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6월 6일은 현 중국과 프랑스의 수교일이다. 이 수교일은 중국 내 한 인물에게는 대단히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그는 수교일에 맞춰 처음으로 주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는 이들에게 부탁해 ‘올리버’라는 이름의 커피숍을 찾아 커피 100여 잔 값과 300갑의 중국 담배를 가져다 주도록 했다.
수교를 기념하는 예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규모였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 왜 이런 예물을 준비해 전달을 한 것일까?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저우언라이였다. 중국 당시의 총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직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그럼 그는 왜 프랑스 수교를 기념에 커피 100잔 값과 담배 300갑을 선물했던 것일까?
역시 선물이 아니었다. 그럼? 사실 저우언라이가 어린 학생으로 유학시절 얻어 마시고, 얻어 피웠던 담배를 갚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중국과 프랑스의 오랜 역사가 숨어 있다. 중국과 영국, 프랑스 등은 청나라 말기부터 은원관계가 상당히 복잡하다. 영국은 중국에 아편을 밀수해 팔아먹다 아편을 불에 태운 사건을 빌미로, 중국을 침략해 전쟁을 일으켰다.
소위 ‘아편전쟁’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아편전쟁은 1839~1842년에 1차, 1856~1860년 2차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다.
영국의 중국으로의 아편밀수는 청과 무역에서 무역수지 적자가 늘어난 영국이 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었다.
영국 국고에 있던 은이 중국 청나라로 흘러 들어가자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내다 판 것이었다. 영국으로서는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아편전쟁으로 중국 청나라가 덩치만 컸지, 아무 힘도 없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도 혼자 중국을 관리하기 힘들었던 영국은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을 끌어들였다.
유럽 열강의 힘을 알게 된 청은 그 힘을 배우고자 유학생을 보냈다. 당시 청은 전국에서 500명의 어린이들을 선발해 유학생들을 보냈다. 국비 유학생이 70%, 자비 유학생이 30%였다. 이 500명들 가운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은 모두 중국의 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됐다.
공산 중국 건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저우언라이 역시 프랑스 유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