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志), 마음에 놓인 선비라는 뜻이다. 마음에 선비를 품는다. 다른 게 아니라 뜻이다. 의(意)요, 지(志)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요, 내 마음 속 선비다. 본래 선비란 무엇인가? 조선에서 ‘선비’라 했지, 본래는 그냥 ‘사’(士)다. 사실 선비의 사는 상형자다. 도끼의 모습이다. 본래 임금 왕(王)과 같이 쓰이기도 했다. 임금의 도끼가 더 크고 사의 도끼는 적다. 임금을 뜻하는 도끼 위에 한 획을 더하면서 글자의 차이가 생긴다. 사는 고대 가장 지위가 낮은 귀족이었다. 고대 형을 집행하는 관료를 의미했다. 문과 무를 관장해 전쟁을 치르는 계급이기도 했다. 춘추시대까지는 이 사 계급만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사 계급 아래 병졸이 생기는 전면전 시대가 됐다. 유럽으로 치면 기사 계급이었던 셈이다. 그냥 마음이 아니라, 형벌을 행하는 마음. 바로 지(志)인 것이다. 반드시 지키고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를 벌하겠다는 각오인 셈이다. 설문해자 해석은 좀 다르다. 갑골문자는 청나라 말기 발견됐다. 갑골문자에 대한 연구로 한자의 고대 의미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많은 문헌의 의미도 새롭게 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설문해자는 당대 한자에
'우리'는 나와 너의 조화다. 나만 있어도, 너만 있어도 '우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조합은 '너희'다. 결국 우리가 너희이며, 너희가 바로 우리다. 동양 고전에 큰 줄기를 형성하는 사물의 이치다. 철학적으로는 주역의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는 이치이며, 불가의 '색즉시공'(色卽是空) 사상에서도 보인다. 생활 속의 모두가 동포요, 친구라는 '사해주의'(四海主意)다. 서양에서는 19세기말 겨우 인간의 무의식에 관심을 갖으며 등장한다. 칼 융의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적 무의식)와 아니마(남성의 여성적 무의식)과 비슷하다. ‘우리가 바로 너희다.’ 바로 역(易)의 사상이다. 갑골문에서 역은 내 술잔의 술을 네게 나눠주는 모양의 글자다. 예수의 포도주다. 내가 네게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예수는 포도주와 빵을 영과 육에 비유하기도 했다. 역의 자형에 대해서 주물하는 모양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고, 위 태양과 아래 태음이 서로 뒤바뀌는 모습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다. 갑골문에서 발달하는 글자들은 역(易)이 처음 같은 두 그릇 가운데 한 곳에 담긴 액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이었다가 조금씩 한 그릇에서 옮겨지는 모습만 남은
마음속에 뭔가가 떠나지 않는다. 뭔가 가슴에 남아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는가? 마치 가시처럼 찌르지 않는가? 념(念)이다. 념은 지금(今)의 마음(心)이다. 마음의 지금이다.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속에 항상 ‘지금’처럼 머물고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념이다. 념은 그래서 집요하다. 집념(執念)이 그렇다. 사전적으로 념은 “한 가지 일에 매달려 마음을 쏟음. 또는 그 마음이나 생각”이라는 뜻이다. 념은 그래서 ‘읽다’는 뜻보다 ‘외우다’는 뜻이 강하다.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다. 념은 항상 내 마음에 지금처럼 머무는 것이다. 금(今)은 본래 그 의미가 심장한, 무서운 말이다. 본래 금은 짧을수록 편하다. 지금(只今)이란 말이 ‘방금’이라는 뜻인 이유다. 한자 금은 상형자다. 입에 물건을 물고 있는 모습이다.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으면 이를 악물게 된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지금’의 ‘금’이다. 이게 음식인지, 독인지는 아직 모른다. 삼켜야 아는 데 입에 물고만 있는 게 지금의 금이다. 바로 한 순간이라는 뜻이 그래서 나왔다. 그런 금이 마음에 닿아 있다. 그게 념이다. 마음에서 입 밖으로 나가야하는 것인지, 마음속에 그저 담
