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모두가 절로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승리의 길이요, 선언이다. 크고 작은 구분이 없다.” 도를 따르지 않는 것은 소멸된다. 그래서 도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도리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지금 이 순간까지 도를 어기지 않았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도에 머물 수 있는가?전국책친책일(戰國策秦策一)에"도덕부후자,불가이사민(道德不厚者,不可以使民;도덕이두텁지못하면백성이따르지않는다.)고했다.반대로두터우면모두가따르게되는게도인것이다. 도에 머무는지는 스스로 자문을 해보면 안다. “내 길은 승리의 길인가? 적이 두려워하고 내 편들이 환호하는 길인가?” 도에 머물면 많은 이들이 보고 알아 준다. 그래서'내가도에들었는가'에대한또하나의측정포인트가 어떻게 기억되느냐는 것이다. 선인들이 역사에 기록되는 걸 두려워한 이유다.당장노자,공자,두성인만해도인류모두에게시대를뛰어넘어기억된다.그들의도가그만큼위대했다는의미일것이다. 특히노자는끝까지이름을남기지않았지만, 모두가 그를 노자라부르며 기억한다. 공자는 이름도 자자손손 남겼다.노자같은 이들은 어쩌면 한 둘이 아니다. 이름 없이책의 한 귀퉁이에 그 흔적을 남긴 이들도 적지 않다. 논어에서
"도는 ‘도’(道)다", "도는 승리의 길이다." 다만 그 속에 담긴 지혜를 어떻게 풀어내 체득하느냐는 것은 마뜩치 않은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다. 갑골문의 도의 자형이 길을 간다는 뜻이지만, 일찌기 그 길은 추상적인 의미로 문장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당장 노자부터 도를 길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로 쓰고 있다. 노자 42장에서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에서 하나가 나오고, 하나에서 둘이, 둘에서 셋이, 셋에서 만물이 나온다)고 했다. 공자도 마찬가지다. 논어에서 "오도 일이관지"(吾道 一以貫之;내 학설은 일관된다)며 도를 도리, 학설의 의미로 썼다. 그러다 보니 길이라는 의미의 로(路)가 필요해진 것이다. 역시 노자의 말이 맞았다. 말이 나와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다시 말이 나온 것이다. 어쨌든 왜 도는 이렇게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됐을까? 도 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 장의 스냅사진 같다. 긴 망토를 드린 제사장이 양손에 사람의 머리를 들고 가는 모습을 사진을 찰칵 찍은 자가 바로 길 도자다. 머리 수에 책받침 변이 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재미있는 장면이 그려진다.
도(道)란 무엇인가? 동양의 수많은 사상가가 이에 답을 했다. 모두가 매달려 노자의 의미를 풀었지만, "말이 많아 거짓이 많다" 결국 노자 말처럼 됐다. 그런데 갑골문자 도의 의미는 대단히 단순하고 명쾌하기만 하다. "도외무물"(道外無物;도밖에는사물은존재하지않는다)중국도가의대명제다.도대체도란무엇이길래사물의존폐를가르는것일까.?살다보면때론'과연내가가는길이옳은것인가?'는문제에빠지기도한다.여기서길은도다.결국'도란무엇인가?'하는질문이다.문제가어려운이유가있다. "신이란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질문과같기 때문이다.모두가 답보다 문제 자체가 중요한 질문들이다.삼성그룹창립자이병철 회장이 임종을 앞두고 종교인을 찾아 비슷한질문을남겼다.누가있어이병철회장만큼인생사잘살았다고자부할까?그런그가남긴질문이니새삼남달라보인다.하지만 결국 '인간의질문'이다.인간이라면누구나궁금해야하는궁극의질문인것이다. 이 궁극의 질문에는 실은답이중요하지않다.답을검증할방법도없다."신은 존재하는가?",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그 뒤 몇몇 신학자, 고승들이 300페이지 안팎의 책으로 답을 했다.결국헛돌았다.모두가이미있는주장을자기식으로다시설명했을뿐이다.또다시노자가지적한오류의고리에빠진다. "말이많아오해
