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周恩来)를 향한 장칭(江青)의 공격은 집요했다. 저우언라이는 겨우 피할 수 있었지만, 그의 비서들은 줄줄이 낙마를 해야 했다.
첫 공격에 쓰러진 인물은 쉬밍(许明)이었다. 쉬밍은 1919년생이다. 본래 이름은 주위쥔(朱玉筠), 주핑(竹苹)이란 이름을 쓰기도 했다. 1936년 공산당에 가입한 뒤 주로 저우언라이의 비서를 맡아왔다.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했다. 평소 모두가 좋아하는 밝은 성격이었지만, 모든 게 뒤바뀐 '문화대혁명'의 시기 바로 그 성격 때문에 장칭 일파의 분노를 사 사지로 몰리고 만다. 둘의 악연은 영화 '우쉰좐(武训传)'에서 시작된다. 문화대혁명 발발 직전 당시 장칭은 당 선전부 영화처 처장 직을 맡고 있었다. 중국의 모든 영화 등을 검열하는 직책이다. 쉬밍은 국무원 몫으로 가끔씩 영화 심의에 참여를 했다.
'우쉰좐'이란 영화도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운명이 박복했다. 그 주인공은 청말의 실제 인물이다. 글을 못 배워 지주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만 했던 청년이다. 그게 한이 된 청년은 20년이 넘는 세월 온갖 고생을 하며 돈을 모은다. 그 모은 돈을 들고 당대 가장 유명한 학자를 찾아가 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을 위한 무료 서당을 세워 달라고 청한다.
당대 우쉰의 일화는 황제가 알고 칭송할 정도였다. 모두가 그의 희생을 칭송할 때 장칭 눈에는 이 사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장칭의 시각은 독특했다. '무산계급 투쟁은 하지 않고, 겨우 번 돈을 들여 봉건시대 출세를 위해 글을 배우도록 학당을 세운 일이 어찌 존경받을 일인가?' 장칭의 생각이었다. 이런 독특한 장칭에 비해 쉬밍은 지극히 평범한 시각의 소유자였다. 장칭의 의견에 그래도 칭찬받을 일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장칭에 대한 이 사소한 반대로 인해 훗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될 줄 쉬밍은 꿈에도 몰랐다.
장칭의 비판을 받은 '우쉰좐'은 결국 상영금지 조치를 당한다. 중국 역대 첫 상영금지 조치를 받은 영화다. 마오쩌둥(毛泽东)이 장칭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우쉰의 고사는 별다른 게 아니다. 하지만 이 고사를 영화로 만들어 선전한다는 건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우쉰의 고사를 선전하는 게 아니라, 제작자의 당대 시각이 선전되기 때문이다"라고 평한다.
영화의 운명처럼, 쉬밍의 운명에도 불행의 그림자가 깃든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고 장칭의 쉬밍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 특히 쉬밍의 아들은 시청(西城 학생 규찰대) 활동에 참여했었다. 학생 규찰대는 국무원의 지도에 따르다 장칭 일파의 후원을 받는 홍위병들에게 탄압을 받는다. 쉬밍의 아들 역시 홍위병에 의해 구금되기까지 했다. 쉬밍에 대한 장칭의 트집잡기가 계속되면서 저우언라이는 어쩔 수 없이 쉬밍을 국무원 접대소 안내원으로 일하도록 한다.
급전직하의 인사 조치였다. 하지만 장칭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접대가 형평없다고 트집을 잡았고 결국 마오쩌둥에게 보고한다. 마오쩌둥이 저우언라이에게 한 마디를 했다. "그 친구는 일하는 실력이 형편이 없다고 하더군." 이 말을 전해 들은 쉬밍은 그야말로 절망에 빠졌다. 자신 때문에 남편도 이미 대기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어린 아들이 감금당했고, 이어 병든 노모마저 홍위병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쉬밍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다.
장칭의 독화살을 맞은 이는 쉬밍뿐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 비서 가운데는 회의에 참석하는 장칭에게 "식사를 하지 않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가 "회의 진입을 방해했다"라는 죄로 노동교화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바로 청위안궁(成元功)의 사례다.
1968년 3월 어느 날 장칭은 오후 4시쯤 저우언라이가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회의 준비를 했던 저우언라이 비서 청에게 장칭 사무실 쪽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장칭 동지가 조금 전에 일어나셔서 아무것도 식사를 하지 못하셨습니다. 회의 전에 뭐든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시겠습니까?" 청은 즉시 간식을 준비하도록 했고 장칭을 기다렸다.
예정된 4시가 됐지만 장칭은 나타나지 않았다. 저우언라이 등이 어쩔 수 없이 기다리고 있을 때 30분가량이 지나 장칭이 모습을 보였다. 청이 장칭에게 다가가 물었다. "식사 준비가 됐으니, 뭘 좀 드시고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장칭은 얼토당토않다는 듯 화를 냈다. "당신은 뭔데? 내 앞 길을 막는 거지?", 당황하는 청을 밀치고 회의장에 들어간 장칭이 저우언라이에게 따졌다. "총리, 나 몰래 하려는 회의가 뭐죠? 무슨 내용이길래 나를 문 앞에서 막고 못 들어오게 하는 겁니까?"
저우언라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청을 불러 대질 조사를 했다. 진상은 바로 밝혀졌지만, 장칭의 억지는 끝나지 않았다. 결국 청은 그로부터 수일 뒤 노동 교화를 받아야 했다.