조화(調和)로운 사회는 동양이 꿈꿔온 최상의 인간 사회다. 그런데 정작 조화가 무엇인지 아는 이 드물다. 너무 곳곳에 널려 있어 그런지 모른다. 동양의 모두가 추구했던 조화는 우리 주변의 돌덩이다. 바로 자연(自然)이다. 한자로 자연은 스스로 혹 나 자(自)에 그럴 연(然)이 합쳐진 단어다. 한마디로 ‘나 같은’, 혹 ‘나인 나’란 의미다. 가장 나인 존재가 바로 자연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나인 상태로 있는 게 자연이고, 넓게는 모든 만물이 가장 스스로인 상태가 바로 자연이다. 결국 자연은 ‘만물이 스스로 자신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사물이 균형을 찾은 가장 편한 상태다. 그게 물리(物理)다. 사물의 이치다. 자연이란 세상 만물이 가장 편한 상태다. 다시 자연을 보라. 그 속의 ‘나’들은 ‘너’와 함께 ‘우리’를 만든다.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우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자연은 나와 너가 우리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자연 속의 ‘가장 나인 나’의 존재는 ‘나’와 ‘나’ 사이의 평형, 서로 끌어당기되 부딪치지 않고, 서로 밀어주되 서로 버리지 않는 ‘우리’라는 관계로 존재한다. 자연이 바로 조화(調和)요, 평형(平衡), 균형(均衡) 상태의 구현이다. 세상
베이징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중국의 교육가 후스( 胡适) 는 중국인들에게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의식을 갖도록 문학운동과 계몽운동에 노력한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1989년생인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1914년에 돌아와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그가 1919년에 잡지 신생활 제 2권 (新生活 第二期) 에 발표한 차부뚜어선생 전( 差不多先生 传) 이란 단편수필은, 당시 중국의 비과학적인 의식을 아주 재밋는 비유로 통렬하게 풍자한 글로, 당시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 현재까지 그 내용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제목이 차부뚜어 선생 전 이라해서, 차 부뚜어 (差 不多)라는 이름의 유명인사가 있는 것아 아닌데, 후스는 이 수필의 첫 머리에서, 중국에는 ' 이 차부뚜어 선생이 가장 많고 유명하다' 고 시작한다. 왕씨성을 가진 왕선생도 아닌데 말이다. 이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인, 차 부뚜어 [chà‧ buduō] 란 말은, ' 차(差) 차이가 부뚜어 (不多) 많치 않다 크지않다' 는 뜻의 말로, 어떤 일이 대강 이루어지거나 거의 비슷하게 이루어졌을 경우에,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상투어이다. 다 됐나? 다 끝났나? 는 물음에,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 거의 대강 다 됐다
의(意), 뜻이다. 마음 위에 있는 소리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다. 끝없이 들리는 마음의 소리다. 내 마음 속의 소리가 들리면, 수없이 끊임없이 들린다. 저절로 행하게 된다. 마음의 소리가 없어질 때까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것, 그치지 않는 마음의 소리, 그 것이 바로 뜻이다. 의지(意志)다. 한자 의지는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의 소리가 끊임없는 게 의(意)이고, 그 마음의 소리가 변치 않는 게 지(志)다. 의지란 마음 속 수많은 소리의 파편들이 하나가 되고, 그 것이 머물러 변치 않을 때 의지가 되는것이다. 순 우리말 그대로, 앞의 의도 뜻이요, 뒤의 지도 뜻이다. 의지란 그런 것이다. 마음 속 소리의 파편들이 하나로 형체를 이루고 머무는 것이다. 그 의지는 오래될수록 빛이 난다. 세월의 풍파와 마연(磨硏)으로 만들어지는 빛이다. 그런 의지는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기억의 억(億)은 그런 생각을 담았다. 억은 소전(小篆)에 그 모습이 보인다. 개인적으로 봐도 갑골문에서 보이기에는 뜻이 너무 섬세하다. 사람 인 옆에 뜻 의가 있는 모양이다. 지금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 인의 모양과 뜻 의의 모양이 현대화 됐을 뿐이다.
