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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맑아지며, 느리게 살아가라.

목표의 50점 이상이면 성공인 게다.

목표의 50점 이상이면 성공인 게다.

서청(徐淸)하며, 서생(徐生)하라!

 

 

천천히 맑아지며, 느리게 살아가라.

생이 짧다.

하지만 

서둘지 마라. 

서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어려운 것을 피하고

쉬운 것을 

하나씩 하나씩 해가다보면,

반드시 

도달하게 된다. 

설사 목적지는 아니어도

원했던 곳에 

이르는 그 길 위 

어딘가에 

반드시 

다다르게 된다. 그게 성공 아닌가?

 

묘한 게 화초다.

잎이 항상 빛을 향한다.

그런데

언제 움직였지?

 

그래서 화분을 돌려본다.

하루가 지나고

어느새 잎은 다시

햇볕을 향해 있다.

 

하루 종일 잎을 봐도,

잎이 언제 움직였는지

알 길이 없다.

 

바람은 잎을

흔들 순 있어도

햇볕처럼

잎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한다. 하지만

어찌 흔들리지 않는 잎이 방향을 바꾸랴.

 

흔들림은 변(變)이요,

전전(輾轉)은 화(化)다.

 

변화의 묘미다.

순기자연(顺其自然)의 도리다.

 

변화는 필연이다. 원하든, 않든 일어난다.

사람, 자연 구성물 모두는 변의 요소다. 스스로 원해서 변하기도 하지만, 옆의 변에 연쇄작용으로 변을 초래 당하기도 한다.

결국 모두가 변과 화를 한다.

 

의(意)로 변(變)을 추구하지만

뜻대로 되는 변의 결과, 화는 뜻대로 되지 않기 일쑤다.

 

변(變)은 주체의 몫이지만,

화(化)는 객체의 몫인 것이다.

 

변화는 그렇게 이뤄진다.

 

마치 얼음이 녹아 물이 되고, 그 물이 흘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듯 하는 것이다. 얼음이 녹아 흐를 때 먼저 땅을 적시고,

흐르기 전에 고이기 시작하며,

강을 이루기 전에 수많은 물줄기를 모으고

비로소 저 바다를 이루듯

 

변은 작지만 화로서 자리 잡을 때

그 결과는

언제나 상상이상으로 큰 것이다.

바다를 보고서야

비로소

그 변화의 큼을 깨닫는 것이다.

 

마치 저녁 무렵 난초의 잎 방향이 달라졌음을 느끼듯 말이다.

 

바다를 보고서

저녁 난초 잎을 보고서

묻는다.

 

“누가 있어 멈춤으로 탁을 맑게 할 것인가. 누가 있어 작은 태동(胎動)이 생이 되도록 할 수 있는가.”

“孰能浊以静之徐清 孰能安以动之徐生”(수능탁이정지서청, 수능안이동지서생)

4000년 전 노자가 던진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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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드라마 막장형 늘어나며 사회 속에 여성혐오 싹 키워
동영상 홍수의 시대다. 현실을 보다 극적인 현실로 묘사하는 과거와 달리 최근 드라마는 극적인 비현실이 특징이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을 통해 현실의 불만을 대리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마약이 주는 환상과 다를 게 없다. 아쉽게도 이 쾌감은 역시 극적이어서, 쉽게 중독되고 만다. 더욱 문제는 이 비현실을 현실로 착각하는 착란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이 같은 드라마의 ‘비현실’성이 논란이 되고 있다. 비현실적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묘사는 현실 중국사회에 여성 혐오증을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미니 드라마를 본 후, 우리 엄마는 주변에 악독한 며느리가 있다고 확신했다.” 최근 한 중국 매체는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비현실 드라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보도에 따르면, 허난성 난양시에 사는 리 씨는 어머니가 **《○○ 시어머니, 모두를 놀라게 하다》**라는 미니 드라마를 보고 나서 태도가 변했다고 밝혔다. 해당 드라마는 강인한 시어머니가 악독한 며느리와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를 본 후 어머니는 “그동안 며느리가 보였던 정상적인 태도는 다 연기였고, 악독한 며느리 주변에는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