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먹고 사는 게 문제다.
지금도 그렇고, 역사에서도 그렇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 살기가 힘들어지면 문제가 생긴다.
당의 흥망성쇠도 마찬가지다. 당은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를 구가했다. 당 나라의 발전의 토대는 당대 조용조 시스템의 완성이었다.
당은 쌀을 보관하는 창고를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그물망처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대 수도 장안은 인구 100만 명 이상이 산 도시다. 고대 100만 명 인구를 지닌 도시는 아마 장안이 유일했을 것이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도시의 상하수도 시설 등 생활설비는 물론이고, 그 인구를 위한 식량, 식수가 그만큼 필요하다는 의미다.
생활설비도 설비지만, 식량은 당장 생계를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당은 5개 종류의 쌀 창고를 지어 운용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게 태창(太倉)이며, 전운창(轉運倉), 군창(軍倉), 상평창(常平倉), 의창(義倉) 등이 그 것이다.
태창은 당나라의 황실, 내각의 운영 등에 쓰이는 쌀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당대는 쌀이 돈이었다. 나랏일을 하는 공무원들에게 주는 녹봉이 바로 쌀이었다.
전운창은 쌀을 중앙으로 이동하기 위해 임시로 보관하는 창고다. 군창은 군용미를 보관하는 창고이며, 상평창은 풍년이 들면 일부 보관했다 농사가 부진하면 풀어 쌀값의 안정을 꾀하는 보충미를 보관하는 창고다. 의창은 말 그대로 기근이 들면 풀어 백성을 구하기 위한 쌀을 보관하는 곳이다.
태창은 장안성은 물론, 각 지방 주현급에 설치돼 운용됐다. 지난 2023년 산시성 시안 다바이양(大白楊)촌에서는 당대 태창의 유적이 발굴됐다. 무려 11개의 대형 창고의 유적이 발굴됐다. 유적은 당시 창고 관리가 어느 정도 정밀했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먼저 유적지 쌀 창고는 원형의 큰 구덩이를 파고 흙으로 다진 뒤 그 위해 다시 창고를 짓는 형식이었다. 창고는 고원지대에 지하수가 깊은 곳에 위치했는데, 이는 지형 특성상으로 건조해 쌀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원형의 구덩이는 입구가 넓고, 바닥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다. 바닥은 습기를 막기 위한 점토로 다져져 있었다. 이 같은 형식은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당의 다른 어떤 제도보다 조용조, 쌀의 관리가 잘 됐다는 점을 꼽는다. 당시 당은 오랜 동안 북쪽 이민족들의 남하를 막는 전쟁을 수행했는데, 당은 튼튼한 식량 공급을 바탕으로 지구전을 펼쳐 완승을 거둔다.
역사가들은 결국 당의 쌀창고 시스템의 승리였다고 평가한다. 그만큼 당 왕조의 성공의 이면에는 쌀 창고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또 실제 당 왕조의 쇠락에도 쌀 창고 시스템의 붕괴가 역할을 했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당의 여황제 무측천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는 데, 당대 장안성의 쌀 창고 시스템이 운용의 한계에 이른 탓이라는 게 많은 중국 역사가들의 평가다.
당시 장안성은 당의 융성과 함께 급속히 인구가 늘었는데, 인구 100만 이상이 되면서 장안성의 식량을 책임이지는 태창에 부족 현상이 주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물론 장안성에서는 이씨 황족들의 세력이 커 이를 피하기 위한 천도였다는 주장 역시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무측천 낙양 천도의 이유 중 하나다.
난이 일어나면서 당의 쌀 창고 시스템은 급속히 망가졌으며 결국 당 왕조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게 역사가들의 평가다.
당대의 쌀은 오늘날의 화폐다. 결국 화폐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중국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당 왕조의 붕괴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 역시 화폐 시스템 붕괴로 인한 ‘외환위기’를 겪었다. 화폐 시스템이 한 나라의 운영에 어느 정도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