저우언라이의 또 다른 비서 저우자딩(周家鼎)은 이름도 바꾸고 수년을 숨어살아야 했다. 그는 장칭의 문서를 늦게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보고했다가 화를 입었다. 장칭은 "저우언라이 총리가 중앙문혁소조의 일을 소홀히 한다"라는 식으로 트집을 잡았고, 린뱌오(林彪)가 장칭의 편을 들어 "중앙문혁 소조의 업무를 존중하고 시간을 지켜줘야 한다"라는 의견을 단 문서를 당 중앙 간부들에게 회람시켰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비서를 하방시킨다. 저우 총리는 비서를 떠나보내며 세 가지를 당부한다. "가장 기층조직으로 가야 하네. 그리고 절대 책임자로 일하지 말게. 끝으로 이름을 바꾸고 생활하게." 기층조직은 중국에서 가장 하급 조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름을 바꾸라고 한 것은 가능한 숨어서 장칭이 모르는 곳에서 살아라는 의미였다. 이후 저우자딩은 이름을 자팅(贾汀)으로 바꾸고 수년간을 숨어서 살았다.
저우언라이마저 피하지 못했던 문화대혁명의 광기였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문화대혁명의 극에 달한 광기도 기울기 시작한다. 그 변곡점에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큰 변고가 있다. 린뱌오, '충실한 마오쩌둥의 학생, 불변의 계승자' 린뱌오가 죽은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돈다
린뱌오(林彪)는 1971년 9월 13일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 반당집단을 조직하고 계획적으로 당과 국가 영도자들을 모함하고 박해했고, 국가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 했다. 1971년 9월 13일 황급히 비행기로 도주를 하던 그는 비행기 추락과 함께 이국 황야에서 그 시체마저 폭발하고 말았다.” 바로 중국 바이두(百度)의 린뱌오에 대한 설명이다.
린뱌오의 죽음, 좀 더 자세한 내막을 뒤에 자세히 서술할 기회가 있다. 문화대혁명에서 그의 죽음은 하나의 변곡점을 이룬다. 문화대혁명의 광기가 절정에 이르러 이제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변곡점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초를 견디며 살아남은 저우언라이의 역할이 정말 중요해진 것이다.
사실 아직도 많은 의문을 남기고 있는 게 린뱌오의 죽음이다. 갑작스런 비행기 폭발, 의심 많은 이들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아니다. 이야기 주제는 저우언라이가 어떻게 이 기회를 활용했냐 하는 것이다. 린뱌오는 문화대혁명의 두 세력 가운데 하나였다. 장칭 등 4인방이 글, 문을 대표했다면 린뱌오는 보다 확실히 군, 무를 휘어잡고 권력을 휘둘렀다.
그런데 가장 확실한 권력의 한 축인 무가 무너진 것이다. 중국 공산당사에는 언급이 적지만 이 사건으로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마오쩌둥이 아닐까 싶다. ‘믿고 후계자로 인정했던 린뱌오가 자신이 죽기를 기다리지 못해 죽이고 권력을 가지려 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마오쩌둥은 과연 누구를 믿을 수 있었을까?
린뱌오의 죽음과 함께 그의 일당들은 대거 숙청된다. 린뱌오가 전군을 장악했던 만큼 그의 세력도 컸다. 황융성(黄永胜),우파셴(吴法宪),추후이쭤(邱会作),리쭤펑(李作鹏) 등 모두 당 부주석, 군 부주석, 총참모장, 공군사령관, 해군사령관 등의 고관들이 일시에 린뱌오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당장 이들의 자리는 누가 채울 것인가? 아직 군내 당 원로들은 아직 그 역량을 보존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장칭은 린뱌오와 연계되지는 않았을까? 둘은 문화대혁명 초기부터 손을 잡았었는데… 그렇다고 문화대혁명 초기 숙청됐던 이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들은 이미 원한이 골수에 맺혔을 텐데…. 아마 수많은 상념이 마오쩌둥의 뇌리를 스쳤을 것이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말 정교한 재분석이 진행됐을 것이다. 실제 린뱌오가 죽은 그 해 10월 중국 공산당내 문화대혁명에 대한 광기가 급속이 시들었고, 복고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두드러진 게 저우언라이의 활동에 힘이 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자신 때문에 비서들마저 각종 수난을 당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던 게 저우언라이다. 당사에는 굴욕이었지만, 자신이 없어지면 당의 모든 권력이 손쉽게 4인방의 손에 떨어질 것을 우려해 눈물을 머금은 인내였다고 묘사돼 있다.
저우언라이는 그런 마오쩌둥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10월 4일 마오쩌둥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하는 회의에 저우언라이 총리를 반드시 참석시키라"라는 지시가 있자, 저우언라이는 바로 사태 수습을 위해 본격적으로 나선다. 10월 초순 린뱌오가 군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임시 조직인 ‘군위판사조(军委办事组)'를 해산시키고, ‘군위판공회의(军委办公会议)'를 설립하도록 마오쩌둥에게 제의해 동의를 얻는다. 군위판공회의의 주관자는 예젠잉(叶剑英)이었다.
1971년 11월 14일에는 좀 더 적극적인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다. 청두 지역 대표 좌담에서 마오쩌둥이 소위 ‘2월 역류’를 긍정적으로 언급한 것이다. ‘2월 역류’란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된 1967년 예젠잉, 탄전린(谭震林)、천이(陈毅)、리푸춘(李富春)、리셴녠(李先念)、쉬향첸(徐向前)、서룽전(聂荣臻) 등 주요 군사 원로, 당 원로들이 작심하고 린뱌오 등을 비판했던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천이,리셴녠 등이 타격을 입지만, 마오쩌둥이 무마하면서 일단락됐었다. 그런 사건을 다시 마오쩌둥이 꺼낸 것이다. 린뱌오가 배신자였음이 명확해진 다음의 언급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어 결정적인 순간이 온다. 린뱌오의 박해로 고생했던 천이가 1972년 1월 6일 숨을 거둔 것이다. 천이는 마오쩌둥의 오랜 전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