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아내만은 건들지 마오
류샤오치의 비판이 거세지던 1966년 12월 18일 결국 왕광메이를 조사하는 특별 조사부가 신설된다. 한국으로 치면 ‘왕광메이 특검’이 시작된 것이다.
왕광메이는 류샤오치의 6번째 부인이다. 중국이 나은 학자요, 정치가였다. 1948년 류사오치와 결혼해 1969년 사별하기 전까지 류사오치와 1남3녀를 두고 살았다.
공산 중국 건국 초기에는 마오쩌둥도 아끼던 여성 인재로 꼽힌다. 무엇보다 일찍이 미국 유학을 영어를 잘했다. 공산당 활동도 미국과 군사 협상에서 공산당측 통역을 맡으면서 이뤄졌다. 그의 영어 실력을 마오쩌둥도 감탄했을 정도다. 오죽했으면 왕광메이를 아끼는 마오쩌둥에 마오의 부인이 장칭이 질투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장칭은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4인방 중 한 명이다. 당대 중국 최고 권력인 마오쩌둥의 아내였다.
왕광메이는 통역 과정에서 미국에 간첩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바로 이 혐의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이 조사의 끝에는 류샤오치가 있었다.
왕광메이는 1967년 1월 6일 돌연 중학교를 다니던 딸이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전화를 받는다. 놀란 왕광메이가 병원에 도착하자, 칭화대 조반파 홍위병들이 왕광메이를 잡아 가둔다. 소위 ‘꾀로 왕광메이를 나포하다’ 사건이다. 다음날인 1월 7일에는 그의 아들 유윤눠가 구금된다.
왕광메이는 남편 류샤오치와 동시에 인민 비판대에 섰다 잠시 풀려나기도 하지만, 다시 구금돼 무려 12년만에 자유를 찾는다. 왕광메이는 감옥에서 남편 류샤오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1967년 1월 중순이 되자 홍위병들이 류샤오치 집을 이제 자기 집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홍위병들은 류샤오치에 대한 비판 대회를 열었으며, 류샤오치에게 마오쩌둥 어록을 외우도록 시켰고, 외우지 못하면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비판했다.
1967년 1월 13일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의 인생의 마지막 대면을 한다. 대면은 마오쩌둥이 류샤오치를 찾으면서 이뤄졌다. 깊은 차 한 대가 류샤오치 집 앞에 섰고, 차에서 내린 간부가 류샤오치에게 마오쩌둥이 긴급히 찾는다는 소식을 전했다.
긴장된 모습으로 류샤오치는 차량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뤄진 짧은 만남.
하지만 대화의 내용은 새로울 게 없었다.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건강을 걱정했고, 류샤오치는 “모두 개인적 노선의 잘못이다”며 “책임은 혼자 지겠다.”고 강조했다. 류샤오치는 문화대혁명으로 많은 공산 중국의 동량 간부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니 자신을 벌아고 간부들을 구해야 중국을 이끌 수 있다 강변했다.
재미있는 것은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에게 딸의 안부를 물었다는 것이다. “핑핑의 다리는 어떻다고 하는가?” 핑핑은 류샤오치의 딸로 칭화대 조반파는 이 핑핑이 교통사를 당했다고 속여서 왕광메이를 잡아 가뒀는데, 마오쩌둥은 이미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공산당사에 따르면 류샤오치는 이에 억울하다는 심정을 표출했다. “본래 그런 일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내를 잡아 가두려고 속인 것입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런 류샤오치에 대해 아무런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공산당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프랑스 공산주의자 두 명이 책을 류샤오치에게 주며 “건강 조심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하게”라고 말했을 뿐이다.
훗날 중국 공산당 기록에 따르면 류샤오치는 이날 만남에 대해 “특별한 정치적 대화가 오간 것은 없다. 마오쩌둥 주석을 대단히 친절했고 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