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원위안(姚文元)의 '해서파관(海瑞罷官)' 비판은 시간이 갈수록 정치화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周恩来 ) 등 중난하이 지도자들은 여전히 그 정치화는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피하려 노력했다.
물이 차오르면 물속에 있는 모든 것은 절로 젖는다. 피신처는 물밖에 있다. 물길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물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왕왕 사람들은 차오르는 물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려 노력한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는 점점 가팔라졌다. 저우언라이 등 중난하이(中南海)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인식은 했지만, 그 위험 정도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1966년 2월 6일 열린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보고는 그런 인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일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에서 일상 업무를 보던 덩샤오핑(邓小平), 류샤오치(刘少奇) 등과 함께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문화 학계의 토론 현상에 대해 보고를 받는다. 문화혁명오인소조의 조장은 베이징 시장 펑전(彭真)이었다.
펑전은 보고에서 "작금의 토론(해서파관에 대한 비판과 이 비판에 대한 비판)은 순수한 학술적 토론이고 정치적 토론이 아니다. 해서파관의 작가 우한(吴晗)은 펑더화이(彭德怀)와 어떠한 관계도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저우언라이 등도 펑전의 보고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펑전은 이 내용을 정리해 2월 8일 당시 우한(武汉)에 머물던 마오쩌둥(毛泽东)을 찾아가 보고를 한다. 마오쩌둥 역시 별다른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펑전은 2월 12일 정식으로 관련 내용을 정리한 정식 보고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속내는 달랐다. 중국 사료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이때 펑전과 베이징에 대해 "베이징은 물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독립 왕국"이란 인상을 가지게 됐다. "펑전도 가만히 두면 안 되겠어." 바로 이 때 마오쩌둥의 마음속에 싹튼 생각이다.
1966년 3월 중국 정치 상황은 더욱 긴박하게 돌아간다. 베이징을 벗어나 지역 농촌의 농업생산을 살피던 저우언라이 역시 3월 들어서는 당 중앙의 회의가 빈번해지면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마오쩌둥은 3월 17일부터 20일간 경치 좋은 항저우(杭州)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연다. 당시 회의에는 저우언라이, 류샤오치, 덩샤오핑, 펑전 등이 모두 참석했다.
마오쩌둥은 회의에서 당시 계급투쟁이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 출판, 신문, 문예, 영화 등 각 분야에 계급투쟁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마오쩌둥은 회의에서 당시 중앙선전부를 강력히 비판했다. "좌파를 지지하기는커녕, 오히려 좌파를 억압하고 있다"라는 지적이었다.
3월 31일에는 상하이(上海)에서 캉성(康生)이 베이징에 와 저우언라이와 펑전 등에게 28~30일 있었던 마오쩌둥의 3차에 걸친 대화의 내용을 상세히 전한다. 캉성은 "마오 주석은 펑전 베이징 시장과 루딩이(陆定一) 문화부 부장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면서 비판했으며, 만약 계속 나쁜 이들을 비호한다면 베이징 시 위원회, 중앙선전부, 문화혁명오인소조 등을 모두 해체할 것이라 경고했다"고 전했다. 캉성은 또 마오쩌둥이 "야오원위안의 비판에서 시작된 계급투쟁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정치 투쟁이 중요하던 시기가 아니었다. 이제 막 대약진 운동의 피해에서 벗어나려 하던 시기인 1966년 3월 8일 중국 허베이성 싱타이(邢台)에서는 7.2 규모의 대형 지진이 발생, 수많은 희생자와 이재민이 발생했다. 저우언라이는 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바로 피해지역 일대를 돌면서 구재 활동을 독려한다. 이어 4월 2일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 중앙서기처에 편지로 보고를 한다.
4월 1일 2차 지진 현장에 도착해 현지 상황을 살폈고, 저녁에 싱타이에 도착했다. 2일에서 6일까지는 한단(邯郸)등지를 시찰할 예정이다. 앞으로 현지 지역을 상황을 살피며 열흘에 한번 정도 베이징에 돌아갈 생각이다. 급한 일이 있으면 펑전 동지에게 연락하도록 하시오.
이런 저우언라이의 계획은 다시 정치 계급투쟁이 격화되면서 무산되고 만다. 중앙서기처가 학술 비판과 관련한 회의를 4월 9, 11, 12일에 열기로 했다. 저우언라이는 이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회의에서 캉성은 다시 마오쩌둥의 비판 내용을 전한다. 회의는 앞서 당 중앙이 지지했던 문화혁명오인소조의 보고서를 취소한다. 이 같은 보고서가 당 중앙 의견으로 배포되는 오류를 저지른 것에 대해 저우언라이 등 당 중앙 지도자들은 반성을 해야 했다.
이렇게 문화대혁명의 불길을 그야말로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타오른 불길은 모든 것을 가차 없이 삼키기 시작한다. 그 혁명의 불길 속에 1차 희생자들의 윤곽도 점차 분명해졌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뤄루이칭(罗瑞卿) 당시 국방위원회 부주석은 사인방이 주도한 확대회의를 통해 당정 직무를 박탈당했다. 1962년 서기처 서기가 된 이래 문화부장을 겸임했던 루이딩 역시 사인방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된다. 1956년 8기 일중전회를 통해 중앙서기처 후보 서기에 오른 양상쿤(杨尚昆)도 옥살이를 하게 된다.
다음 이야기는 이들이 어떻게 문화대혁명의 불길 속에서 타들어 갔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