한자 명상이 던지는 난센스 퀴즈다. 세상에서 가장 긴 글자는 무엇일까? "생각 사(思)다." 어렵다면 어렵고, 엉뚱하다면 엉뚱하다. 말 그대로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이란 게 본래 그렇다. 생각은 마음의 소리를 내기 전에 생기는 것들이다. 작은 물방울의 수를 세기 어렵듯 생각 역시 셀 수 없다. 작은 물방울이 그렇듯 홀연히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불현 듯 솟아난다. 생각이다. 생각은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이다. 고 신윤복 선생의 평이다. 생각은 이성적 머리와 감성적 가슴 사이를 채우는 것인데, 그 둘 사이 차이가 그리 넓고 크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 사(思) 본래의 뜻이 머리와 가슴이다. 생각이라는 한자는 금문도 없고 전서에서 등장을 한다. 전국시대 들어 생각이라는 한자가 만들어져 쓰였다는 의미다. 마음의 소리인 뜻 의(意)자 있어, 생각이라는 뜻으로도 쓰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 뒤 마음의 소리가 의지의 뜻으로 쓰이면서 다른 마음의 잡음들을 뜻하는 한자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오해를 사지 않으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다. 필자는 학자가 아니어서 학문적 검증을 통해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자료를 통해 얻은 생각들을 공유하고자 이글을
一片丹心 한 사람이 평생을 산을 좋아했다. 정상에 오르면 돌을 하나씩 쌓았다. 작은 기도와 함께 그렇게 돌에 돌을 하나씩 얹었다. ‘오늘도 이렇게 산을 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게 해주세요.’ 작고 평범한 기도였다. 때론 행복을, 때론 건강을, 때론 자신을, 때론 가족을, 지인을 위한 것이었다. 작은 돌은 그렇게 또 다른 작은 돌 위에 쌓였다. 쓰러지지 않게 조심스레 놓았을 뿐이다. 일 년이 지나 돌은 돌 위에 조금씩 자라 키가 커졌다. 탑이 됐다. 탑 모양이 되자 탑은 저절로 자라기 시작했다. 산이 좋아 산에 오른 사람들이 탑을 보고 하나둘씩 돌을 얹기 시작한 것이다. 돌탑은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았다. 허술해 보이는 수많은 작은 구멍 덕이었다. 구멍 덕에 돌탑은 바람에 저항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대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처음 돌을 얹은 이는 이제 더 이상 산을 오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탑은 더 자랐다. 탑 옆에 아들, 딸 탑도 생겼다. 탑 가족이 됐다. 산이 좋아 오른 이들의 작은 마음 한 조각이 그렇게 돌로 탑이 됐고, 탑의 가족이 됐다. ‘누구의 뜻이 이리 간곡한가.’ 매번 산행에서
"블루, 레드, 화이트" 1994년 나온 프랑스 영화다. 자유(블루), 박애(레드), 평등(화이트)을 주제로 했다는 뭔가 철학적인 수수께끼 같은 영화였다. 사실 영화 내용을 보면서 왜 자유이고, 박애이며, 평등이 주제였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돼 내용도 잊었지만, 사색적인 도전을 던진 탓에 영화의 편린들이 아주 오래 남았다. 무엇보다 세 영화 중 백미는 첫 개봉된 블루다 싶다. 영화 전반적인 색감과 음악적 감성, 누가보다도 예술적이다 싶은 몽환이 서려있다. 특히 이지적인 줄리엣 비노슈의 고급 진 매력이 풀풀 넘친다. 동양의 우아함의 서구적 표현이다. 세 영화는 독특한 인생을 경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각기의 주제를 풀어간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 인물들은 한 시대를 살아 한 영화 속에서 모두가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더욱 재미있는 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을 버리는 노인’이다. 영화를 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 딱 좋은 아주 짧은 순간에 등장한다. 안 그래도 작은데 허리가 굽어 더욱 작아 보이는 노인이 어렵게 손을 뻗어 병을 분리 수거통에 버린다. 정확히 버리기 위해 허리 굽은 노인은 한동안 애를 쓴다. 겨우 병이 버려지는 순간 장면은 바뀐다. 주인공들
저 고산 절벽에 자란 고송(孤松)은 아름답다. 직각의 가파른 절벽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조금이라도 더 빛을 받으려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자란 ‘기형의 몸’이지만 아름답다. 살려했고, 살아남아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살아남아 그 어떤 키 큰 소나무보다 더 멀리 보고, 더 태양과 가깝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살고자 하는 뜻을 이뤘기에, 매일의 일출이, 석양이 새로운 것이다. 살고자 하는 뜻을 이뤘기에, 기형의 몸이 저 아래 평범한 언덕 위에서 하늘로 쭉쭉 벋은 자태를 자랑하는 어떤 소나무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뜻이 드물기에 귀한 것이다. 뜻 지(志)는 이렇게 마음이 그쳐 머무는 것을 말한다. 지금은 선비 사(士) 아래 마음 심(心)을 쓰지만 본래 뜻 지는 그칠지(止) 아래 마음 심을 썼다. 마음이 그친 곳이 바로 뜻인 것이다. 마음이 그쳐 변치 않는 곳이 바로 뜻인 것이다. 그런데 묘한 게 마음이란 존재다. 내 것인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 내 맘인데 남의 뜻만 따른다.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게 마음인데, 주머니 돌보다 가볍게 주어지는 게 맘이다. 또 이미 줬다 싶은 데 다시 돌아와 있는 것도 맘이다. 그래서 이백은 아무리 정숙한 여인이라도 봄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