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후한시대 환관 채륜(蔡倫)이 개발한 가볍고 저렴한 종이(紙)는 중국 역사에서 문무(文武)의 발전에 모두 기여하게 된다.
종이와 학문의 뗄 수 없는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상황이고, 무(武)의 측면에서 보자면 종이 갑옷이 대표적인 파생 상품으로 꼽힌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고대 병사들은 대부분 종이로 만든 갑옷을 입었다. 여러 겹의 종이에 무명이나 비단 등 천을 덧대 아교, 송진 등 접착제로 고착시킨 갑옷이었다.
종이 갑옷은 장점이 많았다. 철갑(鐵甲)에 비해 제작 비용이 훨씬 적었다. 철갑에 비해 무게가 적게 나가 전장에서 재빠르게 이동해야 하는 병사들에게 유용했다. 특히 물에 빠지는 경우에도 가라앉지 않아 수군에게 적합했다. 한 마디로 저비용 고효율 갑옷이었던 셈이다. 옛 중국 기록에도 그 나름 효과가 컸다고 나온다.
송나라 인종 때 발간된 국방백서인 ’무경총요(武经总要)‘에 따르면 당시 갑옷은 철, 가죽, 종이 등 세 가지 재료로 제작됐는데 일반 병사들이 착용한 종이 갑옷이 실제 전투에서 믿음직스러운 기능을 발휘했다고 기록돼 있다.
종이 갑옷에 대한 언급은 ’무경총요‘에 앞서 당나라 때도 엿보인다. 당 의종 때 한 절도사가 "종이로 갑옷을 만들었는데 약한 화살은 뚫지 못한다"고 보고한 기록이 있다.
물론 저 멀리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약한지 강한지 어찌 알랴? 맞아 죽으면 강한 것이고, 살아남으면 약한 것이었으리라 싶다. 그래도 분명한 효과는 있었던 모양이다.
종이갑옷의 역사는 위진남북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사(南史) 본기에 “북위 황제가 남제를 공격하면서 제후들을 불러 책략을 논의할 때 궁궐이 각종 병기와 종이 갑옷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후주시대 농민 반란군을 백갑군(白甲軍)이라 불렀는데, 적지 않은 역사가들은 이 백갑(白甲)이 하얀 종이 갑옷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농민 반란군들은 명청 시대까지 대부분 종이 갑옷을 입었다. 역시 값싸고 기능성이 뛰어나며 대량제조가 가능한 제품은 시대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발휘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