사물에는 본과 말이 있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으며, 그 선후를 하는 것이 바로 도에 가까우니라. 대학의 말씀이다. 가장 단순한 한자 상과 하가 알려주는 것은 바로 도에 가까운 삶을 살도록 방법이다. 서구와 다른 동양적 세계관이 한자 상과 하에 담겨 있다. 살면서어디서부터높은지알면올라가기도쉽고,위에있는사람을구분하기도편하다.아래도마찬가지다.그런데우리이단순한진리를잊고살기일쑤다.한개인스스로가삶에대한절대적기준을가져야스스로만족할수있다.기준이없는이들이불안해하고끝없는욕망의노예가된다.이단순한진리도매번욕망에휘둘리고나서야다시한번깨닫는다.그래도 그게 삶이 아닌가 싶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한자의 역할이다. 한자를 가까지 하다 보면, 다시 한번 잊어버린 진리들을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다시중용의궤도에오를기회를갖는다.중턱기슭을찾는지혜,자족을할수있는마음이바로중용이다.상하는 그 모양이 단순하고 뜻이 쉽지만 그 속에는 정말 복잡하고 꽉 찬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본래 서예에서 획이 단순한 자는 크고 꽉 차게 쓰고, 복잡한 자는 성글게 쓰라는 법칙이 있다. 이 서예에 법칙은 한자의 이런 특성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한문의 세계는 단순함 속에 오묘함이 있고, 복잡함 속에 단순
한문의 세상은 아주 단순하다. 두 상반된 개념이 뭉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 간다. 상하가 그렇다. 위와 아래가 합쳐져 전체를 만든다. 우리가 흔히 쓰는 천지라는 말이 대표적인다. 하늘과 땅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온 세상이란 의미로 쓴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흔히 쓰는 모순의 개념도 크게 달라진다. 모순은 존재하기 힘든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인 것이다. 음과 양처럼 세상은 모순이 돼야 존재하는 것이다. 중국에 천고지후(天高地厚)라는 말이 있다. "하늘 높고 땅 넓다"는 의미다. 흔히 "천고지후, 하늘 높고 땅 넓은 줄 모른다"는 표현으로 잘 쓰인다. 한마디로 세상 견식이 짧아 스스로만 잘난 줄 안다는 의미다. 상하의 기준을 몰라 상하구분, 경중구분을 못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들이 절 저지르는 일이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 같은 일이다.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2014년 우리 사회를 흥분시킨 '땅콩 회항' 사건이다. 대한항공의 부사장이 땅콩을 주는 1등석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비행기를 램프 유턴시킨 사건이다. 비행기 회항은 국제법으로 규제를 받고 있고 1등석 기내 서비스는 사내 규정에 불과하다. 사내 규정을 지키려 국제법을
높이 오르고 싶다. 모든 사람이 가지는 욕망이다. 그런데 오르고 오르는데 참 끝이 없는 게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이다. 이제 됐다 싶은데 또 앞에 더 높은 산이 ‘나를 올라와 보라’ 유혹을 한다. 그런데 과연 높이 오른다는 게 무엇일까? 어디를 올라야 높이 올랐다고 할까?답은쉽지가않다.그래서모두가속 편하게정상에만서려고한다.정상에서면최소한모두가인정하는높은곳이기때문이다.그런데그보다높은봉우리가있다면어떻게할까?무엇보다 산의정상에는여러사람이설수있지만,인간사의정상은언제나 '1등'한명뿐이다. “도대체 누가 있어 위를 안다고 할 것인가” 한자위상(上)은이질문의답을찾는열쇠다.위상자는대표적인지사자다.생각을옮긴한자라는의미다. 던져진질문에대한수천 년내려온고민들이고스란히담겨있다. 위상자는갑골문과금문에서선위의점으로표현돼있다.쉽게말해기준위에있다는것이다. 뒤로 지나면서 이 기준과 점은 선으로 연결돼 있다. 기준 위의 어떤 점도 모두 위라는 의미다. 즉 위의 기준은 상대적인 게아니고,절대적인것이라는의미다.좀더쉽게말해 "위를알려면그가장아래를보라"는것이다.위의위에는항상그위의위가있으니위가무엇인지알려면위들의가장아래를보라는것이다.참단순하면서도 현묘하다. 두 말 것 없이 아래하(下)역시마찬가지다.
