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마오쩌둥의 '통지'는 문화대혁명 시동의 첫 명령이었다.
그 명을 받는 행동이 바로 베이징대학에서 나온다. 베이징대학에 첫 대자보가 붙었다. 베이징대 당 위원회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호응하듯 마오쩌둥(毛澤東)의 전국 홍위병 총궐기 명령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도 나온다. 이로써 중국 전역이 붉은 깃발로 물들게 된다.
1966년 5월 4일부터 26일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무산계급의 혁명은 계속되야 한다"고 지적한다. "남아 있는 우파 수정주의를 제거하고 또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파 수정주의를 죽순의 껍질처럼 벗기고 또 벗겨야 무산계급의 순수함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이 말은 바로 문서로 정리돼 전국에 시달됐다. 그해 5월 16일의 일이다. 문화대혁명의 전면적 개시를 선언한 이 통지가 이른바 '5·16 통지'로 불리는 이유다.
통지가 전파되고 응답은 의외의 곳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나왔다.
5월 25일 베이징대학에 대자보가 붙었다. 통지가 하달된 지 불과 열흘이 지나서였다. 베이징 중앙정치국 회의가 미처 끝나지도 않은 날이었다. 대자보 제목은 '루핑(陆平), 쏭숴(宋硕) , 펑페이윈(彭佩云)은 문화혁명 때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였다. 루핑은 당시 베이징대학 당 위원회 제1서기 겸 교장이었고, 쏭숴는 베이징시 대학 공작부 부부장이었다. 펑페이윈은 베이징대학 당 위원회 부서기였다.
전국에 무산계급의 투쟁이 불처럼 번지고 있을 때 베이징시 대학 유관 부서와 베이징대학 내 당 위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학생들의 열정을 통제만 하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무산계급 독재를 하는 당의 모습인가?
니에위안쯔(聂元梓) 등 7인이 쓴 대자보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대자보는 실명과 실재 행위들이 자세히 적시돼 비판했다. 시진핑 국가주석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실명 고발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미 문화대혁명 때 등장한 비판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파문은 지금보다 당시가 더 컸다.
대자보 사태를 보고받은 저우언라이(周恩来)와 마오쩌둥의 반응은 극히 상반된 것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즉시 사람을 보내 상황을 파악하는 한편, 니에위안쯔의 대자보를 통한 당 위원회 간부들에 대한 비판은 당 중앙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라고 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대자보가 어찌 니에위안쯔 정도가 썼을까? 그녀의 뒤에는 캉성(康生)과 장칭(江青) 등이 있었다. 캉성은 6월 1일 관련 대자보 내용과 사건의 전개를 정리해 바로 항저우(杭州)에 있는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한다.
이야기를 들은 마오쩌둥의 반응은 저우언라이와 완전히 달랐다. 마오는 이 대자보야말로 "전국의 첫 마르크스 레닌주의 대자보"라 극찬을 한다. 바로 캉성과 천보다(陈伯达)에게 "인민일보(人民日报)에 대자보 전문을 게재하고 전국 각지에 알리라"고 명한다. 대자보는 6월 2일 '베이징대 대자보를 환영한다'는 논평과 함께 인민일보에 실린다.
이는 불에 기름을 뿌린 격이었다. 전국 각 학교 벽마다 대자보가 물결쳤다. 니에위안쯔는 순식간에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베이징대의 문화대혁명은 그녀의 손에 주도됐다. 사실 이 때문에 그녀는 훗날 중국의 차기 지도자에 오르는 덩샤오핑(邓小平)과 불구대천의 원한을 맺는다. 당시 베이징대에는 덩샤오핑의 아들 덩푸팡(邓朴方)이 재학 중이었다. 덩샤오핑이 실각을 한 뒤 아들 역시 홍위병들의 비판을 받는다. 그러다 그만 불행하게도 기숙사에서 떨어져 하반신 불구가 되고 만다.
덩샤오핑은 본래 어떤 결정에도 개인감정을 내세우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부친이었다. 니에위안쯔에 대해서만큼은 예외였다고 한다. 결국 니에위안쯔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해야 했다.
아직 그 날은 오직 않았다. 1966년 5월 이후 10년간의 문화대혁명 기간은 니에위안쯔에게 생애 최고의 나날이었다. 마오쩌둥을 직접 만나 격려를 듣기도 한다. 모두 1966년 5월 25일 한 장의 대자보로 인한 일이었다. 한 장의 대자보, 누가 그 폭발력을 알 수 있었을까?
저우언라이, 류샤오치(刘少奇), 덩샤오핑 가운데 누구도 아직 이 대자보의 힘을 알지 못했다. 최소한 이어지는 대자보가 나오기 전까지 많은 이들에게 그저 아직 정치적으로 미숙한 대학에서 벌어진 사건에 불과했다. 저우언라이도 훗날 대자보 사건에 대해 묻는 천이(陈毅)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자보가 인민일보에 실린다는 사실을 직전에 캉성이 전화로 전했소. 평론이 실린다는 것도 그때야 알았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우언라이나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은 아직 학생들의 혼란을 막고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환상이 정말 산산조각 난 것은 역시 또 하나의 대자보 때문이었다. 그 대자보가 나오는 것은 8월 1일, 베이징대 대자보가 나온 뒤 불과 두 달가량 지난 시점이었다.
인민일보가 베이징대 대자보를 게재하면서 전국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긴박한 순간 아쉽게도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을 떠나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6월 15일에서 6월 말까지 루마니아, 알바니아 순방에 나선다. 국내 정치 상황이 급박했지만, 이 외교 일정은 이미 한 차례 연기가 된 터였다. 더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7월 1일 저우언라이가 베이징에 돌아왔을 때 중국은 말 그대로 혼란 그 자체였다. 전국 곳곳의 학생들이 교사를 운동장으로 끌어내 비판을 했다. 온갖 모욕을 주고 그것을 계급 투쟁이라 불렀다. 그런 상황에서 당 중앙의 위기 인식은 정말 순진한 것이었다. 아직도 당이 혁명을 주도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은 당의 영도 아래 진행되는 혁명을 주장했다. 각 대학, 중고등학교 혁명 현장에 당의 공작조를 투입해 좀 더 질서 있는 혁명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천보다 등은 강력히 반대했다. 지금 혁명은 무산계급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인데, 이를 당이 영도하게 되면 이런 순수성이 다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천보다, 캉성 등은 이미 모든 혼란의 배후에 있었다. 또 그들의 배후에는 더 큰 인물, 마오쩌둥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7월 28일 베이징에 와 베이징 제2외국어학원 홍위병을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모든 혁명이 100% 옳을 수는 없다. 문화대혁명 역시 100% 옳지 않다. 100% 옳다고 누가 감히 보장할 수 있는가?" 학생들의 운동에 좀 잘못이 있더라도 문화대혁명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야 한다는 의미였다.
1966년 8월 1일 드디어 운명의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체회의가 열린다. 회의에서 그 유명한 마오쩌둥의 '사령부를 폭파하라. 나의 대자보 한 장'이 발표된다. 제목부터가 무시무시하다. 마오쩌둥은 이 대자보에서 폭파시킬 사령부가 현 지도부라고 분명히 언급한다. 그동안 '우리 곁의 자본주의 수정주의자'라고 했던 이들이 누군지를 밝힌다.
그제서야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은 그동안 마오쩌둥이 언급해온 우파 수정주의자가 누군지 분명히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