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 조직의 내부 비리를 발본색원할 수 있는 고발함은 누가 언제 발명했을까? 여러 설이 있지만, 한나라 때 발명됐다는 게 인정받는 설 중 하나다. 서한의 조광한(趙廣漢)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략 기원전 74년이다.
당시 지역 토호와 중앙 귀족이 손을 잡고 지역 행정을 농단하자, 조광한이 이를 개혁하기 위한 방법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내부 비리 척결에는 고발이 최고였던 셈이다.
그럼 조광한은 어떤 인물인가? 조광한은 한나라 선제(宣帝)를 옹립하는 일에 참여해 출세가도를 달렸다.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진 뒤 선제 때 영천태수(潁川太守)가 돼 강호(强豪) 원씨(原氏)와 저씨(褚氏) 등을 주살(誅殺)했다. 본시(本始) 2년(기원전 72) 조충국(趙充國) 등 5장군(將軍)을 따라 흉노(匈奴)를 격파했다. 다시 경조윤에 올랐는데,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여 법을 집행할 때 권귀(權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적도 많았다. 결국 나중에 일 때문에 정위사직(廷尉司直) 소망지(蕭望之)의 탄핵을 받아 요참(腰斬)을 당했다.
고발함은 그가 평원 원년(기원전 74년) 영천태수가 됐을 때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영천 지역에는 토호들이 중앙 귀족과 결탁해 온갖 이익을 독점하고 있었다. 심지어 산적까지 거느리고 행패를 부려, 말 그대로 무법천지를 방불케했다.
조광한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귀족들의 불법적인 일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자료를 수집했으나 보복을 두려워한 백성들은 아무도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게 돈을 보관하는 통처럼 생긴 고발함이었다. 고발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도록 해 백성들이 마음 놓고 토호와 귀족들의 죄행을 고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고발함이 생기고 나서야 영천지역 토호들의 발호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