도어가 유럽으로 건너가 몸을
친구를 부르는 여러 이름이 있다. 친구(親舊)도 있고, 붕우(朋友)도 있다. 순 우리말론 벗이 있다. 여기서 친(親), 붕(朋), 우(友) 모두가 가까운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먼저 우리의 벗은 오랜 시간을 함께 한 이다. 벌거숭이 시절을 같이 보낸 이를 벗이라고 한다. 본래 사람은 겪어 봐야 알고, 말은 오래 달려 봐야 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이의 마음을 아는 게 친구다. 사실 붕우보다 친구가 이런 벗의 정서에 더 가깝다. 친 자의 본의 때문이다. 친(親)은 어려움을 겪는 이를 찾는 마음이다. 비교적 늦게 세상에 등장한다. 금문에서 친 자는 형틀에 꽂힌 사람이다. 사람 인(人)을 바늘 신(辛)이 꿰뚫고 있다. 흐르는 피가 보일 정도로 잔혹한 글자다. 그 옆에 견(見) 자가 붙었다. 고문 받는 이를 바로 옆에 ‘본다’는 뜻이 바로 친(親)인 것이다. 고문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최소한 강한 권력자의 형법에 의해 고통을 받는 자다. 그런 자는 누구도 선뜻 만나기 어렵다. 혹시라도 연루되지 않을까 두려운 탓이다. 그런데 그런 자를 선뜻 만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피를 나눈 가족이다. 또 가족과 같은 이들이다.
삶은 무엇인가? 죽음은 또 무엇인가? 철학의 가장 기본적 질문이다. 두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의 철학과 신학이 시작됐다. 철학은 여전히 사람 속에 답을 찾고 신한은 그 답을 신에게 미뤘을 뿐이다. 생과 사는 그리도 어렵고 난해한 문제다. 한자의 생과 사는 답은 아니지만 그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을 보여준다. 사실 문제는 답이 아니다. 오직 문제가 문제인 것이다. 문제가 뭐냐에 답이 달린 것이다. 한자의 생은 싹이다. 땅에 솟은 새싹이다.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하는 상형자다. 죽음은 한편의 동영상이다. 생보다는 복잡한 그림이다. 단상 위 시체를 사람이 지켜보는 모습, 임종의 순간이다. 두터운 땅을 뚫고 솟아난 새싹, 그 여린 새싹이 어이 쉬울까? 땅 속에는 뿌리가 자리 잡고 있다. 싹은 뿌리가 내린 뒤 솟아나는 것이다. 삶이 그렇다. 어찌 뿌리 없는 생이 있으랴. 그래서 생은 외롭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홀로 뿌리를 내리고 두터운 지표를 뚫어야 한다. 새는 껍질을 깨는 노력을, 동물은 자생의 순간까지 수없는 몰생(沒生)의 위험을 겪어야 한다. 삶은 결국 홀로 서는 과정이다. 외로운 일정(日程)이다. 식물의 싹이 생(生)을 대표하게 된 이유다. 삶
사랑은 복잡하다. 좋아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주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주고도 모자랄까, 넘치지는 않을까 삼가고 삼가는 게 사랑이다. 난초에 물을 주듯 넘치면 썩고 모자르면 시들까 애태우는 마음, 그게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마음만 있다고 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것을 위한 행동이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책임이다. 복잡하지만 원리는 하나다. ‘마음만큼 행동하라’ 사랑이 복잡한 만큼 글자도 복잡하다. 금문에서 사랑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분명한 것은 중심의 마음 심(心)이다. 위와 아래는 모두 사람이다. 사람의 움직이는 모습이다. 변화과정에서 위는 손이 됐고, 아래는 발이 됐다. 비슷한 원리로 만들어진 글자가 기(企)다. 갑골자의 기는 사람이 두 발로 일어선 모습이다. 사람 아래 두 발의 모습이 강조돼 있다. 두 발로 서는 것 사람의 모든 움직임의 시작이다. 두 발로 서야 안정될 수 있고 두 발로 서야 멀리 볼 수 있으며 두 발로 서야 나아가 걸을 수 있다. 걸어가야, 나아가야 목적지에,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은 일을 일으키는 것, 일이 안정되는 것, 일이 이어지는 것이다. 마음으로 일어나면 사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