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문화대혁명은 중국 대륙 전체를 불태운다. 곳곳의 홍위병들이 기존의 모든 권위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간 중국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은 문화대혁명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한 여인의 한(恨)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장칭(江青, 1914~1991)이 그 주인공이다.
장칭은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으며 성장한 후 생계를 해결하고자 배우가 됐고, 더 유명해지려는 욕망으로 남성 편력도 심했다.
장칭은 두 번째 남편이었던 중국 공산당 학생 지도자 위치웨이(俞启威)의 권유로 1933년 공산당에 가입했다.
위치웨이는 18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 위정셩(俞正声)의 부친으로 신중국 첫 톈진 시장을 역임한다.
장칭과 위치웨이의 결혼 생활은 위치웨이가 국민당 정부에 체포되면서 끝이 난다. 장칭은 이후 상하이로 갔고, 거기서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때 만난 이들이 당대 유명 영화평론가 탕나(唐纳)와 유명 배우 장민(章泯)이다. 이 때 장칭은 이름을 란핑(蓝苹)으로 바꿨다. '푸른 사과'라는 의미다.
장칭은 탕나의 도움으로 당대 유명 영화잡지인 뎬퉁(电通)에 소개된다. 또 장민의 조력에 힘입어 영화 '왕라오우(王老五)'를 성공시킨다. '왕라오우'는 아직도 그 필름이 남아 있다.
영화계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성 편력이 장칭의 경력을 망가뜨린다. 본처와 이혼한 장민이 자녀 등 가족들과도 결별하게 됐고, 탕나는 장칭 때문에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한다. 결국 추문이 상하이 전역에 퍼졌고, 장칭은 더 이상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힘들어지게 된다. 결국 장칭은 1937년 여름 상하이를 떠나 당시 공산당의 근거지였던 옌안(延安)행을 선택하게 된다.
장칭은 옌안 도착 신고를 하면서 이름을 장칭으로 바꾼다. 청출어람의 의미였다고 한다. 당시 옌안은 자급자족을 해야하는 빈곤한 지역이었다. 옌안의 부녀들도 모두 팔을 걷고 생산활동에 참여했다. 대부분 여성들이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공산당과 함께 투쟁했고 국민당과의 전쟁을 치른 이들이었다.
이들의 눈에 장칭은 비호감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비호감의 여성이 당시 옌안의 최고 실력자,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毛泽东)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것은 달라지게 된다.
마오쩌둥과 장칭이 어떻게 서로 처음 알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장칭 전기이자 평론인 '장칭전'에 나오는 것으로 장칭이 1938년 옌안에서 경극을 공연했는데, 당시 극단을 격려하던 마오쩌둥과 알게 됐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옌안의 천주교 교회에 설립됐던 중앙당교에서 마오쩌둥이 철학 강의를 했는데 그 때 알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칭은 1937년 11월 중앙당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전문가들은 시간적으로 두 번째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어쨌든 둘은 순식간에 가까워졌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둘이 쉽게 사랑에 빠지게 된 데는 장칭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마오쩌둥의 외로운 결혼생활도 한 몫을 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허쯔전(贺子珍)과 결혼 상태였다. 그런데 둘 사이는 감정이 나빴고, 허쯔전은 병치료를 핑게로 소련에 가 있어 마오쩌둥 혼자서 생활을 했다.
당시 마오쩌둥의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한참 건강한 남성이 매일 고된 업무에 시달리며 외로운 생활을 하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이런 마오쩌둥의 앞에 노래와 연기가 뛰어나고 말(馬)도 다룰 줄 아는 멋쟁이 신여성이 등장하니 당장 불꽃이 튈 수밖에 없었다. 둘은 곧바로 연인 사이로 발전했고, 이 소식은 당장 옌안 전체로 퍼진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마오쩌둥은 장칭과 결혼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이미 중국 공산당의 황제였다. 모든 권한을 쥐고 결정권을 휘두르는 위치였다. 그런 사람이 남성 편력도 적지 않고, 공산 혁명 경험이 일천한 장칭과 결혼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 자연스럽게 주변의 반대가 컸다. 반대라기보다 장칭에 대한 공산당의 견제였다. 마오쩌둥, 전쯔전과 함께 대장정 등 중국 공산당의 역사를 일궈온 저우언라이(周恩来), 주더(朱德) 등의 반대가 특히 심했다.
공산당은 이른바 '약법삼장(约法三章)'이라는 조건을 장칭에게 내건다. 마오쩌둥과 결혼을 하지만, 장칭이 마오쩌둥의 사랑을 배경으로 공산당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도록 제약을 가한 것이다. 사실 이 약법삼장은 중국 공산당 내 가장 은밀한 비밀이었다.
그런 것이 있다고 전해질 뿐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훗날 국민당이 옌안에서 찾아낸 자료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공산당 관계자들은 모두가 당시 나온 내용이 대략 사실일 것으로 믿고 있다.
그에 따르면 첫째 마오쩌둥과 허쯔전의 부부 관계가 유지되는 한 장칭은 마오쩌둥의 부인이 아니다. 둘째 장칭은 마오쩌둥의 생활과 건강을 챙기지만, 당 중앙에 어떤 요구도 할 권한이 없다. 셋째 장칭은 마오쩌둥의 사생활만 책임을 진다. 20년내 당 중앙에서 그 어떤 직책도 맡을 수 없다. 당의 인사문제 및 정치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
사실 어찌 보면 당 중앙으로서는 합리적인 요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장칭은 상하이 생활에서 보았듯 다른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기를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여배우로서 성공을 위해 아직 보수적이던 당시 사회에서 남성 편력까지 불사할 정도였다. 그런 장칭이 과연 당 중앙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고 인내하며 살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