우리는 더 많은 무(无)를 인식할 수는 없을까? 위기를 버텨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 바람 풍의 지혜가 그것을 도와준다. 한자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설문해자는 바람 풍과 관련 좀 엉뚱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팔(八) 안에 벌레 충(蟲)이 있는 것으로 봤다.그래서 먼저 사방에서 부는 여덟 개의 바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바람이 불면 벌레가 생긴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설문해자가 전서만을 보고 갑골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다만 설문해자의 해석에도 바람이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는 분명히 살았다는 게 갑골문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자 바람 풍의 쓰임을 보면 바람의 의미다 보다 더 명확해진다. 한자 의미 그대로 바람의 기운이란 뜻은 풍기(風氣)는 풍속(風俗)이란 뜻이다.그 속에서 사람들은 살면서 그에 순응하는 문화를 만들어 간다.바람은 집단뿐 아니라 개인도 만들어간다. 풍모(風貌), 풍격(風格) 등은 개인의 모습, 이미지를 일컫는 말이다. 흔히 ~풍 하면서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묶어서 말하기도 한다.풍은 가장 인간적인 공감대다.과학은 아직 왜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공통된 색감을 느끼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풀을 뿌려 바람
"갑골자를 만든 선인들에게 바람은 유심론 같은 철학적, 어찌 보면 공허한 질문에 머물지 않았다. 바람은 실재하는 신화적이기도 하고 인간적인 존재였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유(有)라는 존재와 무(無)라는 존재로 이뤄져 있다. 무라는 존재는 그냥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총칭일 뿐이다. 그렇다고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이런 세상의 유와 무는 항상 그 속의 '나'와 연관되고 상호 작용을 한다. 유는 인식해 알고 있지만, 무는 인식하지 못해 모를 뿐이다.그럼 우리는 더 많은 무를 유로 바꿀 수는 없을까? 더 많은 무를 인식할 수는 없을까? 여기에 바람 풍의 지혜가 그 답을 준다. "보이지는 않는 것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람 풍자 속에는 이런 지혜가 들어있다. 한자는 이런 지혜를 담은 기억 저장 장치(USB)다. 그 한자 속 기억들은 마치 USB 속 기록이 디스플레이 장치를 만나그내용이펼쳐져지듯우리가 그 글을 깨우치는순간발현되는것이다.다시본론이다.바람풍은무엇의상형일까?무엇을본떠만든글자인가? 바람 풍은 새의 모양을 본딴 글자다.새가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바람풍이다.새가 바람을 마주하고 날개로 머리와 몸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세상은 유(有)라는 존재와 무(無)라는 존재로 이뤄져 있다. 언제나 우리가 보는 게 다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어야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법이다.” 신비한 인디언 무당의 모습이 가끔 영화에 등장한다. 바람을 보고, 바람과 대화를 한다.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로 숲 속 동물의 존재를 알고 저 하늘의 위험한 변화도 미리 안다. 환상 속에 인디언은 독수리로 변해 직접 바람을 타고 저 멀리, 저 높은 곳으로 날아가기도 한다. 천리 밖, 백리 밖의 친구에서 자신의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한자를 공부하고 바람 풍(风) 자를 볼 때마다 떠올리는 이미지다. 바람의 이미지다. 바람 풍자를 배우고 놀란 게 이 풍자라 상형자라는 것이다. 상형이 뭔가? 바로 사물의 모양을 본떠 만든 글자다. 그런데 바람 풍이 상형자라니? 그 옛날 사람들은 바람을 봤다는 것일까? 도대체 바람을 어떻게 봤을까? 바로 바람 풍 자가 전하는 비밀이다. 신비한 인디언 무당의 모습이 가끔 영화에 등장한다. 바람을 보고, 바람과 대화를 한다.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로 숲 속 동물의 존재를 알고 저 하늘의 위험한 변화도 미리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